영화 이야기

2017년 12월 29일 금요일

세상의 모든 돈(All the Money in the World)


게일(중간 왼쪽)이 보도진의 질문 공세를 받고 있다. 옆은 해결사 플레처.

석유재벌 게티의 손자 납치 다룬 스릴러 드라마


LA의 게티뮤지엄을 세운 석유재벌 J. 폴 게티의 손자 존 폴 게티 III의 납치사건을 다룬 스릴러 드라마로 솜씨 좋은 감독 리들리 스캇의 것치고는 중간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보고 즐길 만은 하나 영화가 너무 기계적이고 안전 위주로 만들어져 납치 스릴러가 줘야 할 긴장감이나 아슬아슬한 기운을 느낄 수가 없다.
이 영화는 영화 내용보다도 개봉 한 달여를 앞두고 스캇이 게티 역의 케빈 스페이시가 나온 장면을 모두 제거하고 대신 크리스토퍼 플러머를 기용해 재촬영, 큰 화제가 됐었다. 이유는 스페이시가 섹스 스캔들로 물의를 빚었기 때문이다.
1975년 로마의 밤거리를 배회하던 폴(찰리 플러머-크리스토퍼와 관계 없음)이 괴한들에게 납치된다(괴한들의 두목으로 프랑스의 유명한 배우 로맹 뒤리가 나온다). 그리고 이들은 폴의 어머니 게일(미셸 윌리엄스)에게 전화를 걸어 몸값으로 1,700만 달러를 요구한다.
게티가 버리다 시피한 아들 폴 II의 전처인 게일은 납치된 아들의 조부인 게티(플러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수전노인 게티는 이를 완강히 거부한다. 게티가 얼마나 짠가 하면 그는 세탁비를 아끼기 위해 자기 내복을 손수 욕실에서 빨 정도다. 그런 게티가 1,700만 달러를 납치범들에게 선선히 줄 리가 없다. 게티가 한다는 소리가 자기는 손자가 14명인데 폴의 몸값을 냈다가 다른 손자들도 납치되면 재산 탕진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급해진 납치범들은 폴의 한쪽 귀를 잘라 게일에게 보내자 게일이 게티에게 아들을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하나 게티는 이에 마이동풍 식이다. 그리고 게티는 문제 해결을 위해 전직 CIA요원인 플레처 체이스(마크 왈버그)를 고용한다.
이어 중간 부분이 장시간 납치범들과 게일(이 영화는 어떻게 보면 게일의 영화라고 하겠다) 간의 몸값을 위한 거래로 진행되는데 양측은 마치 물건을 놓고 값을 흥정하듯 몸값을 흥정한다. 이 흥정으로 몸값이 점점 내려간다. 이 중간 부분이 너무 장황해 지루하다. 게티는 마지막에 상당히 할인된 몸값을 지불하기로 결정하는데 그것도 대부금 형식으로 내기로 한다.
이런 게티는 희귀 고가 미술품에 대해서는 후한데 납치극 와중에도 손자의 몸값 지불은 거절하면서도 마돈나와 아기 예수의 그림을 150만 달러에 살 정도로 미술품 수집에 열성이다. 그래서 지금 게티뮤지엄도 생긴 것이다.
끝부분 경찰의 폴 구출 작전이 있기 전까지 긴장감과 스릴이 부족한 이유 중의 하나가 납치된 폴의 상황에서 그의 귀를 자르는 장면을 빼곤 전연 물리적 위험을 느낄 수가 없는 것. 그리고 찰리 플러머와 마크 왈버그는 미스 캐스팅이다. 둘 다 전연 기력이 없는 연기를 해 영화의 김을 빼는 식.
이에 반해 플러머의 간교하게 매력적이고 위엄과 살기가 도는 연기가 눈부시다. 윌리엄스도 맹렬한 연기를 보여준다. 골든글로브 감독, 여우주연(드라마 부문) 및 남우조연(크리스토퍼 플러머)상 후보. 상영시간 132분. R등급. ★★★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영화배우는 리버풀에서 죽지 않는다(Film Stars Don‘t Die in Liverpool)


글로리아 그램(왼쪽)과 그의 연하의 애인 피터 터너 역을 맡은 아넷 베닝과 제이미 벨.

50년대 스타 여배우 글로리아 그램, 28세 연하남과의 불꽃 같은 로맨스


1950년대 초 인기 정상에 올랐던 할리웃의 요부형 조연 스타로 ‘악인과 미녀’(The Bad and  the Beautiful·1952)로 오스카 조연상을 탄 글로리아 그램(작은 사진)의 생애 마지막 2년간 영국에서의 연하의 애인 피터 터너와의 관계를 그린 가슴 저미는 로맨스 드라마다. 
그램은 배우로서 완전히 한물간 1979년 연극으로 재기하려고 런던에 갔다가 28세 연하인 터너를 만나 둘이 뜨거운 사랑을 나누나 그로부터 2년 후 유방암으로 57세에 사망했다.
소녀 같은 얼굴에 뾰로통한 표정을 지녔던 그램은 순진으로 위장한 치명적 매력을 지닌 남자 잡는 여자로 잘 나왔다. 그의 대표작들로는 ‘고독한 곳에서’(In a Lonely Place·1950) ‘갑작스런 공포’(Sudden Fear·1952) ‘지상 최대의 쇼’ 및 ‘빅 히트’(The Big Heat·1953) 등이 있다. 몇 차례 결혼 경력이 있는 그램의 남편 중 하나가 ‘이유 없는 반항’을 감독한 니콜라스 레이. 그런데 그램은 레이의 전처에서 본 10대 아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다 레이에게 들켜 이혼을 당한 후 이 아들이 성장했을 때 결혼해 센세이션을 일으켰었다. 
유방암이 휴지기에 접어들었을 때 그램(아넷 베닝-워렌 베이티의 아내)은 시들어버린 인기를 연극으로 재기하려고 런던에 간다. 사람들은 당시 그램을 ‘흑백영화의 빅스타였다’고 기억할 때다. 그램의 어머니는 영국인으로 영화에서 베테런 바네사 그레이브가 어머니로 나온다.
그램은 런던서 리버풀이 고향인 젊은 배우 터너(제이미 벨)를 만나 둘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깊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램의 유방암이 재발하면서 그램은 터너와 함께 리버풀의 터너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둘은 그램이 죽음에 이르러 가족과 함께 있기 위해 1981년 뉴욕으로 이동하자마자 사망하기 직전까지 지극한 사랑을 나눈다. 
볼만한 것은 베닝의 민감하면서도 정열적이요 또 재능이 번득이는 연기다. 그램의 흉내를 내지 않고 그의 분위기를 기막히게 잘 표현해 감동적이다. 이와 함께 사랑의 희열과 연인의 죽음을 지켜보는 고통과 이별의 슬픔을 강렬하게 보여준 아역배우(‘빌리 엘리옷’) 출신의 벨의 연기도 출중하다. 
또 터너의 어머니와 아버지로 나온 줄리 월터스와 케네스 크래냄의 연기도 좋다. 필자는 얼마 전 런던에서 터너를 만났는데 얼굴이 벨과 많이 닮았다. 부드럽고 가슴을 파고드는 감정적 힘이 가득한 드라마다. 폴 맥기간 감독. R등급.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포스트(The Post)


브래들리 편집국장이 그램 사장(왼쪽) 집을 방문, 비밀문서 보도에 관해 논의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의‘베트남전 기밀 폭로’스릴있게 그려


지난 1971년 미 국방부의 베트남전에 관한 비밀문서를 폭로한 워싱턴 포스트의 내막을 서스펜스와 스릴을 갖춰 속도감 있게 그린 스티븐 스필버그의 흥미진진한 드라마다. 모양새 좋고 말끔하고 또 막힘없는 서술형태 등 스필버그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난 영화다.
미디어 스릴러인 이 영화는 자연 후에 역시 포스트에 의해 폭로된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룬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과 비교가 되는데 ‘대통령의 사람들’이 ‘포스트’보다는 한결 품위와 깊이와 무게를 지녔다. 너무 단정한 것이 탈이긴 하나 ‘포스트’는 강건하고 박력 있으며 연기 좋고 또 시종일관 보는 사람의 관심을 잡아당기는 준수한 작품이다. 작품과 감독 그리고 남녀 주연 등 모두 6개 부문에서 골든 글로브상 후보에 올랐다.
닉슨 대통령 당시 로버트 맥나마라 미 국방장관(브루스 그린우드)이 사설연구단체 랜드사에 분석을 위해 맡긴 ‘펜타곤 페이퍼’를 빼낸 사람은 랜드사 직원인 대니얼 엘스버그(매튜 리스)였다. 엘스버그는 문서를 뉴욕 타임즈에 누출해 신문에 보도가 되자 백악관은 더 이상의 보도를 법적으로 막는다.
이에 엘스버그는 포스트의 편집부국장 벤 백티키안(밥 오덴커크)에게 문서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한다. 타임즈에게 세계적 특종을 뺏겨 분위기가 안 좋은 포스트의 편집국장 벤 브래들리(탐 행스)는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호재에 들뜬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포스트의 여사장 캐사린 그램(메릴 스트립)에게 알린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포스트가 주식을 공개하기 직전이어서 문서를 공개해 정부의 비위를 건드렸다간 이 일에 차질이 생길 것은 물론이요 사장과 편집국장을 비롯해 보도한 기자까지 감옥에 갈 우려가 있다는 점. 당시만 해도 포스트는 지역신문으로 그램은 맥나마라와 친구요 신문도 정부의 비위를 건드리는 일은 삼갔을 때다.
그래서 사장과 편집국장을 비롯해 주식공개 후의 대주주들 간에 문서 보도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포스트가 문서를 취득하는 과정과 보도를 놓고 관계자들 간에 벌어지는 논쟁이 스릴이 있고 긴장감 가득하다. 특히 이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논의하는 두 사람이 그램과 브래들리. 브래들리는 보도를 주장하나 남편이 자살하면서 엉겁결에 사장이 된 그램은 회사의 존폐가 달린 이 문제를 놓고 결정을 쉽게 못 내린다. 그러나 최종 결정은 그램의 손에 달렸다. 그램이 과감하게 보도를 결정하면서 1950년대 초부터 마련된 베트남전의 미 정부 정책이 폭로되는데 존슨과 닉슨 등은 국민에게 이 전쟁의 현지 정책을 비롯해 전쟁의 승리 가능성에 대해서도 완전히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로 인해 베트남전이 보다 빨리  끝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됐고 포스트는 지역신문의 틀을 벗게 되며 그램은 신문을 경영할 정식 자격을 얻는 셈이 된다. 영화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시초를 보여주면서 끝난다. 행스와 스트립이 차분하고 중후한 연기를 하는데 특히 스트립의 연기가 좋다. ‘대통령의 사람들’에서 브래들리 역은 제이슨 로바즈가 맡아 오스카 조연상을 탔는데 그의 연기가 행스의 그 것보다는 위엄과 무게가 있다. PG-13. Fox.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다운사이징(Downsizing)


폴과 오드리(왼쪽)가 축소인간과 만나고 있다.

축소인간 마을에서의 삶과 로맨스 유머 넘쳐


상냥하고 인간적이요 가슴을 파고드는 영화를 잘 만드는 재주꾼 알렉산더 페인(‘사이드웨이즈’ ‘네브라스카’)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공상과학 풍자영화이자 감상적인 인간 코미디다. 날카로운 풍자와 뒤늦게 억지 춘향 식으로 로맨스를 섞는 바람에 영화가 끝에 가서 맥이 빠지면서 지나치게 감상적이 되지만 위트와 유머를 갖춘 재미있고 또 의미도 갖춘 작품이다. 특히 작품 구조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얘기가 어디로 갈지 알쏭달쏭하게 만들었다.         
노르웨이 박사가 인간을 손가락만 하게 축소시키는 기술을 발명해 노르웨이에 자원해 축소된 사람들로 구성된 마을을 만든다. 지구 환경은 갈수록 악화되고 천연자원은 고갈되고 인구분포는 과밀해지며 경제상황은 하향 길로 접어드는 세상에 모든 것이 현재의 극히 적은 부분만으로도 살 수 있는 복지세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로부터 10년 후. 네브라스카 주 오마하에서 소비성향이 강한 아내 오드리(크리스튼 윅)와 사는 육류가공업체 직장건강 담당자인 보통 사람 폴(맷 데이먼)은 장래가 안 보이는 현실을 피해 보다 나은 삶을 찾아 아내와 함께 몸을 축소해 작은 사람들의 부촌인 리저랜드에서 살기로 한다. 비용은 전 재산을 팔아 마련한다. 그런데 뒤 늦게 오드리가 오리발을 내미는 바람에 폴은 혼자서 리저랜드에 도착한다. 
과거에 들던 비용의 극히 적은 부분만으로도 대궐 같은 저택에 골프나 치면서 살면 되니 이야말로 지상천국이다. 폴의 위층에 사는 유럽인 밀수꾼 두산으로 크리스토프 월츠가 나와 야단스럽게 재미있는 연기를 한다. 폴은 두산의 집에서 베트남에서 미국으로 밀입국한 한 쪽 다리가 의족인 여자 청소부 곡 란(홍 차우-골든 글로브 조연상 후보)을 만난다. 란은 직선적이요 생활력이 강하다. 
그리고 폴은 자기들이 사는 지역 울타리 밖에 란 등 빈민들이 사는 동네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폴은 가난하고 병약한 사람들을 돕는 천사와도 같은 란을 따라다니면서 자기보다 불행한 사람들의 삶을 깨닫게 되고 아울러 란을 사랑하게 된다. 이어 폴과 란은 두산의 도움을 받아 노르웨이의 축소인간들이 사는 피요르드 인근 마을을 찾아 항해를 한다. 
잘 나가던 영화가 폴과 란의 걸맞지 않는 로맨스와 마지막 노르웨이 마을에서의 장시간 이어지는 과다한 감상적 부분으로 인해 용두사미 식이 되고 말았는데 내용이 좀 훈계조다. 보통 사람 역을 잘 하는 데이먼과 차우의 연기가 일품이다. 여러 분도 다운사이징 하시렵니까. R. 상영시간 2시간 15분은 좀 길다. Paramount. ★★★1/2★★★1/2(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에셀과 어네스트(Ethel & Ernest)


레이몬드를 안고 신문을 읽는 어네스트 앞에서 에셀이 차를 따르고 있다.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부모님의 사랑에 바치는 헌시


영국의 유명 작가요 미술가인 레이몬드 브릭스가 40여년을 서로 극진히 사랑하며 살았던 부모 어네스트와 에셀을 그리워하며 삽화와 함께 쓴 책을 바탕으로 만든 만화영화로 참으로 감동적이요 아름답고 수수하다. 
보통 사람들인 어네스트(짐 브로드벤트 음성)와 에셀(브렌다 블레딘 음성)간의 부부애와 함께 이들의 눈으로 본 파란만장한 역사를 솔직하고 담백하며 또 조용히 얘기한 작품이다. 손으로 그린 그림이 부드럽고 살아 숨 쉬는데 두 베테런 배우 브로드벤트와 블레딘의 음성 연기가 두 부부를 생명감으로 넘쳐흐르게 한다. 
1928년부터 시작해 에셀과 어네스트가 사망한 1970년대 초까지 둘의 결혼과 외아들 레이몬드의 출생과 함께 히틀러의 득세와 나치의 런던 공습 그리고 전후 복지국가 건설 등 국내외 역사적 사건들을 질서정연하고 재미있게 서술했다. 
젊은 어네스트는 매일 아침 자전거를 타고 하녀 에셀이 일하는 집 앞을 지나가면서 에셀에게 인사를 보낸다. 그리고 어네스트는 어느 날 느닷없이 꽃을 들고 에셀을 찾아와 데이트를 신청한다. 둘 다 친절하고 겸손한 사람들로 곧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어네스트 보다 5세 연상인 에셀은 이 때 이미 30세가 넘었다. 
런던 남부 교외에 집을 마련한 둘은 처음으로 소유하는 집이 좋아 어쩔 줄을 모른다. 어네스트는 우유배달부로 취직하고 에셀은 가사를 돌보는데 이어 아들 레이몬드를 낳는다. 의사는 산모의 건강 문제로 더 이상의 출산을 금한다. 어네스트는 우유배달을 자랑스럽게 평생 직업으로 삼는다. 
다른 부부와 마찬가지로 둘도 기쁨과 갈등 그리고 실망과 작은 분쟁을 겪는데 어네스트는 보수파이고 에셀은 진보파라서 종종 정치 다툼을 벌인다. 그러나 둘은 모든 분쟁을 가득한 사랑으로 치유한다. 이어 전쟁이 나고 어네스트와 에셀이 나치의 공습으로 인한 피해에 시달리면서 당시의 참상이 자세히 묘사된다.  
레이몬드(루크 트레다웨이 음성)는 1960년대 히피가 되고 장발을 해 에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빗으로 머리 빗기를 거절한다. 그러나 어네스트와 에셀은 이런 모든 작고 큰 문제들을 인내와 예지로 극복한다. 그리고 에셀이 알츠하이머에 걸려 기억력과 건강이 쇠약해지면서 병상에 눕는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에셀의 가족과 함께 슬픔에 젖게 된다. 잔잔한 감동과 기쁨과 만족감을 느끼게 만드는 고상하고 품위 있는 영화다.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리저 시커(The Leisure Seeker)


존(왼쪽)과 엘라가 캠퍼를 몰고 가다 쉬면서 환담하고 있다.

