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7년 9월 4일 월요일

총독의 저택(Viceroy‘s House)


마운트배튼 총독이 간디(왼쪽)와 인도 독립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가운데는 총독부인 에드위나.

인도 독립 서사시, 엉성한 구성으로 몰입 떨어뜨려


1947년 8월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직전 이 역사적 절차를 순조롭게 진행시키기 위해  인도 총독으로 부임한 루이스 마운트배튼 경(휴 본느빌)의 실화를 허구와 섞어 만든 화사한 시대극으로 ‘베컴처럼 차라’를 감독한 인도계 미국 여류감독 구린더 차다가 연출했다. 
옛날 영화식의 대하 서사극으로 앙상블 캐스트와 현지 촬영을 비롯해 의상과 세트 등 표면적으로는 잔칫상처럼 화려하고 풍성하나 연출 능력이나 내용은 다소 진부하고 감정적으로나 극적으로도 깊이가 모자란다. 언뜻 보기엔 ‘인도로 가는 길’을 연출한 데이빗 린의 작품을 연상시키나 광범위하고 파란만장한 얘기를 너무 소심하고 곱고 깨끗하며 또 피상적으로 다뤄 극적 충격이 약해 작품 안으로 몰입이 제대로 되질 않는다.  
영화는 정치적 내용과 함께 340개의 방이 있는 총독의 저택 내 지배 계급과 하인 계급의 얘기를 ‘위층 아래층’ 식으로 다뤄 역시 본느빌이 나온 영국 드라마 시리즈 ‘다운턴 애비’를 생각나게도 한다.  
합리적이요 진보적인 마운트배튼 경은 아내 에드위나(질리안 앤더슨)와 함께 뉴델리 총독 저택에 여장을 풀자마자 인도 독립 문제 논의에 들어간다. 문제는 인도를 한 국가로 독립시키느냐 아니면 힌두족이 대다수인 인도로부터 회교도들을 분리시켜 2개의 국가로 독립시키느냐 하는 것. 이를 놓고 총독은 간디(네라지 카비)와 네루(탄베르 가니)와 연쇄 회담을 벌이면서 아울러 회교도 대표인 모하메드 알리 지나(덴질 스미스)와도 회담을 갖는다.
이와 함께 저택 밖 세상에서는 힌두교들과 무슬림들 간에 유혈 폭력이 일어나면서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이런 갈등은 저택 내 하인들에게까지 번진다. 이에 마음이 다급해진 총독은 인도를 두 국가로 나누기로 결정하고 영국으로부터 변호사 시릴 래드클립(사이먼 캘로)을 불러들여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국경을 그리도록 시킨다.
이런 정치적 얘기와 함께 총독을 비롯한 지배 계층과 이들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의 일상이 묘사되면서 뜬금없이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사랑의 얘기가 끼어든다. 마치 밖에서의 힌두교 대 무슬림의 갈등에 대비시키기라도 하려는 듯이 저택 내 하인층인 힌두 청년 지트(머니시 다얄)와 무슬림 처녀 알리아(후마 쿠레시) 간의 사랑이 묘사되나 이는 상투적인 당의정 식의 곁가지다.
격동적인 실화를 다룬 영화로선 얘기의 결이나 구성이 엉성한데 장려한 드라마가 되기보다는 공손한 소프트 오페라가 됐다. 그리고 인물들의 성격 개발이나 그들이 작품에 얹는 무게도 실하지 못하다. 좋은 소재를 충분히 살리진 못했으나 볼 만은 하다. 영국과 인도의 베테랑 스타들인 마이클 갬본과 지난 1월에 사망한 옴 푸리가 나온다. 그런데 바람둥이인 에드위나는 네루와 정사를 벌였고 마운트배튼도 정부가 있었다고 한다.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폴리나(Polina)


폴리나(오른쪽)가 아드리앙과 함께 댄스훈련을 받고 있다.

