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5월 4일 월요일

‘바다의 침묵’




프랑스의 명장 장-피에르 멜빌(원래 성은 그룸바하로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 허만 멜빌의 성을 땄다)은 과묵한 터프가이들의 운명적이요 어두운 범죄세계를 좋아해 여러 편의 갱스터 범죄드라마를 만든 불치의 로맨티스트였다.
미국의 갱스터 소설과 필름 느와르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멜빌의 반영웅적인 범죄자들은 우정을 자기 목숨보다 더 중시하는 아름다운 고독자들이다. 이들의 우정은 순결한 감정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는 사나이들의 약속이나 마찬가지이다. ‘사무라이’(Le Samourai 1967)의 우수에 깃든 암살자(알랑 들롱)와 ‘도박사 밥’(Bob the Gambler·1955)의 은발의 도박사(로제 뒤세스네)가 다 그런 인물들이다. 그의 또 다른 멋진 갱스터영화로는 ‘고발자’와 ‘붉은 서클’ 등이 있다.
그러나 죽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이들 범죄자들을 사랑하던 멜빌의 데뷔작은 범죄와는 거리가 먼 시적 아름다움과 슬픔으로 가득한 ‘바다의 침묵’(The Silence of the Sea·1947·사진)이다.
저널리스트였던 장 브뤼에르가 베르코르라는 필명으로 나치 점령 하의 파리 교외에 살 때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쓴 단편소설이 원작이다. 베르코르는 이 책을 1942년 나치의 눈을 피해 지하 출판했는데 프랑스 시민들의 나치에 대한 저항의 성경으로 사랑을 받았다.
나는 앙드레 지드의 글을 연상케 하는 이 책을 내가 잠시 다닌 서강대학 1학년 때 읽었다. 그 때 나는 따스한 봄볕을 받으며 교정의 잔디 위에 누워 시를 읽으면서 애매하고 몽롱한 삶을 살 때였다. 어느 날 같은 영문과에 다니던 황씨 성을 가진 여학생이 느닷없이 내게 “이 책 한번 읽어 봐”라며 건네준 것이 ‘바다의 침묵’이었다. 큰 키에 긴 생머리를 한 그녀는 내가 좋아한 소녀였다.
‘바다의 침묵’은 1941년 프랑스의 한 작은 마을을 관할하는 음악가 출신의 이상적이요 지적인 독일 장교 베르너 폰 에브레낙과 그가 묵고 있는 집의 주인인 초로의 남자와 그의 젊은 질녀가 주인공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폰 에브레낙의 독백으로 서술된다.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은 에브레낙은 매일 저녁 노신사와 그의 질녀가 앉아 있는 거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벽난로 앞에 서서 두 사람을 내려다보면서 독백을 시작한다. 자신의 청춘과 음악과 책과 프랑스 문화에 대한 사랑을 마치 시를 읊조리듯 얘기한다.
그런 그를 노신사와 질녀는 각기 책을 읽고 뜨개질을 하면서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두 사람은 침묵으로 나치의 침략에 대해 저항하는데 방안을 가득 채운 바다의 무게 같은 침묵이 벽시계의 추소리에 의해 해심을 더욱 파고든다.
폰 에브레낙의 독백 중에서도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이 독일의 음악 자랑이다. 그는 “프랑스하면 몽테뉴, 라신느, 몰리에르 그리고 위고 같은 문인들로 유명하지만 독일하면 음악가들이지요. 바흐, 헨델, 모차르트. 베토벤 그리고 바그너.” 그리고 그는 방에 있는 하모니움으로 바흐의 프렐루드와 퓨그 제8번을 치면서 “이것은 인간을 초월한 음악이지요. 신의 존재처럼 날 채우는 음악입니다”라며 바흐를 찬양한다.
폰 에브레낙의 독백은 눈을 아래로 내려 깐 채 그의 존재조차를 무시하는 노신사와 질녀의 침묵에 휩싸여 거의 초현실적인 주문처럼 들린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렇게 폰 에브레낙을 침묵으로 거부하고 또 그를 마치 귀신이나 되듯 취급하던 노신사와 질녀의 가슴에 그에 대한 존경의 념이 서서히 일어난다. 그리고 폰 에르낙과 질녀 간에 애매모호한 감정이 아기 눈 뜨듯 한다. 이런 둘의 관계가 폰 에브레낙이 좋아한다는 얘기인 ‘미녀와 야수’를 생각나게 한다.        
독일과 프랑스의 문화적 융합이라는 자신의 이상이 나치 하에서는 허상임을 깨달은  폰 에브레낙이 자원해 러시아 전선으로 떠나기 전날 밤 질녀에게 “아디외”하면서 마지막 작별을 고한다. 이에 비로소 질녀도 “아디외”하고 처음으로 말문을 연다. “아디외”가 바다의 침묵에 잔물결을 일으킨다.
영화 ‘바다의 침묵’(프랑스 제목 ‘Le Silence de la Mer’)은 영화에 시혼을 가미한 미니멀리스트 멜빌이 흑백 속에 잡아 가둔 침묵의 소리와도 같은 작품이다, 거의 영화화가 불가능한 내용(멜빌은 이 영화를 ‘반영화’라고 했다)을 행동과 동작을 배제한 채 이미지와 독백과 침묵을 결합해 아름답고 순수하고 또 슬프게 그렸다. 장소도 폐쇄된 공간(베르코르의 집에서 찍었다)이어서 바다의 침묵의 압박감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무겁다.
멜빌의 영향을 받은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바다의 침묵’은 역시 이 영화로 데뷔한 촬영감독 앙리 드카에의 엄격한 흑백촬영이 아름답다. 그리고 세 인물 역을 맡은 배우들도 훌륭하다,
폰 에브레낙 역의 하워드 버논은 언어로 연기를(카메라가 가끔 그의 손 움직임을 통해 그의 느낌을 보여준다)하는 셈인데 노신사 역의 장-마리 로뱅과 질녀 역의 니콜 스테판은 무표정의 연기다. 스테판의 깨끗한 옆모습과 호수처럼 맑은 눈이 버논의 독백에 침묵으로 반향을 일으키면서 소리와 무성의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바다의 침묵’이 크라이티리언(Criterion)에 의해 DVD로 나왔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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