암 걸린 아내와 치매 남편의 마지막 황금여행


암에 걸린 아내와 치매를 앓는 남편의 생애 마지막 황금여행 로드 무비로 ‘노인의, 노인에 의한 그리고 노인을 위한’ 영화다. 내용 탓에 매우 감상적이지만 나이 먹은 사람들은 충분히 즐길만한 희극적 비극이다. 
이런 얘기는 새로운 것은 아니나 두 베테런 배우 헬렌 미렌과 도널드 서덜랜드의 잘 어울리는 조화와 함께 노련한 연기 탓에 묵은 포도주를 맛보는 것 같다. 
이탈리아 감독 파올로 비르지의 연출 솜씨가 능숙하고 효과적인데 올 해 나온 로버트 레드포드와 제인 폰다의 노인들의 고독과 다가오는 죽음을 그린 ‘밤의 우리들의 영혼’(Our Souls at Night)을 연상케 한다. 
매사추세츠 주의 한적한 마을 웰슬리에 사는 노부부 엘라(미렌)와 존(서덜랜드) 스펜서는 어느 날 집에 있는 오래된 캠퍼 ‘리저 시커’를 몰고 플로리다 주의 키웨스트에 있는 헤밍웨이 집을 방문하기 위해 남부로 대장정을 떠난다. 거기 가는 이유는 존이 은퇴한 20세기 영문학 교수이기 때문. 부모가 사라진 것을 뒤늦게 발견한 스펜서네 중년의 자식들은 불난리가 났다. 
급할 것 없으니 존은 시속 50마일로 서행하면서 아내와 함께 사운드트랙으로 밥 딜란과 재니스 조플린의 노래를 즐긴다. 엘렌은 남부 출신으로 상냥하고 쾌활하며 씩씩한 여자이고 존은 학자다운 젠틀맨으로 가사의 주도권은 엘렌이 쥐고 있다. 둘은 서로를 극진히 사랑하는데 이번 여행도 엘렌이 제안했다.
때는 대통령 선거를 위한 유세가 한창일 때로 둘은 여행을 하면서 온갖 경험과 사건과 함께 해프닝을 겪는다. 가다가 건달들을 만나자 엘렌은 갖고 온 총으로 이들을 물리치는데 존은 학자답게 이들에게 “야간대학에 가서 공부해 새 삶을 살라”고 충고한다. 그리고 존은 식당에 들를 때마다 웨이트리스에게 문학 강의를 한다. 그런데 이들은 왜 총을 갖고 왔을까.
둘이 사랑하긴 하지만 역시 부부인지라 다투기도 하고 또 자신들의 사랑에 대해 의심도 하며 그 동안 감추어 놓았던 비밀이 밝혀지기도 한다. 그러나 늘 둘은 자신들의 서로에 대한 사랑을 재발견한다. 끝에 가서 눈시울이 붉어지고 가슴이 뭉클해진다. 
미렌(72)과 서덜랜드(82)는 둘 다 베테런이어서 연기를 아주 쉽고 편안하게 잘 하는데 특히 미렌의 연기가 훌륭하다. 서덜랜드는 2017년도 아카데미 ‘거버너스 어워드’ 수상자로 선정됐고 미렌은 지난 11일에 2017년도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뮤지컬/코미디 부문) 후보로 선정됐다. 오스카 수상 후보에 오르는 자격 조건을 위해 21일까지 일부극장에서 상영된 뒤 극장서 철수했다가 2018년 1월에 본격적으로 개봉된다. ★★★(5개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나의 2017년 베스트 텐


할리웃의 메이저들이 어른들을 위한 진지한 영화들을 만들기를 꺼려하는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메이저들은 올 해도 신선한 아이디어 대신 그들의 주요 상품인 속편과 조야한 코미디 그리고 만화의 수퍼 히로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을 양산했다. 내가 메이저영화들 보다 외국어영화를 더 좋아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통계에 의하면 올 한 해 미국과 캐나다의 극장들이 판 총 입장권의 수가 지난 22년 만에 최저를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어른들이 참신함이 없는 구태의연한 메이저영화에 식상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가운데 한국계 영화인들이 만들고 주연한 소품 ‘콜럼버스’(Columbus)가 비평가들의 격찬을 받은 것은 괄목할만한 일이다. 한국계 미국인 코고나다가 감독하고 역시 한국계인 존 조가 주연한 영화는 현대건축으로 유명한 인디애나주 콜럼버스를 방문한 한국인 청년과 마을 도서관에서 일하는 젊은 미국여자가 마을 건물을 둘러보면서 대화와 감정을 나누는 아름다운 드라마다. 이와 함께 봉준호가 감독한 강원도 산골 소녀와 유전자 조작으로 만든 돼지가 주인공인 ‘옥자’(Okja)도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영화의 질이 날로 좋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올 해도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 후보로 내놓은 ‘택시 운전사’는 후보로 오르는데 실패했다
나의 올 해 베스트 텐을 탑 원을 제외하고 알파벳순으로 적는다.
넘버 1은 마틴 맥도나가 감독한 ‘미주리주 에빙 밖의 3개의 광고’(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사진)다. 강간 살해된 딸로 인해 분노와 슬픔에 젖은 어머니(프랜시스 맥도만드)가 마을 입구 3개의 광고판에 범인을 못 잡는 경찰서장을 질타하는 내용을 쓰면서 일어나는 이 어머니와 경찰서장 등 마을 사람들 간의 후유증을 그린 강력한 드라마다.
*‘빅 식’(The Big Sick)-파키스탄계 미국인 코미디언과 백인 여인간의 인종과 문화 차이를 너머선 러브 스토리로 실화의 주인공인 쿠마일 난지아니 주연.
*‘네 이름으로 날 불러다오’(Call Me by Your Name)-한 여름 이탈리아의 고대문화 전문 교수 집을 방문한 미국인 대학원 인턴(아미 해머)과 교수의 17세난 아들(티모데 샬라메) 간의 동성애 사랑. 이탈리아인 루카 과다니뇨 감독.
*‘다키스트 아우어‘(Darkest Hour)-2차대전 발발과 거의 동시에 영국 수상으로 선출된 윈스턴 처칠(게리 올드맨)의 대 나치 결사항전 의지를 웅변적으로 담았다.
*‘디트로이트’(Detroit)-1967년 디트로이트에서 일어난 흑인폭동을 기록영화 식으로 다룬 긴장감 가득한 인종차별에 관한 드라마. 여류 캐스린 비글로 감독.
*‘디재스터 아티스트’(The Disaster Artist)-할리웃 사상 최악의 영화로 낙인이 찍힌 ‘룸’(The Room)을 자비를 들여 제작하고 감독하고 주연도 한 타미 와이조의 영화 제작과정을 그린 포복절도할 코미디. 제임스 프랭코가 제작^감독^주연하고 각본도 썼다.     
*‘레이디 버드’(Lady Bird)-가족과 사는 동네를 떠나 자유롭게 날아가고파 안달이 난 새크라멘토의 여고 3년생(서샤 로난)의 사실적이요 상큼한 드라마. 30대 초반의 여배우 그레타 거윅의 감독 데뷔작.
*‘포스트’(The Post)-1971년 미 국방부의 베트남전 비밀문서 보도 여부를 둘러싸고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국장 벤 브래들리(탐 행스)와 여사장 캐사린 그램(메릴 스트립)이 치열한 논쟁을 벌인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물의 모양’(The Shape of Water)-미 정부기관의 비밀실험소의 실험대상인 물고기인간과 실험소 여청소부(샐리 호킨스)간의 환상적인 러브 스토리. 멕시칸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작품.
외국어영화 베스트 텐은 다음과 같다(알파벳 순).
*‘아 치암브라’(A Ciambra-이탈리아)-이탈리아 칼라브리아 지역의 루마니아 커뮤니티에 사는 14세 소년의 눈으로 본 인종 관계와 성장기. *태풍 후‘(After the Storm^일본)-흥신소 직원이 어린 아들의 양육비 마련과 함께 전처와의 재결합을 위해 고군분투 한다. *‘BPM’(프랑스)-1990년대 초 파리의 동성애자들의 정부의 AIDS 대책 촉구와 사랑과 우정. *‘끝없는 시’(Endless Poetry^칠레)-칠레의 초현실적 영화인 알레한드로 조도로우스키의 젊은 시절 자화상. *‘팬태스틱 우먼’(A Fantastic Woman^칠레)-밤에 나이트클럽 가수로 일하는 여성으로 성전환한 웨이트리스가 연상의 애인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아 삶의 새 전기를 맞는다. *‘펠리시테’(Felicite^세네갈)-골목 카페의 여가수가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하자 치료비를 마련하려고 동분서주한다. *‘폭스트롯’(Foxtrot^이스라엘)-이스라엘 변경의 초소에서 근무하다 사망한 아들로 인해 고뇌와 갈등에 시달리는 부모. *‘아이스 마더’(Ice Mother^체코)-겨울 강물 수영대회에서 만난 노년의 남녀가 사랑에 빠진다. *‘모욕’(The Insult^레바논)-기독교신자인 레바논인과 팔레스타인 난민이 모욕적인 언사를 이유로 소송을 하면서 매스컴을 탄다. *‘육과 영’(On Body and Soul^헝가리)-도살장에서 일하는 두 남녀가 같은 꿈을 꾼다는 것을 알고 꿈을 현실화하기로 한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LAFCA의 2017 베스트


필자가 속한 LA영화비평가협회(LAFCA)는 지난 3일 2017년도 최우수 영화로 사랑의 이야기 ‘네 이름으로 날 불러다오’(Call Me by Your Name)를 선정했다. 이 영화는 이탈리아의 뜨거운 여름을 배경으로 24세의 미 대학원 인턴(아미 해머)과 그가 묵은 대학교수 집의 17세난 아들간의 사랑과 이 사랑을 통한 소년의 성장을 그린 드라마다.
지적이요 감정적으로 아름답고 정열적인 작품으로 17세 소년 역의 티모데 샬라메(사진 오른 쪽)가 최우수 주연남우로 뽑혔다. 이 영화는 이 밖에도 감독 루카 과다니노가 최우수 감독으로 선정돼 3관왕이 됐다.
최우수 작품의 차점작은 플로리다 주 올랜도의 디즈니월드 인근에 있는 싸구려 모텔의 불우한 투숙객들과 이 모텔의 이해심 깊은 매니저의 관계를 그린 ‘플로리다 프로젝’(The Florida Project)이었다. 최우수 주연남우의 차점자는 코미디 ‘디재스터 아티스트’(The Disaster Artist)에서 사상 최악의 영화로 평가받은 ‘룸’(The Room·2003)을 제작·감독하고 또 각본을 쓰고 주연까지 한 실제 인물 타미 와이조로 나온 제임스 프랭코.
LAFCA에 의해 이 날 3관왕이 된 또 다른 영화는 역시 사랑의 이야기인 ‘물의 모양’(The Shape of Water). 미 정부의 비밀연구소의 실험 대상인 양서류 괴물과 연구소의 말 못하는 여자 청소부간의 사랑을 그린 어른을 위한 환상적인 동화다. 청소부로 나온 샐리 호킨스가 이날 최우수 주연여우로 뽑혔고 영화를 연출한 멕시코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가 과다니노와 함께 최우수 감독으로 선정됐다. 이와 함께 이 영화는 최우수 촬영 작품으로 뽑혔다. 이 부문 차점작은 ‘블레이드 러너 2049’(Blade Runner 2049).
한편 최우수 주연여우의 차점자는 ‘미주리 주, 에빙 밖의 3개의 광고판’(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에서 강간 살해된 딸로 인해 분노와 슬픔에 떠는 어머니로 나온 프랜시스 맥도만드.
최우수 조연남우로는 ‘플로리다 프로젝’의 매니저로 나온 윌렘 다포가 선정됐다. 이 부문 차점자는 ‘3개의 광고판’에서 인종차별 주의자 경찰 역을 한 샘 락웰이었다. 최우수 조연여우로는  ‘레이디 버드’(Lady Bird)에서 자유를 찾아 훨훨 날아가려는 고3 딸을 현실에 정착시키려고 애 쓰는 어머니로 나온 로리 메트캐프가 뽑혔다. 차점자는 전후 미 남부 농촌의 흑백 문제를 다룬 ‘머드바운드’(Mudbound)의 메리 J. 블라이지.
최우수 각본상은 공포물 ‘겟 아웃’(Get Out)을 쓴 조단 필(감독 겸)에게 돌아갔다. 이 영화는 부유한 백인 애인의 부모를 방문한 흑인 청년이 겪는 해괴망측한 경험을 다룬 스릴러이자 흑백문제에 관한 드라마다. 차점작은 ‘3개의 광고판’.         
최우수 만화영화로는 소품 ‘브레드위너’(The Breadwinner)를 뽑았다. 탈리반이 지배하던 아프가니스탄의 소녀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소년으로 위장하고 거리에 나가 장사를 하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디즈니와 픽사가 만든 멕시코의 ‘죽은 자를 위한 날’을 주제로 한 대작 ‘코코’(Coco)를 제치고 베스트로 선정됐다.
LAFCA는 감독상 외에 외국어영화 부문에서도 2개의 영화 ‘BPM’과 ‘러브리스’(Loveless)를 함께 베스트로 뽑았다. 프랑스영화 ‘BPM’은 1990년대 파리의 동성애자들의 AIDS 퇴치 투쟁과 우정과 사랑을 그린 강렬한 드라마다. 러시아영화 ‘러브리스’는 관계에 회복할 수 없는 균열이 생긴 부부의 12세난 아들이 실종되면서 두 사람의 삶에 드리워진 지워지지 않는 후유증을 다룬 심각한 드라마.                   
뉴 제너레이션 부문 수상자로는 ‘레이디 버드’를 쓰고 감독한 배우 그레타 거윅이 선정됐다. 최우수 기록영화로는 프랑스의 베테런 여류감독 아녜스 바르다와 사진작가 J.R.이 공동으로 만든 일종의 로드 무비 ‘얼굴들 장소들’(Faces Places)을 뽑았다. 차점작은 침팬지 연구가 제인 구달에 관한 ‘제인’(Jane).
최우수 음악 작품으로는 폴 토마스 앤더슨이 감독하고 대니얼 데이-루이스가 1950년대 런던의 고급 패션 디자이너로 나온 ‘팬텀 스레드’(Phantom Thread-조니 그린우드 작곡)가 선정됐다. 차점작은 알렉상드르 데스플라가 작곡한 ‘물의 모양’.
편집 부문 최우수작은 2차대전시 던커크 철수작전을 그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던커크’(Dunkirk). 차점작은 미 피겨 스케이터 토냐 하딩의 라이벌 낸시 케리간에 대한 폭행 사건을 다룬 ‘아이, 토냐’(I, Tonya). 최우수 프로덕션 디자인 수상작으로는 ‘블레이드 러너 2049’이 선정됐다. 차점작은 ‘물의 모양’이다.
한편 생애업적상 수상자로는 ‘제7의 봉인’(The Seventh Seal), ‘겨울 빛’(Winter Light) 및 ‘치욕’(Shame)등 잉그마르 베리만의 여러 작품과 함께 ‘엑소시스트’(The Exorcist)에서 노 신부로 나온 스웨덴의 베테런 막스 본 시도를 선정했다. 제43회 LAFCA 시상만찬은 2018년 1월 13일 센추리시티의 인터칸티넨탈 호텔에서 열린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7년 12월 14일 목요일

‘물의 모양’(The Shape of Water)


엘리사와 물탱크 안의 괴물이 서로를 응시하고 있다.


