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6년 9월 7일 수요일

모르는 여인(Complete Unknown)


15년만에 앨리스라는 이름으로 나타난 탐의 전 애인(레이철 바이스).

수시로 신원을 바꾸는 수수께끼 같은 여인


우리는 모두 가끔 현재의 자신의 껍질을 벗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해 새 삶을 살고 싶은 환상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의 노예들인 우리에겐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데 이 영화의 주인공인 아름답고 감각적이며 수수께끼 같은 여인 앨리스(레이철 바이스)는 몇 년마다 자기 신원을 바꾸고 삶의 터전도 이동해 가면서 거듭 태어난다. 
매우 의미심장하고 은유적이며 또 얘기가 밤에 일어나는 무드 짙은 드라마로 심리스릴러 분위기마저 지녔다. 일상의 무사안일과 매일 같이 비슷하고 잘 아는 것들을 견딜 수가 없어 변화와 탈출을 시도하는 앨리스의 입장을 십분 이해하겠다. 
영화는 처음에 수년마다 앨리스가 거처를 이동해 가면서 매번 다른 직업을 얻어 다른 사람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홍콩에서는 마술사의 조수로, 미국에서는 떠돌이 히피였다가 응급실 간호사가 되기도 하고 교외에 사는 정장을 한 직장 여성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호주에서 희귀종 개구리를 연구한 과학자가 된다. 이렇게 새 환경에서 다양한 직업을 수행하며 산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인간의 변신욕망을 신비하게 얘기하고 있어 상징적인 것이어서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의회에 제출하는 법안 문구 수정이라는 따분한 일을 하나 뉴욕에서 아름다운 부인 라미나(아지타 가니자다)와 함께 넉넉히 사는 탐(마이클 섀넌)의 생일파티에 탐의 친구가 고혹적으로 아름다운 앨리스를 데리고 나타난다. 그런데 미술가인 라미나가 샌디에고에 직장을 얻게 되면서 탐도 아내를 따라가느냐 아니면 별거하느냐는 문제가 생기는데 두 사람의 관계가 순탄치 않은 것으로 암시된다.   
그런데 탐은 앨리스가 15년 전에 자기를 버리고 떠난 다른 이름을 가졌던 애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도대체 왜 앨리스는 15년만에 불쑥 탐 앞에 나타났는가.
영화의 전반부는 앨리스가 자신의 다양한 삶에 관해 얘기하면서 파티 손님들이 이에 여러 가지로 반응하는 장면으로 진행되다가 후반 들어 앨리스와 탐이 뉴욕의 밤거리를 거닐면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둘은 이 밤의 만보와 대화를 통해 둘이 과거 애인이었을 때로 돌아가는 셈인데 정착해 평범한 남편으로 살고 있던 탐은 이 밤의 여정을 통해 다시 앨리스의 궤적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잠깐이지만 탐은 다시 만난 앨리스를 통해 현재의 껍질을 벗고 변신을 한다. 삽화식으로 섞인 둘이 걷다가 들르게 된 노부부(캐시 베이츠와 대니 글로버) 집에서의 얘기도 흥미 있다. 
카멜레온처럼 끊임없이 변신을 추구하는 앨리스와 현실 정착을 고수하는 탐의 밤의 산책은 새벽이 되어 끝난다. 그리고 앨리스는 탐에게 자기와 함께 떠나자고 제의한다. 바이스의 섹시한 모습과 짙은 연기 그리고 섀넌의 극도로 자제하는 연기가 뛰어난 깊고 선정적인 영화다. 조슈아 마스턴 감독(공동 각본). 성인용.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대양 사이의 불빛’의 알리시아 비칸더




"아직 나이 어린데 벌써 어머니 역만 여섯 번 해"


2일 개봉된 드라마‘대양 사이의 불빛’에서 1차 대전 참전군인으로 호주의 외딴 섬의 등대지기인 남편 톰(마이클 화스벤더)이 주워온 아기를 자기 딸로 키우다가 남편과 함께 비극을 맞게 되는 젊은 아내 이사벨로 나온 알리시아 비칸더(28)와의 인터뷰가 최근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 사무실에서 있었다. 스웨덴 여자로서는 남달리 가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비칸더는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한 귀여운 소녀 모습이었는데 질문에 시종일관 미소를 지으며 액센트가 있는 말투로 차분하게 대답했다. 사적인 물음에는 얼굴에 홍조를 띠며 부끄러워하면서도 활기 있고 명랑한 어조로 꾸밈없이 응했다. 비칸더는 얼마전‘제이슨 본’ 홍보차 맷 데이먼과 함께 서울에 다녀 왔는데 인터뷰 후 필자와 기념사진을 찍을 때“서울서 먹은 비빔밥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며 활짝 웃었다. 그런데 비칸더는‘대양 사이의 불빛’을 찍다가 화스벤더와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비칸더는 올해‘덴마크 여인’으로 아카데미 조연상을 탔다.     