“꿈을 찾아서…” 발레리나의 고뇌·피와 땀 그려


독립심 강한 발레댄서의 자아 추구를 직선적이면서 약간 기록영화 식으로 다룬 프랑스영화로 감독과 주·조연 배우가 다 실제로 발레를 연마한 사람들이다. 발레영화로 뛰어나 것은 ‘분홍 신’과 ‘흑조’가 있는데 이 영화는 이 둘의 수준에 이르진 못하나 댄서의 고통과 고뇌와 인내 그리고 피와 땀을 진지하고 흥미 있게 다뤘다. 특히 전통 발레와 현대 무용을 표현한 안무가 볼만하다. 바스티앙 비베의 그래픽 노블이 원작.
공산체제 하 소련의 한 공업도시에서 가난한 부모와 함께 사는 소녀 폴리나(베로니카 조브니츠카)는 발레학교 오디션을 통과해 엄격한 스승(알렉세이 쿠스콥)으로 부터 강훈련을 받는다. 폴리나는 귀갓길에도 즉흥적으로 댄스를 하면서 즐거워하는 타고난 댄서다.
이어 10대가 된 폴리나(아나스타시아 쉐브초바-실제로 마린스키 발레단원이었다)는 저명한 볼쇼이 발레단 오디션을 앞두고 현대무용을 보고나서 자신의 예술적 본능을 추구하기 위해 함께 댄스를 수련한 프랑스 청년 아드리앙(닐스 슈나이더)과 함께 프랑스로 간다. 틀에 박힌 전통 무용을 탈피해 즉흥적이요 살아 있는 현대적인 댄스를 배우겠다는 욕심에서다
여기서 폴리나는 아드리앙과 동거하면서 자유혼을 지닌 현대 무용가 리리아(연기파 베테런 쥘리엣 비노쉬도 실제로 발레를 수련했다)로 부터 강훈련을 받는다. 몸에 상처가 나고 발톱이 뭉개지는 고된 수련이다.
그러나 부평초 같은 폴리나는 리리아가 약속한 ‘백설 공주’의 프리마 돈나 역을 다른 사람에게 주자(자기 탓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벨기에 안트웝으로 이주해 바에서 일한다. 그리고 거리의 생활과 전자음악으로 부터 영감을 취하는 즉흥적 댄스단체에 들어간다. 폴리나는 비로소 여기서 춤을 추면서 자신의 예술적 욕망을 만족시킨다.          
재능 있는 젊은 여인의 자기 음성을 찾는 이야기의 서술 과정이 고르지 못하고 주인공의 내면 묘사가 약하긴 하지만 쉐브초바의 단단한 연기와 함께 다채로운 안무로 꾸며진 댄스 장면이 볼 만하다. 발레리 뮐러와 프랑스 안무가 앙젤린 프레료카 공동 감독. PG.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프랑스 영화 ‘구멍’ (Le Trou·1960) 복원