괴물과 인간의 소통 ‘어른용 동화’


아름답고 감정적인 공포영화를 장인의 솜씨로 만들어내는 멕시코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공동 각본)의 상상력 넘치는 어두운 기운을 지닌 상냥한 로맨틱 동화로 올 베니스 영화제 대상 수상작이다. 영혼이 깃든 ‘미녀와 야수’의 얘기로 괴물과 인간 여자의 상호 이해와 감정 이입 그리고 정신적 육체적 사랑을 유머를 섞어 시각적으로 또 감정적으로 황홀하게 그려낸 환상영화로 서스펜스 스릴러 분위기마저 지녔다.
연기와 초록과 푸른 색 위주의 촬영과 프로덕션 디자인을 비롯해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고운 멜로디가 있는 음악까지 모든 것이 준수한 작품으로 옛 할리웃과 미국 팝문화에 대한 헌사까지 겸하고 있다. 감독은 영화에서 미국의 옛 스탠다드 노래들과 빅밴드음악을 비롯해 할리웃의 옛 뮤지컬과 성경영화 등을 찬미하고 있다. 특히 이 영화는 할리웃이 만든 ‘검은 초호의 괴물’(Creature from the Black Lagoon·1945)을 연상케 한다. 
어른들을 위한 환상적인 동화이면서 아울러 자기와 다른 것에 대한 관용을 호소하고 있는 영화는 볼티모어의 극장 위에 달린 아파트에 사는 직장에서 쫓겨난 게이 화가 가일즈(리처드 젠킨스)의 옛날 얘기를 들려주는 식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수중에 잠긴 채 가구들이 유영하는 아파트를 그린 첫 장면부터 신비롭게 아름답다. 
때는 미·소간 냉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 초. 가일즈의 유일한 친구는 이웃 아파트에 사는 정부소속 우주항공기관의 야근 청소부 엘리사(샐리 호킨스)로 고독하나 밝고 생활력 강한 엘리사는 말을 못한다. 엘리사 대신 말이 많은 것이 그의 청소부 친구 젤다(옥타비아 스펜서). 
엘리사가 아마존 수로에서 건져내 이 비밀 연구소에서 실험대상으로 쓰는 지느러미가 달린 괴물(덕 존스)과 의사와 감정을 소통하면서 인간과 괴물의 아름다운 관계가 무르익는다. 자기를 무서워하지 않고 매료돼 호기심과 자비심으로 접근하는 엘리사와 그에게 자신의 혼과 감정으로 호응하는 괴물간의 관계가 마치 풋풋한 첫사랑처럼 곱다. 괴물의 아름다운 내면 탓에 그를 괴물이라고 부르기가 석연치 않다. 
연구소는 괴물의 폐 구조를 우주경쟁을 위해 사용하려고 연구하고 있는데 그 일을 담당한 과학자가 비밀을 지닌 로버트 호프스테틀러 박사(마이클 스툴바그)이고 괴물 관리의 총책임자는 잔인하고 고약한 정부관리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논). 스트릭랜드는 전기충격봉으로 괴물을 못 살게 굴다가 괴물에 의해 손가락을 물린다.  
괴물이 고통하는 것을 보다 못해 엘리사는 괴물을 연구소로부터 빼내기로 하고 가일즈와 젤다의 도움을 받아 괴물을 빼내 자기 아파트 욕조에 감춘다. 그리고 물로 가득 채운 배스룸에서 괴물과 엘리사간의 정열적이요 아름다운 정사가 벌어진다. 이어 스트릭랜드가 괴물을 찾아 수색에 나서고 엘리사가 괴물을 데리고 강가로 도주하면서 서스펜스가 영근다. 
표현력 풍부한 괴물 역의 존스를 비롯해 조연진의 연기가 출중한데 무엇보다 뛰어나게 아름다운 것은 호킨스의 연기. 진지하고 민감하며 또 섬세하면서도 폭이 넓은 연기다. 
LA영화비평가협회(LAFCA)에 의해 올 해 최우수 감독상(공동)과 촬영상 및 여우주연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R등급. Fox Searchlight.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아이, 토냐’(I, Tonya)

하딩이 심판에게 스케이트에 이상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피겨 스케이팅 '이단아' 하딩의 성장과 파멸 다큐 형식으로 담아


미 스포츠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사건인 미 챔피언 피겨 스케이터 토냐 하딩의 라이벌 낸시 케리간에 대한 폭행을 다룬 재미 만점의 드라마이자 블랙 코미디다. 감독 크레이그 길레스피는 하딩의 불우한 어린 시절로부터 시작해 그의 스케이팅 재능을 발견한 어머니에 의한 맹훈련과 첫사랑과 결혼 그리고 챔피언쉽 획득에 이어 케리간에 대한 폭력행사로 인한 불명예 은퇴를 주연과 여러 명의 조연배우들을 동원해 마치 기록영화 찍듯이 만들었다.
배우들이 가끔가다 카메라를 향해 얘기해 기록영화 스타일과 분위기가 더 짙은데 하딩의 불같은 성질과 스케이팅의 유연한 동작을 포착한 카메라가 처음부터 끝까지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화면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주연인 마고 로비의 연기와 함께 조연진의 각기 개성 있는 연기가 볼만한 야하고 싱싱한 영화다.
하딩은 식당 웨이트리스로 골초에 폭력적이요 상소리를 밥 먹듯이 내뱉는 어머니 라보나 고든(앨리슨 재니가 무식한 여자의 연기를 겁나게 해낸다)에 의해 어릴 때부터 스케이팅 링에 선다. 딸의 재능을 안 라보나는 폭군이지만 딸을 챔피언으로 만들기 위해 고생해 번 돈을 아끼지 않고 딸의 훈련비로 쓴다. 하딩의 재능을 발견한 또 다른 사람이 코치 다이앤 롤린슨(줄리앤 니콜슨). 다이앤은 하딩이 자라서도 그의 뒷받침을 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하딩의 10대 시절과 스케이팅 훈련 그리고 하딩과 날건달 제프 길룰리(세바스찬 스탠)와의 사랑과 결혼으로 꾸며진다. 그런데 제프는 하딩을 사랑하면서도 툭하면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아내의 유명세를 마음껏 누린다. 하딩은 불우한 성장과 남자 선택이 서툰 여자로 멸시 받고 두들겨 맞으면서도 의지와 재능으로 이를 극복하고 짧은 영광을 누렸던 어떻게 보면 불쌍한 여자다.
하딩이 유명해진 것은 1991년 미 챔피언쉽 경기에서 공중 3회전을 하면서인데 그 당시로서 이 기록은 미 여자 피겨스케이팅 사상 최초의 쾌거였다. 하딩은 성질이 고약할 정도로 불같아 심판들이 점수를 박하게 주면 상소리를 거침없이 내뱉는다. 단정하고 발레리나 같은 챔피언을 바라는 피겨스케이팅 세계에서 하딩은 미운 오리 새끼였다. 그리고 하딩은 올림픽에 출전한다.
라보나와 제프 및 다이앤 외에 중요한 조연은 하딩의 얼빠진 바디 가드 션 에카르트(폴 월터 하우저). 하딩의 라이벌 케리간에 대한 폭행은 1994년 1월 디트로이트에서 발생했는데 릴리해머에서 열릴 동계올림픽을 위한 연습 때. 하딩과 이혼한 제프가 고용한 스탠트가 케리간의 허벅지를 가격해 전 세계적인 화제가 됐는데 케리간은 부상이 회복돼 올림픽에 출전, 은메달을 탔고 하딩은 8위에 그쳤다.
하딩은 후에 케리간에 대한 폭력을 사전에 인지했다는 이유로 피겨 스키이팅계에서 쫓겨났다. 재니의 연기와 함께 볼만한 것은 로비의 연기다. 짙은 화장에 야한 싸구려 스케이팅 의상을 입고 역이 재미있다는 듯이 신이 나서 날뛰다시피 한다. 재니의 연기와 함께 상감이다. R. ★★★★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7년 12월 1일 금요일

‘원더 윌’ (Wonder Wheel)


지니(가운데)의 소개로 미키(왼쪽)와 캐롤라이나가 악수를 하고 있다.

연하 애인 향한 욕망·질투… 케이트 윈슬렛  불꽃 연기


재잘대는 우디 알렌의 영화치곤 마이너급에 속하지만 뒤늦게 찾은 연하의 애인에 대한 애정과 욕정과 질투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주인공 지니 역의 케이트 윈슬렛의 화끈한 연기가 볼만한 멜로드라마다. 
그 밖에도 조연진의 좋은 연기와 알록달록하고 빛과 어두움을 잘 조화시킨 촬영(알렌의 단골 촬영감독 비토리오 스토라로)과 1950년대를 보여주는 프로덕션 디자인(알렌의 단골 프로덕션 디자이너 산토 로콰스토) 등이 훌륭한 비극적 종말의 어두운 코미디 드라마다.
지니가 한물 간 왕년의 영화배우로서 자기가 했던 역을 재현하며 망상이나 다름없는 꿈에 시달리다 못해 거의 광기 같은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이 마치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의 블랜치 역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근육질에 상스러운 지니 남편 험프티도 코왈스키를 연상케 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주인공 코왈스키네 집처럼 이 영화도 서민층의 드라마다. 
영화는 알렌이 선배 연극인에게 바치는 헌사라고도 하겠다. 연극 같은 분위기가 나는 작품이다. 그의 자의식이 큰 몫을 차지한 영화로 브루클린 출신의 알렌이 1950년대와 브루클린과 코니 아일랜드를 그리워하며 만든 영화이기도 하다.  
코니 아일랜드의 라이프 가드 미키(저스틴 팀벌레이크)가 관객을 향해 자기소개를 하면서 시작된다. 한 여름 인파로 복작대는 코니 아일랜드 저편으로 거대한 페리스 윌이 보인다. 페리스 윌은 영화에 나오는 미몽에 매어달리는 인물들의 돌아가는 운명을 상징한다고 봐도 좋다. 
그리니치 빌리지에 사는 미키는 뉴욕대학원생인 작가 지망생으로 빤질빤질하게 생긴 언변 좋은 난봉꾼. 해변에서 미키를 만난 지니가 남자에게 반하면서 비극의 씨앗이 뿌려진다. 지니는 해변 대합조개 술집 웨이트리스로 과거 알코올 중독자였던 카루셀 오퍼레이터 험프티(짐 벨루시가 무지막지한 연기를 잘 한다)와 어린 아들 리치(잭 고어)와 함께 코니 아일랜드에 있는 집에서 산다. 그런데 방화광인 리치는 지니와 재즈 드러머였던 전 남편 사이에서 본 아들이다. 지니의 이혼 이유는 지니가 바람을 피웠기 때문. 
사랑도 장래도 없는 삶에 지칠 대로 지쳐 심한 만성 두통에 시달리는 지니는 미키에게 집요하게 매달리는데 미키는 이런 지니와 보드워크 아래 등지에서 뜨거운 정사를 나누면서 함께 보라 보라로 도망가자고 헛소리를 한다. 그러나 지니에겐 이 말이 진실로 들린다. 
그런데 지니 집에 5년 전에 갱스터에게 반해 가출한 험프티의 딸 캐롤라이나(주노 템플)가 돌아오면서 지니와 캐롤라이나가 미키를 놓고 삼각관계를 이루게 된다. 지니가 미키에게 캐롤라이나를 소개하면서 두 젊은 남녀가 사랑에 빠진 것. 그러나 지니와 미키의 관계를 모르는 캐롤라이나는 지니에게 미키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자문을 구하는데 미키를 놓지 않으려고 혈안이 된 지니가 캐롤라이나를 제거할 계획을 꾸미면서 영화 마지막 부분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자기를 극진히 사랑하는 아버지의 권유로 야간대학에 들어간 캐롤라이나가 남편을 버리고 도망 온 이유는 남편과의 사이가 멀어진 캐롤라이나가 갱의 비리를 FBI에 고자질했기 때문. 그래서 갱스터들이 캐롤라이나를 찾아 코니 아일랜드에 온다. R. ★★★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희망의 건너편’(The Other Side of Hope)


발데마르(앉은 사람 중 오른쪽)가 할레드에게 수프를 대접하고 있다. 뒤는 종업원들.


난민 소재 인간성·유머 조화 미니멀리즘의 극치


시치미 뚝 뗀 바싹 마른 블랙 코미디의 장인 핀란드의 아키 카리우스마키의 인간성 가득하고 배꼽 빠지게끔 우스운 영화로 연기와 표정과 세트를 비롯해 대사에 이르기까지 미니멀리즘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감독은 현재 유럽의 큰 문제 중의 하나인 난민 문제를 진지하면서도 냉소적으로 해부하면서 아울러 드라이 아이스처럼 건조한 유머를 섞어 정치와 인간관계 코미디를 잘 조화시킨 재미 만점의 작품을 내놓았다. 
헬싱키의 우중충한 공업지대 항구에 도착한 석탄화물선에서 밀항자 시리아 난민 할레드(셰르완 하지)가 내린다. 그는 곧바로 경찰서에 찾아가 망명신청을 한다. 중년의 셔츠세일즈맨 발데마르 비크스트룀(사카리 쿠스마넨)은 알코올 중독자인 아내를 버리고 가출한 뒤 재고를 청산한 돈으로 거액의 불법 도박판에 가서 엄청난 돈을 딴다. 그리고 이 돈으로 망해가는 식당을 사고 거기에 딸린 세 명의 종업원도 고용한다. 
영화의 중심 내용은 할레드와 발데마르라는 생면부지의 두 사람이 만나 핀란드의 난민정책을 둘러싼 관료주의의 맹점을 짓궂게 폭로하면서 아울러 식당의 장사와 종업원들의 모습을 비롯해 식당에 관한 얘기를 킬킬대고 웃게끔 묘사하고 있다.
할레드는 망명신청이 거부되자 수용소를 탈출했다가 발데마르를 만나게 되는데 겉으로는 무뚝뚝하나 마음은 인자한 발데마르에 의해 식당 종업원으로 고용된다. 발데마르가 할레드를 보는 눈길이 하필이면 왜 핀란드 같이 못 사는 곳에 왔느냐고 힐난하는 것 같다. 
할레드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인 깡패들로부터 얻어터지기도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피난길에 잃어버린 여동생을 찾아 핀란드에 데려오려고 모든 고생을 참는다. 이를 기꺼이 돕는 사람이 발데마르와 수용소의 여직원. 감독은 인간의 선한 마음을 요란 떨지 않고 아름답게 드러내 보여준다. 
기 차게 우스운 것은 전통 핀란드 식당 영업이 부진하자 종업원들이 모두 일본식 복장을 한 스시집으로 바꾸고 손님을 맞는 장면. 연어가 떨어지자 소금에 절인 통조림 청어로 일본인 단체 관광객을 접대하니 장사가 잘 될 리가 있겠는가. 
할레드와 발데마르와 함께 세 명의 종업원들의 시종일관 표정 없는 연기가 황당무계한 코미디를 확실하게 뒷받침해주고 있다. ★★★★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팻 분