롤랑이 하수구 벽을 뚫으면서 시멘트 조각들을 나르고 있다

탈옥 준비과정 사실적 묘사 조마조마


시몬 시뇨레와 세르지 레지아니가 공연한 어두운 러브 스토리 ‘황금 투구’(Casque d‘Or·1952)와 장 가방, 리노 벤투라 및 잔느 모로가 나온 갱스터 영화 ‘황금에 손대지 마라’(Touchez Pas au Grisbi·1954)와 같은 걸작을 만든 프랑스의 자크 베케 감독이 1960년에 만든 흑백영화 ‘구멍’(Le Trou)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긴장감 팽팽한 교도소 탈출 이야기다. 
베케는 5명의 탈출을 시도하는 미결수들 역에 주로 비배우들을 썼는데 영화 처음에 카메라를 향해 “이것은 내 친구 자크 베케가 내 실화를 영화로 만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실제 탈출을 기도한 롤랑 바르바(무대 이름 장 케로디)다. 또 베케는 바르바와 함께 탈출을 시도한 미결수 중 2명을 기술 자문으로 고용해 영화의 사실성을 극대화 했다. 
프랑스 갱영화의 거장 장-피에르 멜빌이 “사상 가장 위대한 프랑스 영화”라고 칭찬한 작품으로 또 다른 프랑스 영화계의 거장 장 르놔르에 사사한 베케는 영화 촬영이 끝난지 몇 주 후 53세로 요절했다. 원작은 조제 지오반니가 탈옥 시도를 소설로 쓴 ‘탈출’(The Break)로 베케는 처음에 이 사건을 신문에서 읽고 영화화를 생각했다고 한다. 
1947년 파리의 상테 교도소. 터프 가이들인 중범자 미결수 롤랑 다르방(장 케로디)과 마뉘 보렐리(필립 르로이) 그리고 별명 ‘각하’로 불리는 보슬랑(레이몽 뫼니에)과 제오 카신(미셸 콩스탕팅) 등이 수감된 좁은 방에 아내 살해 미수범으로 기소된 젊은 클로드 가스파르(마르크 미셸)가 이감돼 들어온다. 
롤랑 등은 그 때 탈옥을 기도하던 중이어서 마지못해 클로드에게도 그 계획을 말하는데 이에 클로드도 함께 탈출하겠다고 동의한다. 롤랑 등은 먼저 나무로 된 감방 바닥의 일부를 뜯어낸 뒤 안 쓰는 침대의 철제 골조를 뜯어 망치로 사용해 나무 바닥 밑의 시멘트를 뚫기 시작한다. 마침 이들이 있는 동이 공사 중이어서 망치로 시멘트를 강타하는 소리를 막아준다.
건장한 남자들이 사제 망치로 온 힘을 다해 시멘트를 까부수는 장면을 카메라가 오래 동안 집요하게 붙잡고 늘어지면서 보는 사람마저 온 몸의 근육이 당겨지는 압박감을 느끼게 하는데 영화는 전혀 음악 없이 실제 소리만을 써 사실감이 극에 이른다. 한 사람이 시멘트를 강타하는 동안 다른 한 사람은 손거울을 깬 파편을 칫솔 끝에 감아 잠망경 식으로 감시구멍을 통해 복도의 상황을 탐지한다. 
교도소 내 시설과 숟가락 등 온갖 소지품으로 탈출용 도구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 과묵한 롤랑으로 그는 주도면밀하고 침착하고 하는 일에 능숙하다. 그와 역시 말수가 적은 마뉘가 팀의 리더 구실을 한다. 
시멘트 바닥이 뚫리면서 롤랑과 마뉘는 좁은 통로를 기어 쇠로 된 창살을 끌로 자르고 넓은 지하 공간으로 진출한다. 그리고 순찰하는 교도관들을 피해 숨어가면서 사제 열쇠로 문을 열고 하수구로 내려간다. 이제 마지막 남은 공사는 하수구의 시멘트벽을 뚫고 외부 세계로 나가는 것. 하수구와 감방 사이의 거리가 멀어 벽을 뚫는 사람들은 사제 모래시계로 시간을 잰 뒤 감방으로 달려가 다음 사람을 깨운다. 이 모래시계는 ‘각하’가 엄살을 부려 교도소 내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훔쳐온 2개의 주사액 병으로 만들었다. 
마침내 벽에 구멍이 뚫리고 이제 남은 것은 야반 탈출뿐이다. 롤랑 등은 정장에 타이를 매고 구두를 닦아 신은 뒤 담요를 뒤집어쓰고 자는 척 한다. 순찰이 끝나면 탈옥할 예정이다. 
그런데 교도소장이 클로드를 불러 클로드의 아내가 소를 취하해 얼마 안 있어 출소할 수 있다고 통보하면서 일행의 탈출 시도에 난관이 생긴다. 과연 클로드는 동료들의 탈출 계획을 교도소장에게 고발할 것인가 아니면 동료애를 지킬 것인가.
남자들의 탈출을 위한 일거수 일투족과 지극히 세밀한 부분까지도 정확을 기하려고 신경을 쓴 노력이 역력한 영화로 대부분 좁은 공간에서 진행돼 협소감에 호흡하기가 힘들 정도다. 베케는 마뉘의 단단한 근육질의 벗은 상반신처럼 군더더기를 일체 배제하고 미결수들의 강인하고 치열한 탈출 시도를 물고 늘어지듯이 묘사했다. 그래서 보고 있으면 괴로울 정도로 고단함을 느끼게 된다. 
또 영화는 브로맨스 영화라고도 하겠다. 협소한 감방 안에서 동거하는 사나이들의 동지애가 믿음직한데 이런 과묵하고 듬직한 사나이들이 풍기는 묵직한 분위기를 ‘궁정의 광대’역을 맡은 ‘각하’의 유머가 다정하게 다독여준다. 
영화의 단순하고 꾸밈없는 스타일은 프랑스의 명장 로베르 브레송의 솜씨를 생각나게 하는데 특히 브레송의 감옥 탈출 실화를 그린 ‘남자 탈옥하다’(A Man Escaped·1956)를 거의 모방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닮았다. 이 영화는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가 수감된 남자의 탈옥을 그린 것으로 ‘구멍’의 집요한 탈옥을 위한 빈틈없는 준비와 과정 등이 이 영화에서 빌려온 것처럼 유사하다. 
*‘구멍’(★★★★½, 5개 만점)이 새로 복원돼 9월1~7일 화인 아츠(8556 Wilshire Blvd.)에서 상영된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7년 8월 28일 월요일