“아일 비 홈 마이 달링/플리즈 웨이트 포 미” 하면서 시작되는 ‘아일 비 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팻 분의 노래다. 약간 비음에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조류가 막 왔다간 뒤의 백사장의 감촉과도 같이 부드러운 음성을 지닌 분은 83세라는 나이답지 않게 젊어 보이고 건강했다. 한창 감수성이 영글어가던 고등학생 때 분의 노래를 들으면서 성장한 내가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깊숙이 들어서 그를 직접 만나(사진) 인터뷰를 하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분을 최근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 사무실에서 만났다. 
분은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한국 여성 팬들의 열광을 회상했다. “한국을 너 댓 차례 방문해 공연했는데 여성 팬들이 무대에서 자기들을 향해 손을 내미는 나를 밑으로 끌어내리려고 했다”면서 “그들의 손힘이 매우 세더라“며 크게 웃었다.
그가 1956년에 불러 빅히트한 ‘아일 비 홈’도 한국과 인연이 있는 노래다. 분은 고향에 남겨두고 온 님을 그리워하는 이 노래가 당시 한국전 후 한국에 주둔했던 미군들과 그들 고국의 가족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 연 4년간 넘버 원 신청곡이었다고 알려 주었다.
젊었을 때 정통 올 아메리칸 보이의 이미지를 지녔던 분은 이런 이미지와 로맨틱한 음성 때문에 1950년대 백인 틴에이저들의 우상으로 사랑을 받았고 생애 총 42곡의 탑 40를 기록하면서 수천만장의 레코드가 팔려나갔다. 분은 이런 단정한 모습과 온순하고 고운 노래들 때문에 당시 골반을 마구 비틀어대며 ‘악마의 노래’인 로큰롤을 부른 엘비스 프레슬리를 혐오하던 틴에이저들의 부모들에게도 큰 인기를 누렸었다.
그런데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자란 분은 역시 테네시의 멤피스에서 활동한 프레슬리와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다. 분은 인터뷰에서도 프레슬리에 대해 자상히 회상하면서 자기가 그보다 탑 40히트곡이 딱 1곡 더 많다고 자랑했다.
분은 나이에 비해 강건할 뿐 아니라 컬럼비아 대를 우등으로 졸업한 사람답게 기억력도 비상했다. 무슨 노래를 몇 년도에 불렀다는 것을 또렷이 기억했다. 분은 이 같은 육체와 정신적 건강의 비결을 “우유를 많아 마시고 운동을 많이 하며 깨끗한 양심을 지는 것”이라고 말했다.자기를 “팻”이라고 부르라고 부탁하는 분은 친절하고 상냥하며 또 이웃집 아저씨처럼 편안했다. 그래서 첫 대면인데도 구면처럼 친근감이 갔다.
분은 수많은 히트 팝 뿐 아니라 가스펠, 록, 컨트리와 리듬 앤 블루스를 비롯해 심지어 헤비 메탈 장르까지 섭렵한 가수다. 그런데 뒤 늦게 시도해 빅히트한 헤비 메탈 앨범을 출반했다가 자기가 출연하던 기독교TV쇼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그러나 분은 랩은 음악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 건 음악이아니라 리듬에 붙인 폭언”이라고.
분은 이 날 자신의 가수로서의 생애 외에도 지난 63년간을 함께 해로한 아내 셜리와 히트곡  ‘유 라이트 업 마이 라이프’를 부른 딸 데비 및 정치와 신앙 등에 관해서도 길고 상세하게 얘기, 인터뷰는 근 2시간이나 진행됐다.
여러 펀의 영화에도 나온 분의 작품 중 잘 알려진 것이 자기가 주제가도 부른 ‘에이프릴 러브’(1957)와 빅히트한 공상과학 모험영화 ‘저니 투 더 센터 오브 디 어스’. 그런데 분은 ‘에이프릴 러브’에서 공연한 셜리 존스와 키스 한 번 못 했다며 크게 웃었다. 감독 헨리 레빈이 마지막 장면을 찍을 때 존스의 입에 키스를 하라고 지시했지만 분은 아내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며 사절했다는 것이다.
분은 당시 22세였는데 그 때부터 그는 매우 도덕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릴린 몬로와 공연할 영화도 그 내용 때문에 거절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분은 ‘에이프릴 러브’ 개봉 40주년 회고전 때야 비로소 무대에 함께 나온 존스의 입에 키스를 했는데 “가볍고 아름다운 키스였다”고 회상했다.
분은 자기가 가수가 되리라곤 생각하지도 못했다. 교사나 목사가 될 줄 알았다는 것. 둘 다 그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직업인데 분은 독실한기독교 신자다. 철저한 보수파 공화당원인 분이 지난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를 “마지못해 지원한” 까닭도 트럼프가 새로운 기독교신자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분은 트럼프 지지운동을 해 트럼프로부터 고맙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분은 통화에서 트럼프에게 “대통령 감답지 못한 짓이니 상대방을 욕하지 말라”고 조언했다고. 분은 이어 “트럼프가 비생산적인 트위팅을 중단하기를 바란다”면서 “그러나 나는 그를 지지하며 그를 위해 기도한다”고 강조했다.             
분의 많은 노래들 중 내가 즐겨 듣던 노래들은 ‘웬 아이 로스트 마이 베이비’ ‘무디 리버’ ‘프렌들리 퍼수에이전’(영화 ‘우정 있는 설복’ 주제가) ‘러브 레터즈 인 더 샌드’ ‘스피디 곤잘레스’ 및 영화 ‘엑소더스’의 주제가. “디스 랜드 이즈 마인”으로 시작되는 ‘엑소더스’의 주제가는 이스라엘의 제2의 국가로 여겨지면서 이스라엘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나는 지난 2005년 세리토스 공연센터에서 분의 공연을 관람했었다. 그 때 분은 71세로 여전히 스위트한  음성이었다. 세월은 가지만 분의 노래들은 내겐 지금도 청춘의 속삭임으로 남아 있다. 이 할러데이 시즌에 분의 크리스마스 캐롤을 들으면 축복 받는 기분이 날 것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7년 11월 28일 화요일

네 이름으로 날 불러다오 (Call Me by Your Name)

17세 난 소년 엘리오(왼쪽)는 연상의 올리버를 사랑하면서 부쩍 성장한다.


뜨거운 태양 아래 정열적이고 애잔한 ‘금지된 사랑’


아름답고 뜨겁다. 태양열에 구은 이탈리아의 시골 마을과 두 젊은이의 드러난 육체와 그 육체가 율동하면서 벌이는 사랑의 행위 그리고 그들의 준수한 미모와 첫 사랑의 희열과 궁극적으로 다가오는 이별까지 모든 것이 아름답고 열정으로 끓는다. 
17세 난 소년이 첫 사랑을 하면서 감정적으로 어른이 되는 성장기이자 인간의 본능과 내성 그리고 상호관계를 매우 지적이요 감성 깊게 그린 작품이다. 뜨거운 여름 한철 정신적 육체적 그리고 감정적으로 깊이 맺어지는 17세 난 소년과 24세 난 대학원 인턴의 동성애를 훤히 들여다 보여주는 식으로 솔직하게 그렸다. 
두 주인공 역의 잘 생기고 신체 늠름한 아미 해머와 버들가지처럼 간들거리는 육체와 거의 소녀같이 곱게 생긴 총명한 모습의 티모데 샬라메의 화학작용이 절묘하다. 감독은 이탈리아의 루카 과다니노(‘아이 앰 러브‘ ’어 비거 스플래쉬‘)로 그는 이 두 사람 간의 정서적 육체적 로맨스를 매우 상세하고 통찰력 있으며 또 부드럽게 화면에 담고 있다. 원작은 앙드레 아시만의 소설로 과다니노와 제임스 아이보리가 공동으로 각색했다.
이탈리아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시골 롬바르디의 고저택에 사는 그레코 로만 조각 전문교수 펄만(마이클 스툴바그)의 집에 미국에서 24세 난 인턴 올리버(31세의 해머가 24세의 인턴 역을 하기엔 좀 늙었다)가 연구차 한 여름 묵기 위해 찾아온다. 펄만은 올리버에게 17세의 갈비씨 책벌레 아들 엘리오의 방을 내주고 엘리오는 자기 방 옆의 창고로 쓰이는 방으로 옮긴다. 
두 방이 바로 붙어 있어서 두 사람은 본의 아니게 서로를 엿보게 된다. 이런 설정부터 봐이에리즘의 선정성을 부추긴다. 처음에 엘리오는 이 잘 생긴 미국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몰라 어정쩡한 태도를 취한다. 올리버도 마찬 가지.
둘은 책과 문화에 대해 얘기하면서 동네 고적과 마을 광장과 들과 해변으로 함께 다니면서 서서히 서먹함을 푸는데 두 사람이 모두 간편한 여름 옷 차림인데다가 때로 짧은 수영복만 입어 육체의 자연미가 광채를 발하면서 둘의 성적 욕망을 자극한다. 이런 감춰진 욕망은 두 사람의 응시와 접촉과 표정 그리고 대화 등을 통해 암시된다. 
둘은 마침내 첫 키스에 이어 정열적인 정사를 나누는데 이 장면이 매우 에로틱하고 아름답다. 한편 올리버는 엘리오를 타락시키지(?) 않겠다는 의도로 관계에 쉼표를 찍으나 엘리오는 기갈 들린 사람처럼 올리버를 계속해 더 원한다. 그 모습이 애처로울 정도다. 그리고 영화사에 길이 남을 엘리오의 복숭아 장면이 나온다. 잘 익은 복숭아가 이토록 에로틱한 효과를 낼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엘리오는 올리버를 사랑함으로써 부쩍 성장하는데 여름이 저물면서 올리버는 미국으로 돌아간다. 침묵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긴 엘리오와 올리버의 이별 장면이 애잔하니 아름답다. 
해머가 파격적인 역을 맡아 진지하면서도 민감하고 정감 있는 연기를 잘 하는데 특별히 볼만한 것은 샬라메의 연기다. 별 말 없이 얼굴 표정과 몸동작으로 첫 사랑에 들뜨고 희열하고 아파하는 연기를 깊고 다양하게 연기한다. 그리고 스툴바그의 연기도 훌륭하다. 이와 함께 자연과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을 광채 나게 찍은 태국 촬영감독 사이욤부 묵데프롬의 촬영도 눈부시다. R등급. Sony Pictures Classics. R. 랜드마크(피코와 웨스트우드) 등 일부지역.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크리스마스를 만든 사람 (A Man Who Invented Christmas)

찰스 디킨스가 ‘크리스마스 캐롤’을 집필하고 있다.


소설‘크리스마스 캐롤’ 집필 둘러싼
디킨스 주변 사람들 재미있게 담아


찰스 디킨스가 어떻게 해서 ‘크리스마스 캐롤’을 쓰게 되었는가를 허구를 마음껏 사용해 묘사한 요란하고 변덕스럽게 그린 코미디 드라마로 다소 무겁고 신선감은 없으나 그런대로 즐겁게 볼 수 있는 할러데이 시즌용 가족영화다. 
일종의 전기영화로 디킨스의 삶과 ‘크리스마스 캐롤’의 내용을 자유롭게 변용해 현실과 책의 내용을 뒤섞어 드라마로 만들었다. 출연진의 다양한 연기와 충실히 묘사한 빅토리아 시대 런던의 모습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소설의 집필 과정을 그럴싸하게 묘사, 즐길 만 하다.
디킨스가 이 소설을 쓴 것은 31세 때. 그 전에 낸 책이 세 차례나 대중의 외면을 받아 디킨스(댄 스티븐스)는 지금 재정난과 함께 슬럼프에 빠져 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디킨스가 다음 소설로 구상하고 있는 것이 ‘크리스마스 캐롤’의 내용. 그러나 그의 출판사는 크리스마스 얘기는 안 팔린다고 출판을 거부한다. 
이에 아랑곳 않고 디킨스는 소설을 6주 만에 집필해 자비로 출판한다. 그가 글의 아이디어를 찾아 방안을 헤매면서 난리법석을 떠는 모습이 재미있다. 작가의 창조적 예술적 과정에 대한 얘기이기도 한데 물론 책은 불티나게 팔린다. 디킨스는 책의 아이디어를 자기 가족과 자기가 만나는 주변 인물들로부터 얻는다. 인자하고 자기를 지극히 사랑하는 아내 케이트(모피드 클락)와 어린 자기 아이들에게 베드타임 스토리를 읽어주는 하녀 타라(안나 머피) 그리고 사람은 좋으나 무책임한 아버지 존(조나산 프라이스) 등이 가족.
그리고 그의 소설 속 인물의 아이디어를 주는 사람들로는 에브네저 스크루지의 모델이 되는 나이 먹고 인정 없는 구두쇠 사업가(크리스토퍼 플러머)와 병약한 조카. ‘험버그’를 소리치는 구두쇠는 스크루지가 돼 디킨스의 환상 속에서 디킨스와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디킨스는 그 외 소설 속에 나오는 혼들과도 만난다. 물론 병약한 조카는 소설 속의 타이니 팀의 모델이다. 
이들 외에도 영화에는 디킨스의 친구이자 에이전트인 존 포스터(저스틴 에드워즈)와 디킨스 소설의 삽화가(사이몬 캘로우) 그리고 디킨스와 동시대 작가로 디킨스의 실패를 고소해 하는 윌리엄 메이크피스 대커리(마일스 줍) 등 여러 인물들이 나와 내용에 다양성을 제공한다.
BBC-TV 드라마 시리즈 ‘다운턴 애비’로 유명해진 스티븐스가 복잡하고 다소 이기적인 디킨스 역을 과장되게 코믹하면서도 경쾌하게 잘 해내고 스크루지의 모델인 자린고비 역의 베테런 크리스토퍼 플러머와 역시 베테런인 조나산 프라이스 등이 호연한다. 이 밖에 나머지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PG. 랜드마크(피코와 웨스트우드) 등 일부 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사무라이’(Le Samourai·1967)

캡션 추가

고독하고 냉혈하지만 쿨한 킬러, 알랑 들롱 매력 가득


신사복 정장에 타이를 맨 킬러는 트렌치 코트를 입은 뒤 코트 깃을 올리고 이어 페도라를 쓴다. 킬러는 페도라의 앞을 손으로 좌우로 쓰다듬은 뒤 문을 열고 아파트를 나선다. 킬러는 이어 길에서 자동차를 훔쳐 탄 뒤 차고에 들러 자동차 번호판을 바꾸고 차고 주인으로부터 권총을 건너 받고 자기 임무를 위한 목적지로 간다. 목적지에 도착한 킬러는 손에 흰 장갑을 낀 뒤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살인을 저지른다. 
이 무표정한 얼굴의 쿨한 킬러가 프랑스 갱스터영화의 명장 장-피에르 멜빌(‘도박사 밥’ ‘밀고자’ ‘붉은 원’ ‘형사’)의 우아한 스타일을 지닌 ‘사무라이’의 주인공 제프 코스텔로다. 제프 역으로는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도는 비수 같은 눈동자를 지닌 알랑 들롱이 나온다. 이 영화는 들롱의 연기 생애를 확정지은 킬러영화로 1940년대의 미국 갱스터영화와 1960년대의 프랑스 팝문화 그리고 일본 사무라이영화의 외톨이 검객의 신화를 칵테일한 쿨한 작품이다. 
과묵한 들롱이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화면을 압도하면서 고독하고 냉혈한 킬러의 창백한 매력을 독소를 품은 향기처럼 발산한다. 그가 입술을 꽉 다문 채 아름답고 차가운 얼굴의 미간을 찌푸리면서 노려보는 눈매가 얼음장처럼 차갑다. 그는 시계의 앞면을 오른손 안쪽으로 보이게 차 시계를 볼 때마다 옷소매를 올리는 제스처가 독특한 멋을 발산한다. 
파리의 칙칙하게 어두운 곰팡이 색깔의 검소한 싱글 룸 침대에 누워 담배를 피우는 제프를 카메라가 멀리서 찍은 장면으로 시작된다. 4월4일 토요일 오후 6시다. 방에는 새장에 갇힌 새 한 마리가 있는데 이 새는 자기 운명에 갇힌 제프의 고독과 신세를 상징한다고 봐도 좋다.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와 ‘태양은 가득히’ 등 프랑스의 많은 명화들을 찍은 앙리 드카에의 무드 짙은 촬영이 영화의 스산한 분위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영화는 칼러인데도 시종일관 찌푸린 날씨처럼 음산하다. 
프로 킬러인 제프는 목표를 살해하기 전에 고급 창녀인 애인 제인(들롱의 부인 나탈리 들롱)을 찾아가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는다. 영화는 시작해서 제프와 제인이 대사를 나누기까지 10분 간 말이 없다. 
제프의 목표는 고급클럽 마티스의 주인. 살인을 하고 나오는 제프를 클럽의 몇 명의 사람들이 목격하는데 그 중에서도 제프의 얼굴을 정면에서 가까이 본 사람이 클럽의 흑인 여 피아니스트 발레리(캐시 로비에). 발레리가 치는 재즈곡과 함께 프랑솨 드 루베가 작곡한 재즈음악이 킬러영화 분위기에 잘 어울린다. 
제프는 자기 일의 대가를 받으러 갔다가 배신을 당해 자기를 고용한 자가 보낸 하수인이 쏜 총에 팔에 부상을 입는다. 여기서부터 제프는 복수를 하려고 자기를 고용한 자를 찾는다. 한편 형사반장(프랑솨 페리에)이 이끄는 수사팀이 수사에 나서면서 제프를 비롯한 거리의 ‘평상시 용의자’들이 대거 경찰서에 끌려온다. 
클럽에서 제프를 목격한 사람들이 서로 엇갈리는 증언을 하는 가운데 발레리도 제프가 살인자가 아니라고 위증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제인도 제프가 살인사건이 일어난 밤 자기와 함께 있었다고 위증하면서 제프는 풀려난다. 그러나 형사반장은 제프가 범인이라고 확신하고 제프의 뒤를 집요하게 쫓는다. 
집에 돌아온 제프를 맞는 자가 자기에게 총상을 입힌 하수인. 이 자가 제프에게 200만 프랑을 주면서 자기 두목이 지시한 자의 살해를 요구한다. 제프가 이 자를 때려누인 뒤 그로부터 자기를 고용한 자의 이름과 주소를 받아낸다. 제프가 배신의 복수를 위해 자기를 고용한 자를 찾아가는 뒤를 형사들이 추적하는데 제프가 이를 피하려고 지하철을 여러 차례 갈아타고 형사들을 따돌리는 장면이 멋과 함께 서스펜스와 스릴이 있다. 
그가 찾아간 집은 배신자의 집은 발레리가 사는 집. 제프는 배신자를 총으로 사살하고 마티스클럽으로 간다. 그리고 모자 보관소에 모자를 맡긴 뒤 티켓도 남겨놓고 이어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흰 장갑을 끼고 발레리에게 다가가 그에게 총구를 겨냥한다. 그리고 요란한 총성이 들린다. 제프는 왜 모자 보관 티켓을 안 받았으며 왜 발레리에게 다가갔는가. 이 고독한 외톨이 늑대의 실존적 킬러영화가 크라이티리언(Criterion)에 의해 새로 복원된 블루-레이로 나왔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원더’(Wonder)

이자벨(줄리아 로버츠)은 얼굴이 오그라든 아들 오기를 키우는데 온갖 정성을 쏟는다.

장애아 둘러싼 갈등과 용서… 훈훈한 연말 가정영화


할러데이 시즌을 맞아 온 가족이 함께 훈훈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마음을 고양시키는 드라마로 주인공이 10세 난 초등학생이어서 그 또래의 아이들이 즐겨 보겠다. 
자기와 다른 것에 대한 수용과 있는 그대로의 자기 인정 그리고 용서와 친절과 연민을 강조한 얘기다.
내용이 다소 진부하고 감상적이지만 작품의 의도가 진지하고 인간적이며 또 순수해 뉘앙스의 부족과 같은 단점들을 알면서도 그런 것들을 넘어서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유머도 있다. 특히 주인공 꼬마 역의 제이콥 트렘블리(‘룸’)의 경탄을 금치 못할 연기와 그의 부모로 나오는 줄리아 로버츠와 오웬 윌슨의 콤비와 연기가 좋은 조화를 이룬다. 이와 함께 조연진의 연기도 다소 가벼운 영화에 무게를 실어준다. 
뉴욕에서 따스한 어머니 이자벨(로버츠)과 유머가 많으나 약간 아이처럼 구는 아버지 네이트(윌슨) 그리고 착하고 예쁜 고등학생인 누나 비아(이자벨라 비도빅)와 함께 사는 10세 난 오기 풀만(트렘블리)은 출생 때부터 얼굴이 흉하게 오그라져 그 후 수술을 27회나 받았으나 정상이 아니다. 그래서 오기는 집에서 어머니로부터 홈스쿨링을 받고 우주인의 헬멧을 쓰고 산다. 
오기가 열살이 되면서 이자벨은 오기를 학교에 보내기로 한다. 이에 네이트는 동조는 하나 아들이 학교에서 또래들로부터 받을 차별에 대해 걱정이 태산 같다. 물론 오기는 학교에서 줄리안(브라이스 가이사) 등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지만 이에 굴복치 않는다. 
오기는 매우 총명하고 성숙해 교사들도 놀랄 정도인데 오기에게 특별히 자상한 사람들은 교장선생 투쉬만(맨디 패틴킨)과 담임선생 브라운(데이빗 딕스) 그리고 오기가 특별히 잘 하는 과학을 가르치는 선생 페트나(알리 리버트) 등.
영화는 오기와 오기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아끼는 친구 잭(노아 주프) 그리고 비아와 비아와 사이가 어긋난 단짝 친구 미란다(다니엘 로즈 러셀) 및 줄리안 등의 얘기 식으로 챕터가 나뉘어 서술된다. 
오기의 학교생활과 가정생활과 함께 오기 때문에 부모의 관심에서 물러나 있는 비아의 얘기가 큰 플롯을 이루는데 비아는 부모가 온 정성을 오기에만 쏟는 것에 가끔 좌절을 느끼나 이를 이해하는 착한 소녀다. 그리고 비아와 미란다의 관계와 함께 비아의 첫 사랑인 학교 동급생으로 연극광인 저스틴(나지 지터)과의 풋사랑이 아름답게 얘기된다. 
영화가 원체 선해 오기를 못 살게 굴던 줄리안마저 나중에 구원(?)을 받게 되는데 세상에 이렇게 좋고 착한 사람들만 산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고 보니 이 영화는 요즘 세상에 딱 필요한 영화이기도 하다. 나이보다 작은 체격의 오기가 무수히 변화하는 감정의 사이클을 다변하게 연기한다. 분장으로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인데도 제스처와 음성과 분위기로 에너지 충만한 연기를 보여준다. 스티븐 치보스키 감독(공동 각본). ★★★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신의 섭리’(The Divine Order)

노라와 남편 한스. 뒤에‘주부 파업중’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보인다.


평범한 주부서 여권운동가로 변신하는 과정 아담하고 재미있고 그려


1971년 알프스 인근 스위스의 한 작은 마을에 사는 평범한 가정주부가 여권운동가로 변신하는 과정을 아담하고 재미있고 경쾌하게 그린 스위스영화다. 집 밖에는 모르던 여자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면서 자아발견을 함과 동시에 주위의 사람들에게 까지도 혁신의 바람을 몰아다주는 ‘여성 만세’ 드라마다. 
특별히 새로운 것은 없지만 심각한 주제를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하게 이끌어가는 여류 감독 페트라 볼페의 솜씨가 사뿐하다. 시의에 어울리는 얘기이기도 한데 어떻게 끝날 것인지 예측할 수 있는 내용이어서 긴장감이 새는 것이 흠이다. 보기 좋은 것은 주인공을 비롯한 조연진의 다양한 연기. 독어 대사에 영어자막.
노라(마리 로이엔베르거)는 목재공장에 다니는 남편 한스(막스 지모니쉑)와 어린 두 아들 그리고 시아버지와 가사를 돌보는 전형적인 모범주부. (*노라라는 이름은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 의 주인공인 여권해방론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리라). 노라는 자기도 직업을 갖고파 보수적인 남편에게 얘기했다가 딱지를 맞는다. 당시 스위스 법으로 아내는 남편의 허락 없이는 직업도 못 가진다. 그러니 여자에게 투표권이 있을 리가 없다. 
노라가 여권운동에 앞장서게 된 직접적 이유는 자기 언니(라헬 브라운슈바이크)의 반항적인 딸 한나(엘라 룸프)가 장발의 오토바이족 애인과 함께 달아났다가 붙잡혀 수용소에 갇히게 되면서다. 한나가 그렇게 된 데는 노라의 책임도 있기 때문. 
여기서부터 얌전하던 노라는 남편과 주위 남자 그리고 일부 여자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여권운동에 나선다. 이에 동조하는 여자들 중에 특히 돋보이는 여자가 옛날부터 여권운동에 나섰던 7순의 브로니(지빌레 브룬너)와 이탈리아에서 이주한 신여성 그라지엘라(마르타 조폴리). 
이들과 나머지 여성들은 그라지엘라의 식당에 본부를 차리고 투표권을 비롯한 각종 여권신장운동에 돌입한다. 그리고 노라 등은 베른에서 열리는 여권운동 시위에 동참하고 스웨덴에서 온 여성 선각자로부터 여자의 은밀한 부분이 지닌 힘을 배운다. 그러나 노라와 동지들의 여권 운동에 남자들이 마이동풍 식으로 나오자 이들은 아내와 어머니 역을 거부하는 스트라이크를 시작한다. 
영화 끝에 남녀평등이 스위스 헌법에 명기된 것은 1981년이요 전 스위스에서 여성이 투표권을 얻게 된 것은 1990년이라는 자막이 나온다. ★★★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온 런던 브리지’


‘난 어제 밤 런던 다리 위를 걸었지요/가로등 불빛에 당신을 보았어요/종소리가 졸린 런던타운에 울리면서/런던다리가 내려왔어요. 하늘은 안개 속에 숨어 있었지만/우리가 키스를 했을 때 마치 마법처럼/달과 별들이 주위에서 빛났지요/런던다리가 내려왔을 때였어요. 다리 위엔 오직 당신과 나만이 있었고/두 마음은 허공중에 매달려 있었지요/그리고 강 위 높은 곳에서 기적이 일어났어요. 두 텅 빈 마음은 끌어안을 사랑을 발견했어요/두 개의 담배연기 고리는 황금의 반지로 변했지요/나는 우리가 런던타운에서 만난 날을 찬미 한답니다/런던 다리가 내려왔을 때지요.’ 
내가 좋아하는 여가수 조 스태포드가 부르는 ‘온 런던 브리지’다. 런던에 가면 생각나는 노래다. 이달 초 영화일로 런던에 1주일간 다녀왔다. 런던날씨는 생각보다 온화했다. 갖고 간 버버리코트도 하루 저녁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 동료회원인 키다리 스웨덴친구 마그너스와 같이 숙소인 랭함호텔 인근의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 하이드파크를 걸을 때 딱 한번 입었다.
런던은 그 동안 영화일로 여러 번 방문, 내 동네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피카딜리 서커스의 대형 전자간판에는 Samsung이 점멸하고 빨강색 2층버스 옆에는 손흥민의 웃는 얼굴사진이 붙어있다.
거리 공중에는 벌써 크리스마스 장식인 천사가 매달려 행인들을 내려다보고 있고 펍 앞에는 여전히 보도까지 꽉 메운 술꾼들이 너도 나도 손에 맥주잔을 들고 서있다. 버스를 타고가다 당장 뛰어내려 그들 속에 끼어들어 맥주 한잔 하고픈 생각에 갈증이 났다.
런던은 차도의 폭이 좁은 탓인지 교통 혼잡이 맨해탄 보다 더 심한 것 같다. 차도도 인도도 차와 사람들로 대 혼잡을 이루고 있는데 이런 번잡함으로 겪는 피로는 바비 다린이 노래한 ‘어 나이팅게일 생 인 바클리 스퀘어’의 바클리 스퀘어를 비롯한 도심 곳곳에 자리 잡은 손바닥만한  공원에서 풀어도 될 것 같다.   
하루 가는 비가 왔는데 비 맞은 탓인지 런던에서 처음으로 대형 우산가게를 봤다. ‘셰르부르의 우산’의 우산가게가 생각났다. 노점에 매어달린 히틀러 콧수염을 한 트럼프의 얼굴이 새겨진 셔츠를 보고 킬킬대고 웃었다. 미국에서도 저런 셔츠 파나.
랭함호텔을 비롯해 클래리지와 로즈우드호텔로 옮겨 다니며 인터뷰한 배우가 자그마치 22명.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세트방문하고 인터뷰하고 영화까지 보는 초 강행군 일정이어서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새새 짬을 내 거리를 걸었지만 피곤이 누적돼 늦가을 런던정취를 만끽하지 못해 지금도 찜찜하다.
만난 배우들은 줄리아 로버츠, 벤 애플렉, 에디 레드메인, 미셸 파이퍼, 갤 개돗, 페넬로피 크루즈, 오웬 윌슨, 브라이언 크랜스턴 및 미셸 도커리 등. 이들이 나오는 영화들은 현재 촬영 중인 ‘팬태스틱 비스츠 2’를 비롯해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살인’과 ‘래스트 플랙 플라잉’ ‘저스티스 리그’ ‘원더’ 그리고 TV시리즈 ‘갓리스’ 등이다. 줄줄이 이어지는 인터뷰에 녹초가 된 몸으로 애플렉과 개돗 등 호화캐스트가 나오는 ‘저스티스 리그’를 봤는데 어찌나 꼴불견인지 난장판 액션 소음 속에서도 깜빡 깜빡 졸면서 봤다.   
‘팬태스틱 비스츠 2’를 찍고 있는 런던 인근의 리브스텐 스튜디오는 ‘해리 포터’시리즈를 찍은 곳이다. 의상과 소품실에 이어 1927년대 파리거리 세트를 둘러보고 뉴욕 고층건물 꼭대기 세트에서 영화에 나오는 레드메인 등을 인터뷰했다.
이번 런던 방문에서 가장 뜻 깊었던 일은 ‘영화스타는 리버풀에서 죽지 않는다’(12월 15일 개봉)의 실제 주인공 피터 터너를 만난 것. 내년으로 창립 75주년을 맞는 HFPA가 이를 기념해 대부분 영국의 영화와 TV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메이페어 호텔에서 연 파티에서였다.
우연히 나만한 키를 한 대머리에 단단한 체구를 지닌 남자와 대화를 나눴는데 이 사람이 “내가 그 영화의 피터 터너”라고 자기를 소개했다.(사진) 난 그에게 “정말이냐. 너무나 반갑다”며 악수를 나눈 뒤 서로 긴 얘기를 나눴다. 그러고 보니 터너는 영화에서 자기 역을 한 제이미 벨과 얼굴이 닮았다.   
이 영화는 할리웃 황금기의 섹시스타 글로리아 그램이 생애 마지막 무렵인 56세 때 런던에서 만난 28세 연하의 터너와의 로맨스를 그린 것이다. 영화에서 그램으로는 아넷 베닝이 나온다. 터너는 먼저 “나 한국 음식 아주 좋아 한다”고 운을 떼더니 얘기를 자기 애인에게로 돌려 ”그램의 눈을 보면 그 안으로 빨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그램은 참으로 대단한 여자였다“고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내가 어렸을 때 그램의 ‘빅 히트’를 보고 그에게 반해 그램의 팬이 되었다고 말하자 터너는  “그 영화와 ‘인 더 로운리 플레이스’가 좋았었지”하면서 “우리는 정말로 뜨거운 사랑을 나눴고  난 지금도 그램의 사진을 간직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내가 좋아하던 옛 스타의 실제 연인을 만나 과거를 얘기하자니 내가 마치 흑백영화의 주인공이나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들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7년 11월 12일 일요일

‘빅토리아와 압둘’ 주디 덴치




“고독한 여왕에게 압둘은 잠자던 정열 깨운 존재”


‘빅토리아와 압둘’(Victoria and Abdul)에서 여왕 즉위 50주년을 맞아 인도에서 예물을 갖고 온 젊은 서기 압둘 카림과 오랜 우정을 지속했던 빅토리아 여왕으로 나온 주디 덴치(82)와의 인터뷰가 토론토영화제 중인 지난 9월 토론토의 페어몬트 로열 요크호텔에서 있었다.
짧은 백발에 품위를 지닌 덴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시치미를 뚝 딴 유머를 섞어 친절하고 재치 있게 질문에 대답했는데 매우 명랑하고 인터뷰를 즐기는 모습이 마치 귀여운 소녀 같았다. 그런데 덴치는 시력이 나빠져 부축을 받으며 걸었다. 덴치는 ‘미시즈 브라운’(1997)에서도 빅토리아 여왕으로 나왔고 ‘사랑에 빠진 셰익스피어’(1998)에서 또 다른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1세로 나와 오스카 조연상을 탔다. 