악녀(The Villainess)


숙희가 자기 딸을 죽인 자가 타고 달리는  버스에 매달려 있다.


 ‘킬러 김옥빈’복수의 화신 열연... 피비린내 진동하는 살육 액션


가녀린 몸매에 예쁘장하게 생긴 김옥빈이 총과 칼과 도끼와 함께 손과 발 등 온 육신을 사용해 닥치는 대로 적을 살해하는 피바다 액션 스릴러로 그에 의해 황천으로 가는 남자들이 족히 백 명은 된다. 피가 끓는 살육과 복수의 영화로 장르 팬들이 박수갈채를 보낼만한데 손으로 들고 찍은 촬영과 쏜살같은 편집으로 인해 보면서 머리가 다 어질어질하다. 
선혈과 총격과 칼부림 그리고 격투를 잘 다루는 한국 액션영화의 특징을 그대로 갖추었고 지나치게 잔인한 또 다른 한국영화의 특성을 과시한 작품으로 한국영화의 결점인 상영시간이 2시간이 훨씬 넘는다. 그러나 플롯이 배배 꼬인 내용과 함께 기술적인 면과 연기 및 인물들의 개발이 잘 된 흥미진진한 영화로 김옥빈의 가공할 액션연기가 장관이다. 올 칸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출품작.
고도로 훈련된 킬러 숙희(옥빈)가 라이벌 갱의 본부를 침입해 좁은 복도를 따라가면서 갱 두목의 졸개들을 권총으로 사살하는 첫 장면부터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올드 보이’의 최민식의 살육을 연상케 하는 이 장면은 순전히 카메라의 눈으로 앞으로 이동하면서 찍었는데 아찔하다. 이어 숙희가 갱두목과 그의 보디가드들과 대결하는 장면에서 얼굴에 선혈이 잔뜩 묻은 숙희의 얼굴이 드러난다. 그리고 숙희는 경찰에 체포된다. 
숙희는 연변출신으로 어릴 때 자기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가 살해된 뒤 갱에 의해 키워지는데 그를 키워 일류 투사와 무자비한 킬러로 만든 사람은 갱 두목 중상(신하균). 그리고 숙희는 중상과 결혼을 하는데 중상이 신혼여행에서 살해되면서 숙희는 복수의 화신이 된다. 
한국의 정보부에 의해 자기도 모르게 성형수술을 당한 숙희는 인정사정없는 팀장 권숙(김서형)에 의해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정보부를 위해 10년간만 일하면 자유의 몸으로 놓아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그리고 킬러의 기술과 함께 연기를 공부한 숙희는 연수라는 가명으로 어린 딸 은혜와 함께 작은 아파트에 살면서 정보부의 행동지시를 기다린다. 연수의 이웃에 젊고 건장한 미남 현수(성준)가 사는데 숙희와 현수는 서로 마음이 이끌려 데이트를 시작한다. 그런데 현수는 숙희의 감시자.  
느닷없이 죽은 줄 알았던 중상이 숙희의 앞에 나타나면서 숙희는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이어 숙희의 아파트에서 은혜를 돌보던 현수와 은혜가 누군가가 설치한 폭탄에 아파트가 폭파되면서 모두 죽자 숙희는 완전히 혈안이 되어 자기가 사랑하던 두 사람을 살해한 범인을 찾아 나선다.
마지막 절정은 숙희가 자신의 철천지 원수가 타고 질주하는 버스에 매달려 버스 안으로 들어가려고 무기로 버스를 찍어내는 장면. 숙희가 이를 악물고 달리는 버스에서 사투를 벌이는 이 장면은 실로 몸 안의 아드레날린을 요동치게 하는 압권이다. 김옥빈 화이팅! 
정병길 감독.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서든 피어(Sudden Fear)


마이라는 자기 남편이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유산 둘러싼 아내 살해음모... 개봉 65주년 맞아 특별상영


할리웃 황금기 수퍼스타 중의 하나였던 연기파 조운 크로포드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돈 많고 아름다우나 고독한 여자로 나오는 1952년 작 걸작 필름 느와르로 로맨틱 멜로드라마이자 서스펜스 스릴러다. 크로포드가 오스카 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그의 남편 역의 잭 팰랜스가 조연상 그리고 찰스 랭이 찍은 음산한 분위기의 흑백 촬영 역시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다. 
원작은 에드나 쉐리의 동명소설.
마이라 허드슨(크로포드)은 브로드웨이의 성공한 극작가. 그는 자기가 쓴 작품의 남자 주인공 선발 오디션에 참가한 젊은 배우 지망생 레스터 블레인(팰랜스)을 로맨틱하지 못하다고 퇴짜를 놓는다. 그런데 마이라가 샌프란시스코의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레스터를 다시 만난 뒤 그의 매력에 끌려 짧은 데이트 끝에 결혼한다.
한편 레스터는 마이라가 유언장을 쓰면서 대부분의 재산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기로 결정한 것을 발견하고 자기의 숨겨둔 옛 애인 아이린 네베스(글로리아 그래암)와 함께 마이라를 살해할 계획을 짠다.     
그러나 마이라가 레스터와 아이린의 음모를 눈치 채고 자기가 이 둘을 살해한 뒤 그 혐의를 아이린에게 뒤집어씌울 계획을 세밀히 짜나 차마 이를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레스터가 마이라의 자기 살해 의도를 깨닫고 마이라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레스터가 차를 몰아 샌프란시스코 거리를 걷는 마이라를 찾아 추적하자 마이라가 이를 눈치 채고 피하나 레스터가 역시 길을 걷던 아이린을 마이라로 오인하고 차를 그쪽으로 몬다. 
이를 본 마이라가 멈추라고 소리를 지르나 때가 이미 늦어 레스터가 모는 차가 아이린을 치고 충돌하면서 두 간부가 함께 죽는다. “둘 다 죽었어”라는 말을 귓전으로 들은 마이라가 샌프란시스코의 밤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긴 안도의 숨을 쉰다.
스타일 멋있고 세련된 전형적인 ‘궁지에 몰린 여인’에 관한 느와르로 플롯이 산뜻하면서도 배배 꼬여 재미가 만점이다. 데이빗 밀러 감독. 영화개봉 65주년을 맞아 29일 오후 7시30분에 화인 아츠극장(8556 Wilshire Blvd.)에서 상영한다. 상영 전에 영화학자 제레미 아놀드의 소개가 있다. ★★★★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수인’


작가 황석영.