-빅토리아 여왕으로 두 번이나 나왔는데 여왕에 대한 의견은 어떤 것인가.
“두 번째로 빅토리아로 나오리라곤 전연 기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빅토리아와 압둘의 얘기도 몰랐다. 나는 빅토리아의 남편 알버트에 대한 정열과 함께 빅토리아가 남편을 잃은 뒤 겪은 슬픔에 대해선 알고 있다. 빅토리아 여왕은 매우 정열적인 사람으로 이런 정열을 모두 포기하고 있을 때 압둘이 나타나 여왕의 내면에서 잠자던 정열을 다시 점화시켜 놓으면서 여왕의 말년을 구제해준 셈이다. 압둘은 그 누군가와 의견을 교환하고 얘기를 나누면서 긴장을 풀 필요가 있는 사람의 정열적인 면을 되살려놓은 사람이다. 그것은 마치 꽃이 다시 개화하는 것과도 같다.”

-80세가 되었을 때 뜻밖에 받은 선물은 무엇인가.
“내 딸과 함께 닥치는 대로 쇼핑을 하고 있는데 딸이 갑자기 문신을 새길 생각이 있느냐고 물어 ‘예스’라고 답했다. 그래서 팔목에 ‘카르페 디엠’(오늘을 마음껏 살아라)라는 문신을 새겼다.” 

-그렇다면 ‘카르페 디엠’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를 지녔는가.
“매일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만 보려고 팔찌로 문신을 가리긴 했으나 가끔 보면서 그 뜻을 생각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어떻게 해서 압둘은 자기 나라의 정복자인 당신에게 ‘여왕 폐하를 섬기는 것은 몸 둘 바를 모르는 특전’이라며 순종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곤란한데.
“그는 예의범절이 매우 바른 사람이다. 그리고 그가 섬긴다고 한 것은 단순히 하인 노릇을 한다기보다 영화에서 보다시피 여왕에게 우루드어를 비롯해 여러 가지를 가르치는 것을 뜻한다고 봐야겠다. 그의 섬김으로 인해 여왕은 희망을 갖게 되고 또 매일 아침 일어날 그 무언가를 갖게 된 것이다.”

-영화는 각기 다른 두 문화가 서로를 알게 되는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런 내용이 요즘 시의에도 적용된다고 보는지.
“그렇다. 아주 적당한 시기에 나왔다고 본다. 압둘은 회교도이고 빅토리아 여왕은 기독교도이지만 서로 이해하고 사랑했다. 요즘처럼 서로 다른 종교가 다투는 때 이보다 더 좋은 교훈도 없을 것이다.” 
빅토리아 여왕이 압둘로부터 우르드어를 배우고 있다.


-빅토리아 여왕은 편지를 많이 썼는데 본인도 아직 글을 펜으로 쓰는가. 
“난 늘 편지와 엽서를 많이 썼는데 이젠 시력이 나빠져 더 이상 그렇게 많이 쓰지를 못한다. 내게 있어 그것은 큰 손실이다. 나는 이 인터뷰에 오기 전에 편지를 썼는데 눈이 안 보여 애를 먹었다.”

-보수적인 빅토리아 여왕이 어떻게 해서 회교도에게 마음의 문을 열 수가 있었다고 보는가.
“여왕은 고지식하고 엄격하고 자식들과의 관계도 원만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긴 하다. 이 영화가 흥미 있는 까닭은 그런 여왕이 놀랍게도 내면에 애정에 대한 심각한 갈증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왕은 자기 의견을 피력하고 또 그것을 교환할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했다. 모든 것이 격식위주인 삶에서 마음 놓고 함께 웃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왕의 내면을 보여주었다는 것이 이 영화가 흥미 있는 까닭이다.” 

-배우와 인간으로서의 긴 생애를 돌아 볼 때 무언가 달리 했더라면 하고 생각하는 것은 없는지.
“난 원래 무대 디자인을 공부했다. 그러나 지난 1950년대 스트래트포드의 무대에 설치된 ‘리어왕’의 디자인을 보고 내겐 저런 상상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배우가 됐고 그 결정에 대해 행복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종종 무대 디자인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곤 한다.”

-압둘로 나온 알리 화잘에 대한 첫 인상은 어땠는가.
“촬영에 들어가기 이틀 전에 만났는데 즉시로 일체감을 느꼈다. 그는 유머 감각이 많은 사람으로 처음 보는데도 긴장감이나 서먹서먹한 느낌이 전연 없었다. 그는 아주 멋쟁이로 함께 일 하기가 정말로 좋았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이 원작인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도 나오는데 재미있었는지. 
“별로 대사도 많지 않고 그저 화려한 장신구에 잘 차려 입고 열차에 앉아 있으면 돼 즐거웠다. 그리고 내 친한 친구인 케네스 브라나가 감독해 더 좋았다. 그와 나는 이번으로 10번째 함께 일하는 것이다. 브라나는 감독일 뿐 아니라 영화의 주인공인 탐정 퐈로로도 나온다. 앙상블 캐스트 영화로 멋진 시간을 보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팬인가.
“그가 대단한 존재이긴 하나 특별한 팬은 아니다. 

-연극을 감독한 적이 있는데 영화를 감독할 생각은 없는지.
“케네스 브라나가 주연하는 연극을 두 편 감독했다. 그런데 그 일은 너무 힘들어 영화는 물론이요 연극도 더 이상 감독할 생각이 없다.”

-영화에서 여왕과 압둘은 만나는 즉시로 교감이 돼 둘은 영혼의 만남을 이룬 셈인데 실제로 그런 경험이 있는가.
“몇 차례 있다.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고도 이해하고 또 느낌으로 금방 가까워질 수가 있는데 그것은 어떤 사람과 친근해질 수 있는 일종의 지름길이다. 내가 함께 일한 감독들 중에도 더러 그런 사람이 있는데 이 영화를 만든 스티븐 프리어스가 그 중 한 사람이다. 스티븐은 과묵한 사람이지만 우린 별 말이 없어도 서로 잘 이해할 수 있다.”

-자유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
“시력이 나빠져 잘 볼 수는 없지만 그림을 좀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을 만난다. 난 늘 친구 특히 무엇보다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다. 모두 함께 모여 카드를 하고 게임을 하면서 즐기는 것처럼 중요한 일도 없다. 내게 있어 함께 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뜻을 지닌 것은 없다.”

-여왕은 겉으로 보기엔 화려하나 사실은 자유도 없고 자기가 살고픈 대로 살지도 못하는데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자리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자리라고 생각한다. 영화에서도 표현됐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든 것을 스케줄에 따라 해야 한다. 매일 같이 그렇게 산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본인이 선택한 것이 아닌 막중한 책임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치하할만한 일이다.”

-여왕처럼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사람들과 대면한 경험이 있는가.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폭군처럼 자신의 힘을 마구 행사하는 사람들을 더러 만난 적이 있다.”

-운동은 하는지.
“두 무릎을 다 수술해 하루에 10분을 속보하기도 힘들다. 그리고 시력이 나빠져 이젠 운전도 못하는데 운전면허증이 발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난 스포츠카가 있었는데 그 것을 몰고 어딘가를 가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로 유감이다. 시력이 호전될 가능성은 전무하다.”

-매일 같이 하는 반복해 하는 일이라도 있는가.
“이 닦는 것 외엔 없다.”

-본인에게 있어 매일은 날마다 다른가.
“바라건대 매일이 각기 다 달랐으면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루해 죽을 것이다. 난 지금까지 60년을 무대에서 활동했는데 이 나이에도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운이 좋았다. 특히 이 직업에서 이 나이에 아직도 고용될 수 있다는 것은 진짜로 운이 좋기 때문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오리엔트 익스프레스의 살인’(Murder on the Orient Express)


오리엔트 익스프레스의 승객들.  왼쪽이 명탐정 퐈로역의 케네스 브라나.

초호화 캐스팅으로 리메이크한 살인 미스터리극


영국의 여류 추리소설 작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을 원작으로 영국의 배우이자 감독인 케네스 브라나가 연출하고 주연도 겸했는데 특급열차가 영화에서처럼 눈사태를 맞아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연출이 지지부진하고 탄력이 없어 초호화 캐스트영화인데도 지루하고 심심하기 짝이 없는 살인 미스터리극이 되고 말았다. 
이 소설은 지난 1974년 시드니 루멧이 감독하고 알버트 피니, 션 코너리, 로렌 바콜, 리처드 위드마크, 잉그릿 버그만(이 영화로 오스카 조연상 수상), 마이클 요크, 재클린 비셋, 앤소니 퍼킨스 및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등이 출연한 영화로도 만들어졌었다. 이 영화도 잘 생기긴 했으나 외모만큼 내용이 실하진 못했으나 브라나의 것보단 훨씬 낫다. 
브라나의 영화의 대죄는 앙상블 캐스트의 영화에 미국과 영국의 탑클래스 배우들을 기용하고도 이들을 완전히 버리다시피 한 것이다. 배우들이 하나같이 제 구실을 못하고 마지못해 나왔다는 듯이 어색한데 그에 반해 브라나가 너무 독주를 하고 있다. 그는 자동차 운전대만한 콧수염을 하고 나와 심한 프랑스어 액센트를 구사하면서 자주 자기 얼굴을 클로스업으로 과시하고 있다. 브라나가 오버 액팅을 하는 원맨쇼다. 
브라나가 맡은 역은 세기의 명탐정인 벨기에 태생의 에르퀼 퐈로. 퐈로는 하도 유명해 과거 피터 유스티노프, 알버트 피니, 이안 홈 및 오손 웰즈 등도 이 역을 맡았었다. 
영화는 서막식으로 1931년 예루살렘에서의 에피소드로 시작된다. 모처럼 휴가를 즐기고 있는 퐈로가 통곡의 벽 앞에서 발생한 절도사건을 푸는 얘기다. 이어 런던에서 큰 사건이 발생해 퐈로에게 즉각 귀환해 달라는 전보가 날아든다. 
가장 빨리 돌아갈 수 있는 길이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출발해 유럽으로 가는 오리엔트 특급열차. 열차의 사무장이 퐈로의 친구인 북(탐 베이트만)이어서 퐈로는 쉽사리 특급칸을 얻는다. 퐈로의 이웃 승객들은 직업과 국적과 출신 성분이 각기 다른 12명. 
여자 가정교사 메리 데벤햄(데이지 리들리), 집사 베도스(데렉 자코비), 영국인 의사 아부스노트(레즐리 오돔 주니어), 남자 찾느라 혈안이 된 고독한 허바드 부인(미셸 파이퍼), 하녀 출신의 선교사 필라(페넬로피 크루즈), 독일인 교수 게르하르트 하르트만(윌렘 다포), 영국인 노 귀부인(주디 덴치) 그리고 얼굴에 흉한 칼자국이 난 배경이 깨끗하지 못한 미국인 새뮤엘 래쳇(자니 뎁) 및 래쳇의 하인 매퀸(조시 개드) 등. 그런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래쳇이 퐈로에게 자기 신변보호자로 고용하겠다고 제안을 하나 퐈로로부터 거절을 당한다. 
기차가 “칙칙폭폭” 하면서 신나게 달리다가 대형 눈사태를 만나 탈선을 하는데 이어 래쳇이 자기 방에서 칼에 찔려 죽는다. 이에 북은 퐈로에게 현지 경찰이 오기 전에 사건을 해결해 달라고 부탁한다. 현지 경찰이 알았다간 열차의 명성이 훼손될 것이 두려워서다.
열차의 수리반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퐈로는 수사를 시작하는데 12명이 모두 혐의자다. 여기서부터 브라나가 일인극이다시피하게 혼자서 대사를 외어가면서 독주하는데 그 바람에 다른 배우들은 주눅이 들어 우물쭈물하고 있다. 정차한 기차처럼 영화의 서술과 진행이 올스탑해 긴장감도 서스펜스도 느낄 수가 없고 감정도 결여됐다. PG-13. Fox.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펠리시테’(Felicite)


펠리시테가 골목 카페에서 손님들을 상대로 열창하고 있다.

밤골목 카페 여가수의 애잔한 삶·노래
열정적 아프리카 선율‘한편의 뮤지컬’


화끈하게 정열적이요 땀 냄새가 나고 꺼칠꺼칠할 정도로 사실적인 한 여인의 사랑과 생존의 이야기로 뜨거운 아프리카 대륙 콩고의 킨샤사가 무대다. 거의 기록영화 같은 실존적이요 생명감이 넘치는 영화로 주인공이 골목 카페의 여가수여서 노래가 많이 나온다. 이 거리 노래들의 열기에 화상을 입을만하다.
열정적인 노래들이 거구의 주인공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듣노라면 영육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흥분감에 젖게 된다. 주인공 펠리시테 역의 신인 여배우 베로 티샨다 베야의 막강한 연기가 영화에 강한 에너지를 부어 담는데 킨샤사 현지 거리에서 찍은 생동감 넘치는 촬영도 영화의 사실성을 부추긴다.
처음에 펠리시테가 거리에서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큰 제스처와 함께 열창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10대 아들 사모(가에탄 클라우디아)를 혼자 키우는 펠리시테는 골목 카페에서 손님들을 상대로 노래를 부르면서 생계를 이어간다. 그런데 사모가 오토바이 사고로 다리를 크게 다치면서 펠리시테는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는 사람마다 찾아다니면서 돈을 빌린다. 펠리시테가 동네 깡패 두목을 비롯해 생전 모르는 사람의 집마저 찾아다니면서 돈을 구걸하는 모습이 집요하고 처절하다. 보기에 고통스러울 정도인 모정과 생존의 적나라한 모양이다.
이와 함께 펠리시테의 밤 골목 카페에서의 노래가 섞여드는데 손님 중 하나가 주정뱅이이자 바람둥이인 동네 미케닉 타부(파피 므카파). 그러나 타부는 내면에 부드러운 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자로 펠리시테를 사랑한다. 그리고 펠리시테도 그에게 마음을 준다. 영화의 후반부는 펠리시테와 타부와의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는 관계와 함께 역시 펠리시테의 노래들로 연결된다.
노래의 치유 능력도 이야기하고 있는 일종의 뮤지컬인 셈인데 펠리시테가 부르는 노래들이 하나 같이 아프리카 밀림 속의 짐승들처럼 야수적이다. 배우들의 연기를 비롯해 북적대는 킨샤사 거리의 풍경 등 모든 것이 마치 내셔널 지오그래픽 작품처럼 사실적인데 간혹 타오르는 대낮의 거리의 장면을 꿈을 꾸는 듯한 밀림의 모습과 대조한 촬영이 강한 인상을 남긴다. 이와 함께 아마추어 연주자들로 구성된 킨샤사 교향악단이 낡은 창고에서 클래시컬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도 펠리시테의 폭발적인 열창과 아름다운 대조를 이룬다. 알랭 고미 감독.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레이디 버드’(Lady Bird)


고3 레이디 버드는 집을 떠나 훨훨 나르는 새처럼 살고싶다.