나는 작가 황석영(사진)의 파란만장한 삶의 구석구석을 최근에 읽은 그의 두 권짜리 자전 ‘수인’을 읽고서야 알았다. 그의 다사다난한 인생에 관해서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책을 통해서야 그것의 편린들을 통증마저 느끼면서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석영이와 나는 중고등 학생 때 친구로 그의 당시 이름은 수영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수업시간에 공부는 안 하고 노트에 잉크 찍은 펜으로 소설을 썼던 석영이는 경험론자요 행동론자요 투사다. 삶을 실제로 철저히 겪으면서 거기서 얻은 경험을 글로 썼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탑’은 그가 월남전에 파병돼 순찰조로서 겪은 경험이고 후에 영화로도 만들어진 ‘삼포 가는 길’은 그가 노동자의 척박한 삶을 배우기 위해 막노동판에서 일한 경험이다.
재간둥이요 기인인 석영이의 문단(?) 데뷔는 중학생 때 교내 문학콩쿠르에서 그가 쓴 ‘부활이전’이 장원을 하면서다. 그는 여기서 예수를 배신한 유다를 동정의 눈으로 보면서 왜 유다가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풀이하고 있다. 나는 그 때 이 글을 읽으면서 그의 비상한 문재와 함께 소외되고 배척당한 사람의 입장을 옹호하려는 그의 반골정신에 크게 감복했었다. 그는 타고난 앤타이다.
석영이와 나는 비슷한 점이 더러 있다. 그의 어머니와 나의 어머니는 다 이북 태생인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로 두 사람이 모두 혼자서 외아들을 키웠다. 그리고 중국의 장춘과 청도에서 각기 태어난 석영이와 나는 학생시절 영화광으로 학교생활에 염증을 느껴 자주 땡땡이를 깠는데 그래서 두 모친이 툭하면 학교로 호출을 당하곤 했다. 석영이에 따르면 호출 당해 교무실에서 만난 두 모친은 “기도부터 합시다”라고 자식들의 죄의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린 둘 다 중학생 때부터 문학도였다.
석영이의 반골기질이 여실히 드러난 글이 대하 역사소설 ‘장길산’이다. 이 소설은 내가 서울의 한국일보 사회부기자였을 때 석영이가 한국일보에 연재했다. 그런데 바람처럼 살던 석영이가 전남 해남에서 이 글을 쓰면서 툭하면 원고를 안 보내 문화부 담당 선배기자의 속을 무던히도 썩였었다. 석영이는 그러고도 가끔 고료를 받으러 신문사에 나타나곤 했는데 그날이면 난 그로부터 술을 톡톡히 얻어 마시곤 했다.
‘수인’은 그가 군인과 노동자 그리고 이북을 방문해 김일성을 여러 차례 만난 이후 망명자로 이어 귀국해 수인으로서 그리고 작가와 아버지와 아들과 남편으로서 겪은 삶의 희로애락을 학생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과 함께 적었다. 친구로서 그를 잘 알던 나여서 반쯤은 내 얘기 같은 과거가 활동사진처럼 눈앞에서 파노라마쳤다.
월남에 가서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고 노동판에서 뼈마디가 쑤시는 노동을 했고 오랜 타국살이 끝에 귀국해 5년간 옥살이를 한 일들을 현미경으로 보듯이 자세히 적었는데 그의 뛰어난 기억력에 혀를 찼다. 석영이가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고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은 오직 그의 어머니의 기도 탓이리라.
특히 수인으로서의 옥중 생활 얘기가 흥미진진하다. 유명 작가와 정치범으로서 단식과 투쟁을 하면서도 교도관들로부터 대접을 받았는데 교도관들과 함께 이웃 죄수들과의 관계가 마치 교도소영화 보듯이 생생하다. 석영이의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자식들까지도 마음과 몸 고생 많이 했겠다. 석영이도 그래서 글에서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 일종의 반성문이다.
나는 석영이가 미국서 망명 생활할 때 LA에서 그를 한 두 차례 만난 적이 있다. 만나면 술집을 전전하며 옛 우정을 되새기곤 했는데 석영이는 늘 생명감이 넘치고 아이처럼 짓궂었다. 석영이는 천진난만하고 솔직하고 또 작가답게 날카로운 위트가 있어 좋다. 그리고 이번에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은 그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라는 사실. 난 그가 그렇게 유명한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다.
그런데 글에 몇 군데 내 기억과 다른 곳이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본 영화 ‘오케스트라의 소녀’에 관해 석영이는 미지막 장면에서 지휘자 스토코우스키가 지휘봉을 들고 열심히 흔들었다고 했는데 스토코우스키는 지휘봉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월남에서 한국산 K레이션의 김치와 꽁치 그리고 미제 레이션의 햄과 소시지를 섞어 끓인 것을 ‘부대찌개’의 원조라고 적었다. 그러나 ‘부대찌개’의 원조는 6.25 때 내가 부산 피난시절에 맛있게 먹은 미군부대에서 먹다 버린 온갖 음식 찌꺼기를 섞어 끓인 ‘끌꿀이죽’인 것으로 알고 있다. 또 명동에 있던 학생시절 내 단골 음악감상실 ‘돌체’는 드문드문 클래식을 틀기는 했지만 고전음악감상실은 아니고  팝송감상실이었다.                
석영이는 후기에서 책의 제목에 관해 이렇게 썼다. ‘시간의 감옥, 언어의 감옥, 냉전의 박물관과도 같은 분단된 한반도라는 감옥에서 작가로서 갈망해온 자유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이었던가. 이 책의 제목이 ’수인‘이 된 이유가 그것이다.’ 그의 작가로서의 지금까지의 행적은 바로 이 자유에 대한 사랑의 궤적이리라. “석영아, 잘 있지. 보고 싶구나.”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7년 8월 21일 월요일

국(Gook)


일라이는 폭도로부터 신발가게를 지키려고 필사의 노력을 한다. 오른쪽이 카밀라.

“폭동서 가게 지켜라”한인형제-흑인 갈등 사실적 묘사


1992년 LA폭동이 나기 직전과 직후를 시간대로 흑인 거주지 캄튼의 인접지역 패라마운트에서 신발가게를 운영하는 한국인 형제와 인근 흑인 주민들과의 관계를 그린 사실적이요 코믹한 기운이 배어있는 드라마다. ‘국’은 동양인을 멸시해 부르는 말.
한국계 배우 저스틴 전(‘트와일라이트 사가’)이 감독하고 각본을 쓰고 주연도 했는데 그의 피와 땀으로 맺어진 열정과 신념의 작품이다. 꾸밈없이 솔직하고 거칠도록 생생하며 감동적인 영화로 올 선댄스영화제 ‘넥스트 섹션’ 부문에서 관객상을 탔다.
가족과 인종문제 그리고 커뮤니티와의 관계 등을 힘 있고 강력하게 고찰하고 있는데 급박하고 폭력적인 상황 속에서도 유머와 여유 그리고 감상성을 잃지 않고 차분하고 정감 있게 작품을 이끌어 가고 있다. 전 감독의 앞날이 밝아 보인다.
밤하늘에 타오르는 불길을 배경으로 흰 셔츠를 입은 소녀가 춤을 추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영화에서는 후에 두 형제와 이 소녀가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오는데 인종의 벽을 넘어선 아름다운 가족애를 느끼게 된다.
한국계로 책임감이 강한 일라이(저스틴 전)와 그의 ‘인생은 즐기는 것’이라는 생활 태도를 갖고 있는 래퍼 지망생인 동생 대니얼(데이빗 소)은 패라마운트에서 아버지가 세운 여자용 신발가게를 운영한다. 손님은 대부분 흑인. 일라이는 동네 흑인 청년들과 대립관계를 유지하면서 공존하는데 늘 이들의 협박과 폭력의 기운 속에 살고 있다. 누군가가 일라이의 흰 차 본넷에 ‘Gook’이라고 낙서를 한 것이 그 실례다.
 이 가게에 상주하다시피 하는 것이 11세 난 흑인 소녀 카밀라(시몬 베이커). 카밀라는 오빠 키스(커티스 쿡 주니어)의 말을 안 듣고 학교를 땡땡이 치고 가게에 와서 심부름을 하는데 특히 일라이와 가깝다. 일라이와 대니얼과 카밀라는 피부 색깔이 다른 한 가족이다. 그런데 키스는 일라이의 신발가게에 개인적 원한이 있다. 그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신발가게 건너편에서는 해병대 출신의 김씨(저스틴의 친아버지 상 김으로 김씨는 실제로 4.29폭동 당시 사우스 LA에서 경영하던 가게를 약탈당했다)가 리커스토어를 운영하고 있다. 흑인에 대한 불신에 사로잡힌 김씨는 가게에 카밀라가 나타나면 물건을 훔쳐 갈까봐 신경이 곤두서는데 그래서 둘 사이에 F자 상소리가 난무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카밀라의 친 오빠와도 같은 일라이와 김씨 사이에도 F자 설전이 벌어진다. 후에 김씨와 일라이가 담배를 태우면서 화해를 하는 모습이 가슴 싸하니 감동적이다.  
TV를 통해 로드니 킹에 대한 백인경찰들의 구타장면이 계속해 나오고 이어 열린 재판에서 기소된 경찰들에 대해 무죄평결이 나면서 폭동이 일어난다. 폭동의 기운이 서서히 패라마운트로 이동하면서 키스는 동료들과 함께 신발가게에 대한 약탈을 시도한다. 이를 결사적으로 막으려고 하는 일라이와 대니얼과 카밀라. 연기들이 모두 뛰어난데 특히 신인 베이커가 당찬 연기를 한다. 흑백 촬영도 아름답다. ★★★★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