자유갈망 10대의 청춘고백, 첫 경험 등 위트 있게 그려


키가 껑충하니 크고 숲속의 요정처럼 맑고 신선한 분위기와 34세의 나이에도 소녀 같은 모습을 한 배우 그레타 거윅의 감독(각본 겸) 데뷔작으로 위트 있고 총명하고 재빠르며 통찰력이 뚜렷한 영화로 듣기 좋고 보기 좋다. 거윅은 벤 스틸러와 공연한 ‘그린버그’로 두각을 나타낸 자연스런 연기파로 주연한 ‘프랜시스 하’의 감독 노아 바움박의 애인이다. 
이 영화는 거윅의 고교 3학년 때의 자기 얘기로 그의 고향 새크라멘토에 바치는 연시이자 질식할 것 같은 가정을 떠나 자유롭게 살고파 안달이 난 10대의 청춘고백이다. 특히 거윅은 캘리포니아 주의 수도이지만 서자 취급받는 새크라멘토를 마치 우디 알렌이 뉴욕을 사랑하듯이 극진한 마음으로 찬미하고 있다. 그러나 과하지 않고 절제 있게 다루었다.   
본명이 크리스틴 맥퍼슨인 주인공이 자기 이름을 마다하고 레이디 버드라고 부르는 이유도 새처럼 자유롭고 싶은 마음과 자기를 사랑하나 사사건건 간섭하고 현실에 안주하라고 압력을 넣는 부모 특히 어머니에 대한 반발심에서다. 
이런 10대의 얘기는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어서 이 영화도 다소 기시감은 있으나 거윅은 레이디 버드와 그의 부모 그리고 애인과 친구의 얘기를 소상하게 보여주면서 이들을 연민과 사랑의 마음으로 다뤄 그의 관용과 이해심이 갸륵하게 느껴진다.
2002-2003년 새크라멘토. 중산층 가족의 외딸 레이디 버드(셔사 로난)는 가톨릭학교 졸업반. 착한 아버지 래리(트레이시 레츠)는 실직자여서 간호사인 어머니 매리온(로리 메트캐프)이 살림을 도맡다시피 한다. 그런데 매리온은 절대적 현실주의자로(꿈이 없어서 라기 보다 현실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봐야겠다) 집을 떠나 훨훨 날아가고파 하는 딸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끊임없이 강조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레이디 버드의 반발은 커지면서 지역대학교에 가라는 어머니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뉴욕의 대학에 원서를 넣는다.           
이런 가정생활과 함께 레이디 버드의 학교생활과 친구와 애인과의 관계가 사실적이요 우습고 아기자기하게 그려진다. 먼저 반항적인 레이디 버드의 마음을 이해하는 수석수녀(로이스 스미스)와의 관계가 포근하고 자비롭다. 
레이디 버드가 처음에 눈독을 들인 남자는 학교연극 ‘템페스트’에서 공연하는 잘생긴 대니(루카스 헤지스). 그러나 잘 나가던 둘의 관계는 레이디 버드가 전연 생각하지도 못한 일로 인해 끝이 난다. 이어 레이디 버드가 눈독을 들인 아이가 파격적인 독서광 카일(티모데 샬라메). 레이디 버드는 이 아이를 통해 섹스를 실험하고 경험하는데 첫 섹스를 경험하는 레이디 버드의 내면과 행위가 우습고 부끄럽고 겸연쩍고 아울러 저돌적으로 그려졌다. 아주 현실감이 있다. 
마침내 레이디 버드는 연극도 잘 끝내고 졸업을 한 뒤 대학에 진학한다. 입학에 큰 격려와 협조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 뜻 밖에도 집안의 국외자 같았던 아버지 래리. 끝에 콧등이 시큰해진다. 다소 재잘대는 말이 많기는 하지만 거윅은 자기와 자기 주변 인물들을 사랑하고 아끼고 돌보는 심정으로 솔직하고 아름답게 그렸다.
연기들이 출중한데 특히 로난의 당돌하고 의기양양하면서도 10대의 허점이 있는 연기와 딸을 사랑하면서도 내리누르는 현실로 인해 본의 아니게 권위적인 사람이 되고만 매리온 역의 메트캐프의 다양한 연기가 눈부시다.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LBJ’


린든 존슨이 ‘에어포스 원’에서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고 있다.

36대 대통령 존슨의 정치 전기영화… 우디 해럴슨과 도노반의 연기 볼만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허수아비 같은 부통령이었다가 케네디의 사망으로 대통령이 된 뒤 민권법안을 통과시키고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 프로그램 등을 만든 제36대 미국 대통령 린든 베인즈 존슨의 정치 전기영화다. 
쇼맨쉽이 강했던 케네디의 후광과 그의 비극적 사망으로 인해 진가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던 존슨의 개성과 정치적 역량을 새롭게 조명했는데 정통 전기영화의 틀을 답습하고 있지만  흥미 있는 영화다. 
존슨으로는 우디 해럴슨이 나오는데 분장을 진하게 했으나 전연 존슨 같지 않다. 그러나 해럴슨이 저속한 상소리를 내뱉으면서 저돌적으로 해내는 연기 하나만으로도 볼만한 영화다. 그와 함께 케네디로 나온 제프리 도노반의 해럴슨과 대조되는 점잖 빼는 차분한 연기 역시 아주 좋다. 그런데 도노반도 전연 케네디 같지 않게 생겼다. 
영화는 1963년 케네디가 재키와 함께 달라스를 방문해 오픈카를 타고 시내를 지나가는 장면으로 시작해 모터케이드와 케네디가 오스왈드의 저격을 받고 쓰러지는 장면이 얘기 중간 중간에 끼어드는 식으로 진행된다.
존슨은 여당인 민주당의 상원 대표로 닳고 닳은 정치인. 입이 걸고 직선적이고 실무적이며 목표를 위해선 타협도 마다 않는 남부(텍사스) 토박이로 케네디에 맞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나 열세다. 그를 자상하게 돌보고 응원하는 사람이 그의 부인 레이디 버드(제니퍼 제이슨 리). 이어 케네디가 동생 바비(마이클 스탈-데이빗)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존슨에게 부통령직을 제의한다. 남부표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존슨은 의원시절의 막강한 권력을 다 잃고 대통령의 들러리 노릇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를 극히 싫어하는 바비가 자기 대신 존에 이어 대통령에 출마할 것이 분명하다고 믿게 되면서 그의 좌절감은 극도로 커진다. 
이를 뒤바꿔 놓은 것이 케네디의 죽음. 대통령이 된 존슨은 자기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던 남부출신 의원들을 배신(?)하고 케네디가 추진하던 민권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이로 인해 그는 막강한 남부 출신 의원들과 적이 된다. 마지막 장면은 케네디가 시작한 일을 계속하자는 존슨의 상하양원 의회합동연설로 장식되는데 아주 감동적이다. 존슨은 베트남전을 확대하면서 국민의 인기가 떨어지자 1969년까지의 임기를 마치고 차기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다시 한 번 존슨의 인물과 업적을 살펴볼 수 있는 볼만한 작품이다.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뱀피르’


덴마크의 엄격한 감독 칼 테오도어 드라이어의 분위가 스산한 ‘뱀피르’(Vampyr^1932^사진)는 걸작 초기 흡혈귀영화 중의 하나다. 이 영화는 공포영화에 최면에 걸린 것 같은 분위기와 혹독할 정도로 꾸밈이 없고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영상을 갖추어준 괴이하도록 아름다운 작품이다. 드라이어의 또 다른 걸작으로는 영화사에 길이 남는 마리아 팔코네티 주연의 ‘잔 다크의 수난’(The Passion of Joan of Arc^1928)이 있다. 
‘뱀피르’의 잿빛 몽상과도 같은 영상은 헝가리 태생의 촬영감독으로 유럽서 활동하다 후에 할리웃으로 옮겨 촬영을 거쳐 영화감독으로 활약한 루돌프 마테의 솜씨다. 마테가 할리웃에서 감독한 영화들은 ‘D.O.A.’   ‘낙인’ ‘유니언 스테이션’ ‘도둑왕자’ 및 ‘미시시피 도박사’ 등이다.  ‘뱀피르’는 드라이어의 첫 유성영화로 카메라 및 편집기술과 함께 다양한 음향효과를 써 꿈과 같은 공포무드를 조성하고 있는 73분짜리 작품. 움직이는 그림자와 빛의 명암을 극적으로 사용해 보는 사람을 악몽으로 몰아넣는데 세트는 독일 표현주의영화 ‘닥터 칼리가리의 관’(The Cabinet of Dr. Caligari^1919)을 연상케 한다.
내용은 신비주의를 연구하는 젊은이가 파리 인근의 한 마을에 들렀다가 겪는 초현실적이요 불길한 현상과 악마적 현실이 뒤섞인 경험을 그렸다. 서서히 움직이는 안개와 죽음을 전조하는 큰 낫 그리고 불길한 메아리 등이 보는 사람의 감관을 두려움으로 감싸 안는다. 출연은 제작비를 댄 사람과 대부분 감독이 촬영현장에서 고른 사람들이 했는데 독일어 등 3개국어로 녹음했다. ‘뱀피르’가 최근 크라이티리언(Criterion)에 의해 복원된 독일어판 블루-레이로 나왔다.
무성영화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 만들어지고 있는 흡혈귀영화의 매력은 무엇인가. 우선 그 것은 우리 내면에 잠복한 어두운 욕망이 갈구하는 공포와 변태성을 충족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흡혈귀의 색깔이라 할 블랙은 감각적이요 퇴폐적이고 염세적이며 또 야수적으로 그 것은 두려움과 저주 그리고 비밀과 죽음을 품고 있다. 이런 성질은 모두 우리가 탐하거나 피치 못할 것들이다.     
검은 망토를 걸친 드라큘라는 밤에만 활동하는 사체이지만 매우 인간적이다. 그에겐 백작 칭호가 달려 있는데다가 초인의 능력을 지녀 어둠의 수퍼맨이라 부를만하다. 또 이 고독한  남자는 아름다운 여인에 집착하는 로맨틱한 정열파다. 그리고 그는 치명적인 성적 매력을 지녔다. 그 성적 매력은 악마적인 것으로 아무래도 성적 매력이란 어두워야 제 가치를 발휘하게 마련이다. 여자들이 ‘암흑의 왕자’라 불리는 드라큘라에게 자기 목을 서슴없이 내어주는 까닭을 알만하다.
그런데 드라큘라의 사랑은 저주받은 국외자의 것이요 반드시 피를 봐야하는데다가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어서 더욱 간절하고 비극적이다. 그래서 그가 사랑을 못 이룬 채 인간에 의해 타살되며 내지르는 한과 고통의 비명을 듣게 되면 이 밤의 신사에게 깊은 연민의 정마저 갖게 된다. 
브람 스토커의 소설이 원작인 드라큘라영화의 고전 중 하나인 유니버설사 작품 ‘드라큘라’(Dracula^1931)는 헝가리 태생의 주연 벨라 루고시를 공포영화의 빅스타로 만들어준 영화다. 그는 강한 액센트와 함께 천천히 대사를 구사하면서 압도적이요 초연한 연기로 흡혈귀의 신비감과 저 세상 같은 분위기를 완벽히 보여주었다. 그의 후배 드라큘라들로 크리스토퍼 리, 프랭크 란젤라, 잭 팰랜스 및 탐 크루즈 등이 있지만 지금도 루고시는 드라큘라와 동일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수 많은 흡혈귀영화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독일의 명장 F.W. 무르나우의 무성영화 ‘노스페라투’(Nosferatu^1922)다. ‘노스페라투’는 흡혈귀의 루마니아어. ‘공포의 심포니’(A Symphony of Horror)라는 부제가 붙은 이 영화는 빛과 그림자와 조명 그리고 카메라의 동작을 통해 감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 명작이다.
특히 꿈에 볼까봐 겁이 나는 흡혈귀 올록백작(막스 슈렉)의 모습은 욕지기가 날 정도로 추하다. 역대 드라큘라 중 가장 추남으로 쥐 같은 얼굴에 해골처럼 마른 몸과 길고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독수리 발톱을 닮은 야위고 긴 손가락을 한 그는 세균을 온몸에 묻히고 다니는 악의 화신과도 같다.
독일의 또 다른 명장 베르너 헤르조크가 ‘노스페라투’를 치하하면서 리메이크한 ‘노스페라투 흡혈귀’(Nosferatu the Vampyre^1977)도 내가 좋아하는 흡혈귀영화. 독일 배우 클라우스 킨스키가 드라큘라로 그의 희생물 루시 하커로는 프랑스의 따갑도록 아름다운 배우 이자벨 아자니가 나온다. 특이한 것은 드라큘라가 좋은 흡혈귀라는 점. 드라큘라는 루시를 사랑해 상사병에 걸리는데 그가 시름에 빠져 축 늘어져 있는 측은한 모습을 보자니 동정심마저 간다. 사랑엔 흡혈귀도 속수무책이로구나. 이 작품은 화사한 수채화 같은 칼러영상과 함께 시적 분위기를 지닌 아름다운 공포영화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7년 11월 2일 목요일

예비수녀(Novitiate)


캐슬린은 신에 대한 사랑을 확신하고 수녀가 되기로 결심한다.

예비 수녀들의 갈등·고뇌 사실적으로 묘사한 수작


1960년대 초 수녀원의 기성 수녀들과 예비 수녀들의 관계와 갈등과 우정을 깊이 있고 지적으로 해부한 탁월한 드라마로 신성하면서도 세속적이다. 신병 훈련소 소장처럼 엄격하고 혹독한 수녀원장과 이에 맹목적으로 헌신하는 나이 먹은 수녀들 그리고 원장의 독주에 저항하는 젊은 수녀의 얘기와 함께 이들의 밑에서 고된 훈련을 받는 예비수녀들의 종교적 인간적 정열과 신에 대한 믿음과 회의를 질서정연하고 아름답고 또 스타일 멋있게 묘사한 작품이다.
신에 대한 사랑과 믿음 그리고 회의와 함께 이 가운데서 시달리는 예비수녀들의 육체적 영적 갈등과 고뇌가 절실히 가슴을 파고드는데 이런 갈등에 서스펜스 스릴러 분위기마저 감돈다. 신인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함께 흥미진진한 내용에 함몰하게 만드는 수작이다. 
1964년 장소를 알 수 없는 곳의 한 수녀원. 주인공인 예비수녀 캐슬린 해리스(마가렛 퀄리)가 어떻게 해서 수녀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가 회상식으로 얘기된다. 어린 캐슬린은 무신론자인 어머니에 끌려 동네 성당미사에 참석하는데 어머니가 딸을 이 곳에 데려온 이유는 종교란 허망한 것이라는 점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캐슬린은 부부싸움이 잦은 집안 분위기와 정반대인 성당의 평화로운 분위기에 사로잡힌다. 이어 캐슬린은 장학금을 주는 지역 가톨릭학교에 입학하고 17세가 되면서 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수녀원의 예비수녀 후보로 들어간다. 
자신을 신의 대리인이라고 말하는 인정사장 없이 엄격한 원장(멜리사 리오가 과장됐을 정도로 신나게 열연한다) 밑에서 후보생들은 기혹할 정도로 모진 훈련을 받는데 이에 여러 명이 세상으로 돌아가고 12명 정도만 남는다. 다양한 후보생들의 모습과 성격이 골고루 묘사되는데 한 후보생은 오드리 헵번이 나온 영화 ‘파계’를 보고 수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고백한다. 
이어 바티칸에서 획기적인 개혁안이 채택된다. 미사를 라틴어에서 일상어로 하고 자신에 대한 체형을 금지하며 타종교에 관대하며 아울러 수녀들이 지닌 권위를 대폭 위축시킨다는 내용이다. 이에 결사반대하는 것이 원장과 고참수녀들. 그런데 실제로 이 조치 이후 전 세계서 90,000여명의 수녀가 파계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서도 캐슬린은 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신부복을 입고 수녀가 되기 전의 한 의식인 신과의 결혼식을 치른다. 수녀들의 성적 욕망과 자위행위 그리고 동료 간의 육체적 접촉과 이에 대한 죄의식 등이 민감하고 절제 있게 묘사되면서 작품을 사실적이면서도 고상하게 격상시킨다. 
캐슬린과 원장과 함께 중점적으로 얘기를 이끌어 나아가는 사람이 진보적인 수녀 메리 그레이스(다이애나 애그론). 그레이스는 고집불통인 원장의 횡포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원장의 적이 되다시피 한다. 마침내 캐슬린이 정식 수녀가 되는 의식이 열린다. 라스트 신이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림자와 빛을 잘 사용한 촬영과 고전 합창곡과 현대음악을 고루 쓴 음악도 좋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빛나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다. 고참 리오를 비롯해 신인 배우들의 연기가 깊이가 있고 엄숙하며 고요하게 빛을 발한다. 여류 매기 베츠의 감독 데뷔작으로 그가 각본도 썼다. 적극 관람을 권한다. 성인용. ★★★★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서버비콘(Suburbicon)


가드너(오른쪽)와 로즈의 평온한 삶은 심야강도에 의해 파괴된다.

코엔 형제 각본·클루니 감독… 치정살인 미스터리·인종차별 섞인 블랙코미디


유혈 낭자하고 사체가 쌓이는 블랙 코미디의 장인들인 코엔 형제가 각본을 쓰고 조지 클루니가 감독을 한 치정살인을 둘러싼 미스터리와 인종차별을 다룬 드라마인데 완전히 다른 두 영화를 잘못 섞어놓은 것처럼 생경하다. 
겉으로는 멀쩡한 백인들의 인종차별과 우월의식을 넌센스 코미디 식으로 가차 없이 우습게 풍자한 내용과 치정을 둘러싼 보험금을 노린 살인극이 물에 기름 탄 것처럼 서로 겉돌고 있다. 빅 스타들이 나와 그들의 이미지와 다른 연기를 하는 희한한 영화다. 
1959년 미국의 어느 급조한 스필버그 영화의 마을 같은 교외의 백인 동네. 하얀 담장에 새로 지은 집들이 나란히 줄지어 선 이 동네에 어린 아들을 둔 흑인 부부가 이사 오면서 평소 이웃에게 친절하고 상냥하던 백인들의 타 인종에 대한 증오심이 타오른다. 
이들과 다른 가족이 라지 가족. 다소 비만하고 안경을 쓴 가장 가드너 라지(맷 데이먼)는 회사 재무담당 사원으로 겉으로는 선하게 보이나 속은 검다. 그의 부인 로즈(줄리안 모어)는 윌체어에 의지해 사는데 둘 사인엔 어린 아들 닉키가 있다. 이 집의 또 다른 구성원이 로즈의 쌍동이 자매 마가렛(모어). 진보적인 라지 가족은 닉키를 이웃인 흑인 가족의 아들과 놀도록 한다.
어느 날 밤 두 명의 괴한이 라지 집에 들어와 로즈를 살해하고 달아난다. 졸지에 어머니를 잃은 닉키를 자기 아들처럼 극진히 돌보는 것이 마가렛. 로즈의 생명보험금이 지불되기 전 보험회사로 부터 로즈 죽음에 대해 조사를 하려고 버드 쿠퍼(오스카 아이작)가 라지네 집을 방문한다. 이어서 유혈 낭자한 폭력과 살인이 일어난다. 끔찍한데도 킬킬대고 웃게 되는데 이런 설정이 코엔 형제의 ‘화고’를 연상시킨다. 
이런 살인 미스터리와 함께 백인 주민들의 흑인 이웃에 대한 증오심이 폭발하면서 방화와 폭력이 자행된다. 그리고 여기에 남군기가 등장한다. 클루니는 평소에 내면에 잠복해 있다 때가 되면 고개를 드는 점잖은 중산층 백인들의 위선과 인종차별을 다소 젠체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시사성이 있는 내용과 흥미 위주의 다크 코미디를 범벅했으나 가상한 뜻만큼 내용이나 연출이 따르질 못한다. 볼만한 것은 데이먼과 1인2역의 모어의 연기로 특히 데이먼이 겉은 순진해 보이나 속에 감춘 불만과 한이 있는 남자의 연기를 능청맞게 잘한다. R등급.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7년 10월 23일 월요일

‘BPM’


션이 거리 시위에서 격렬하게 춤을 추고 있다.

1990년대 파리 동성애자들 AIDS 퇴치투쟁과 우정·사랑


영화제목 ‘BPM’은 심장의 박동률(Beats Per Minute)을 뜻하는 것으로 AIDS로 수많은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쓰러져가던 1990년대 파리에서 있었던 저항단체 ‘액트 업’(ACT UP)의 활동과 회원들 간의 투쟁과 우정과 사랑을 그린 훌륭한 드라마다. 
시대에 뒤떨어진 감이 있고 대사와 나오는 인물들이 너무 많고 근 2시간 반 가량의 상영시간을 이어가면서 폭발적인 마지막 30분이 오기 전까지 진행 속도가 다소 처지는 감이 있긴 하나 신념과 정열과 확신으로 가득 찬 급박하고 맹렬한 작품이다.
노골적인 동성애 장면이 있어 모든 사람에게 어필할 영화는 아니지만 영화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사회적 정치적 의미와 함께 뛰어난 연기 그리고 작중 인물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넘치는 감독의 배려가 가슴에 와 닿는다. 실제로 ‘액트 업’의 회원이었던 로빈 캄필로 감독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당시 프랑스에서 AIDS에 감염되는 사람은 연 6,000명으로 이는 영국과 독일의 두 배가 되는 수치다. 이런데도 그 대응에 지지부진한 프랑수아 미테랑 정부와 치료약 개발에 박차를 가하지 않는 제약회사들에 저항하고 또 이들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생긴 것이 ‘액트 업’이다. 
차분하고 실제적인 티보(앙트완 레나르)가 회장으로 있는 ‘액트 업’의 열띤 토론 장면으로 시작된다. 강경파와 온건파들 간에 격한 토론이 벌어진다. 영화는 많은 이런 토론 장면과 함께 회원들 간의 개인적 관계 그리고 이들이 겪는 공포와 무기력감 및 근접성과 서로 간에 보여주는 부드러움을 교차해 가면서 진행되는데 불쑥불쑥 격렬한 시위와 파괴 장면이 이에 섞여든다. 지적이요 감정적인 연출 솜씨인데 조금 지적인 쪽으로 기울고 있다. 
여러 인물들 중에 중심인물이라 할 만한 사람은 AIDA환자로 극단적인 션(나우엘 페레스 베스카야르)과 나산(아르노 발라). AIDS에 감염은 안 됐지만 단체에 새로 가입한 나산과 션은 서로가 첫 눈에 가까워지면서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두 사람의 사랑과 육체적인 정열 그리고 션의 궁극적 죽음이 가슴 메어지게 절실하게 그려졌다.
이들은 시위와 함께 고등학교를 방문해 학생들에게 콘돔을 나눠주고 또 고무 파우치에 가짜 피를 담아 제약회사에 쳐들어가 사방팔방에 뿌린다. 물론 경찰에 체포되나 이들에겐 그것이 오히려 큰 선전이 된다. 
AIDS로 인한 속도 느린 죽음이 처음으로 아이 같은 얼굴의 제레미(아리엘 브론스틴)를 통해 묘사되는데 이와 함께 션의 상태 악화가 거의 보기 힘들 정도로 자세히 그려진다. 션을 돌보기 위해 아파트까지 옮긴 나산의 사랑과 지극한 간호가 감동적이다. 갈수록 면역력이 떨어지는 션의 절규가 처절하다. 
조용하게 가슴을 때리고 들어오는 장면은 나오는 인물 들 중의 한 사람이 선택한 약물에 의한 자살. 감상적이지 않고 민감하게 처리됐는데 그가 죽은 뒤 그의 집을 찾아온 조문객들의 슬픔이 배제된 클로스 업 된 얼굴들이 통곡보다 더 강하게 느껴진다. 앙상블 캐스트의 조화와 극적 열기는 좋지만 그 반면 개개인의 묘사가 약화됐다. 그러나 베스카야르와 발라의 연기가 출중하다. 촬영과 박진한 전자음악도 좋다.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스노맨’(The Snowman)


형사 해리 호울은 자기 가족까지 위협하는 킬러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눈사람 살인예고 ‘연쇄킬러’ 잡아라… 호화 출연진이 펼치는 스릴러


흐리고 춥고 눈 덮인 노르웨이를 무대로 벌어지는 연쇄살인 사건을 파헤치는 술꾼 형사와 아름다운 동료 여형사의 스산하고 으스스한 스릴러인데 보기에는 말끔하고 제대로 가다듬어졌으나 스릴러의 필요조건인 서스펜스와 스릴이 모자란다.
노르웨이 작가의 베스트셀러를 스웨덴감독 토마스 알프레드슨(‘렛 더 라이트 원 인’)이 연출하고 국제적 올스타 캐스트가 나오는데 플롯과 대사가 어디서 많이 본 영화를 모방한 듯이 구태의연한데다가 배우들 간의 화학작용이나 연기도 탐탁치 못하다. 결정적 잘못은 범인이 누구인지를 영화 중간 쯤 가서 알 수 있는 것. 알프레드슨은 이런 부실을 감추려고 공연히 여러 가지 교란작전을 쓰고 있다. 
오슬로에서 젊은 어머니들이 살해된다. 범인은 살인 전에 표적의 집 앞에 눈사람을 만들어 놓는다. 이를 수사하는 형사가 줄담배에 호주가로 규칙을 무시하는 제멋대로 형의 해리 호울(마이클 화스벤더). 여기에 새로 전근 온 아름다운 여형사 카트린 브렛(레베카 퍼거슨)이 합류한다.
둘은 수사를 통해 현재 사건이 수십 년 전에 발생한 미제 살인사건들과 함께 오슬로 외의 다른 도시와도 관계가 있다는 것을 캐낸다. 그리고 백만장자 사업가 아르베 스톱(J.K. 시몬즈)과 오래 전에 엽총 자살(?)한 또 다른 술꾼 형사 거트 라프토(발 킬머) 등이 이 사건에 연루됐음도 드러난다.
호울은 이혼한 전처 라켈(샬롯 갱스부르)과 라켈의 아들과 다시 화해하려고 애를 쓰는데 킬러가 자기 가족을 위협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사적으로도 킬러를 잡으려고 혈안이 된다. 이와 함께 브렛의 비밀도 밝혀진다. 브렛은 개인적으로 복수를 하기 위해 킬러 체포에 매달린다.
그리고 살인자는 호울에게 편지를 보내 호울을 희롱한다. 통속적인 스릴러의 모양새를 지닌 마지막 부분에 이은 결말 처리도 미숙하다.
긴장감 있고 스릴 가득한 영화로 만들 수 있는 소재를 평범하게 처리해 심심하다. 인물들의 묘사도 깊이가 모자라는데 연기파인 화스벤더의 연기도 공연히 심각하다. 그와 퍼거슨 간의 콤비에도 열기가 부족하다.
이 밖에 희생자 중의 한 사람으로 나오는 클로에 세비니와 형사반장 역의 토비 존스 그리고 시몬즈와 갱스부르 등도 다 제대로 사용되질 못했다. 특히 어색한 것은 킬머(‘탑 건’)의 모습과 연기다. 오래간만에 보는데 자다 막 일어난 사람같이 군다. 그러나 이런 결점에도 불구하고 시간 보내기엔 적당한 영화다. R등급. Universal.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하비의 ‘캐스팅 카우치’

할리웃에는 ‘캐스팅 카우치’(casting couch)라는 말이 있다. 스튜디오의 막강한 권력을 쥔 사장과 제작자와 감독들이 배역을 미끼로 자기들의 사무실 카우치에서 젊은 여성 스타지망생들로부터 섹스를 제공 받은 것에서 온 말이다.  할리웃 황금기 콜럼비아사의 해리 콘 사장이 그 중 한 사람이다.
이 카우치는 할리웃의 생성과 함께 있어온 것으로 얼마 전에 만난 더스틴 호프만도 “50년 전에 내가 배우생활을 시작했을 때도 그 것은 있었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캐스팅 카우치’ 얘기는 조지 페파드가 영화사사장으로 나와 자기에게 섹스를 제공한 여자들을 스타로 만들어주는 야한 드라마 ‘카펫배거스’에서도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캐스팅 카우치’ 때문에 지금 할리웃의 뜨거운 화제 거리가 되고 있는 사람이 명제작자 하비 와인스틴(65^사진)이다. 그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지난 수십 년 간에 걸쳐 애슐리 저드, 그위니스 팰트로 및 앤젤리나 졸리 등 수많은 여배우들을 성적으로 희롱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와인스틴은 삽시에 인디영화의 거목에서 섹스치한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와인스틴은 자기가 회장으로 있던 와인스틴영화사와 함께 아카데미로부터도 퇴출당했다.
와인스틴은 동생 밥과 함께 영화사 미라맥스의 창업주로 남들이 다루기를 꺼려하는 주제와 개인적 비전이 뚜렷한 감독의 영화를 서슴없이 만들면서 인디영화를 흥행서도 성공시킨 인디영화의 제우스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의 영화들은 총 300여개의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는데 오스카 작품상을 탄 ‘영국인 환자’ ‘사랑에 빠진 셰익스피어’ ‘시카고’ 및 ‘왕의 연설’ 등이 다 그의 영화들이다.
와인스틴은 자기 추행이 폭로되자 “나는 요즘과는 판이한 1960년대와 70년대의 풍토에서 자랐다”면서 어설픈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는 옛날에 직장의 힘 있는 남자들이 자기 밑의 여자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았던 풍토를 말한다. 1950년대와 60년대 맨해탄의 광고계 실태를 그린 TV시리즈 ‘매드 멘’을 보면 여자들은 비서직만 얻어도 큰 성공이요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선 자기 상사에게 섹스를 제공하는 일은 당연지사로 그려졌다.
할리웃에서 권력 있는 남자들이 여배우들이나 부하 여직원들을 성적으로 희롱하는 일은 ‘공개된 비밀’이나 마찬가지다. 지금 할리웃에선 와인스틴 스캔들로 인해 가슴이 섬뜩한 영화사 간부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또 이런 일은 할리웃 뿐 아니라 미 산업 전반에 걸쳐 일어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캐스팅 카우치’ 사건은 비단 할리웃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지난 2009년 떠오르는 스타 장자연이 매니저의 압력으로 감독을 비롯해 화사사장 등에게 섹스를 제공하고 술시중 등을 들다가 심한 우울증에 빠져 29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사건 후 한 인권단체가 여배우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조사대상 중 60%가 출세를 위해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라는 압력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캐스팅 카우치’가 지금까지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는데는 명성과 부를 위해선 어떤 대가도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 일부 젊은 스타지망생들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왕년의 할리웃에서 와인스틴과 같은 비행을 하고도 멀쩡히 살아남은 사람 중의 하나가 알프렛 히치콕이다. 히치콕은 자기 영화 ‘새들’과 ‘마니’에 기용한 금발미녀 티피 헤드렌에게 끈질기게 성적으로 추근거리다가 거절당했다. 내가 헤드렌과 만났을 때 그는 “그 후로 내 할리웃 생애가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번 와인스틴 추행사건에 대한 희생자들의 폭로가 뒤늦은 이유도 이런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할리웃은 겉으로 보기엔 진보적이지만 또래들끼리 똘똘 뭉치는 폐쇄된 동네여서 한 배우가 영화사의 눈밖에 벗어나면 다른 영화사들로 부터도 금기인물 취급을 받게 마련이다. 이런 동네이니 만큼 동료의 비행을 알면서도 너도 나도 ‘나 모르쇠’하는 것도 관례처럼 됐다.
나는 와인스틴을 몇 차례 만났는데 스모선수 같은 체구에 위압적인 인상이었지만 영화에 대한 사랑 하나만은 지극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왕년의 명제작자들로 영화 사랑이 극진했던 새뮤얼 골드윈, 데이빗 O. 셀즈닉, 대릴 F. 재눅 등에 비유 됐었다. 그러나 그는 성질이 고약해 욕설을 밥 먹듯이 내뱉고 자기 목표를 위해선 공갈과 협박도 서슴지 않아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었다.
“나는 유명해 여자들을 마구 더듬어도 된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나라에서 와인스틴의 추행은 사실 경악할 일도 아니다. 이번 스캔들로 할리웃에서 ‘캐스팅 카우치’가 완전히 사라질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이 동네의 물이 어느 정도 맑아질 것만은 사실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