△이 영화에 나오기로 결정한 이유가 무엇인가.
“감독 데렉 시안프란스와 일하고 싶어서다. 나는 데렉의 ‘블루 밸런타인’과 ‘플레이스 비연드 더 파인즈’를 극장에서 두 번이나 봤는데 보기에 쉬운 것들이 아니다. 내 역도 하기 힘든 것으로 이런 도전적이라는 점도 출연에 응한 또 다른 이유다. 그리고 뛰어난 연기자인 화스벤더와 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데렉은 어떤 감독인가.
“그는 매우 구식으로 철두철미한 감독이다.”  

△영화에서 톰은 행복한 사람이 아닌데 이사벨은 그런 남자에게서 무엇을 찾을 수가 있다고 보는가.
“그가 침울한 것은 전쟁 후유증 탓이다. 역시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이사벨은 전쟁에서 돌아온 톰을 영웅으로 보면서 그를 통해 전쟁에 나갔다 돌아오지 않는 자기 가족의 전장에서의 삶을 관찰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사벨은 엄격하고 빈 말을 하지 않는 톰에게 깊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둘이 사랑을 하게 되면서 톰이 걸어 잠근 마음 문이 열리게 된다.”

△톰같은 남자를 좋아하는가.
“믿을 수가 있고 친절하며 무엇이든 내가 하는 일을 지지하는 남자라면 가까이 하고 싶다.”

△외딴 섬에서의 촬영경험이 어땠는가.
“우린 가장 가까운 작은 마을에 가려면 차로 3시간이나 걸리는 섬에서 촬영했다. 내 생전 이렇게 자연 속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문명과 완전히 절연된 고독한 장소로 어떤 등대지기가 미쳐서 나갔다는 말도 들었다. 고독과 함께 밤이면 등대의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사람을 미치게 할 만하다. 기상도 변덕이 심해 매일의 해돋이와 석양의 모습이 달랐고 폭풍우도 여러 차례 경험했다.”  
톰과 이사벨이 사랑의 기운에 흠뻑 젖어 있다.

△마이클과 일한 경험은 어땠는가.
“우린 과거 영화제에서 만난 적은 있으나 진짜로 대화를 나눈 것은 웰링턴에서 있은 이 영화의 리허설 때였다. 그리고 난 처음부터 그와의 콤비가 잘 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 영화는 감정적이요 매우 심오한 작품이어서 두 사람 사이의 잘 맞는 호흡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는 내가 본 그 어느 배우보다 더 용감한 연기자다. 그런데 그가 매우 치열한 배우여서 처음에는 다소 겁이 났다”

△이사벨처럼 어머니가 되고 싶은 생각이 있는가.
“내가 어렸을 때 부모가 이혼해 난 어머니와 함께 오래 살았다. 우린 매우 가까웠는데 그래서인지 난 10대 때부터 가정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난 아직 어린 나이라고 하겠는데 벌써 어머니 역을 여섯 번이나 했다. 난 이 영화에서 아기를 임신하고 또 유산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하려고 세트에서 일하는 여러 어머니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톰과 이사벨은 사랑에 빠지면서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데 당신도 사랑을 하면서 같은 경험을 했는가. 
“모르겠다. 모든 사람의 안에는 다 사랑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난 커서 날 사랑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살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 다른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다. 사랑을 앎으로써 우리는 남을 존경하게 되며 또 내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난 내가 이렇게 배운 것을 남에게 돌려주고 싶다.”

△사랑이 톰과 이사벨을 어떻게 어려운 지경에서도 서로를 연결시켜 주었다고 보는가.
“처음에 둘이 만났을 때 그들은 서로가 달라 충돌했다. 그래서 둘은 아마도 서로가 연결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둘은 서로 모두 같은 정열을 지녔고 삶과 인간성과 사랑의 본질을 추구하고자 하는 강한 동기를 가지고 있어 결합된 것이다. 따라서 둘의 사랑은 뜬 구름 같은 것이 아닌 진짜 지적이며 어른다운 사랑이다.”            

△마이클과 다시 공연할 계획이라도 있는가.
“좋은 감독과 각본이 있다면 다시 함께 일하고 싶지만 현재로선 아무 계획도 없다.” 

△패션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LA에서 활동하면서 자연 그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 것이 스트레스가 돼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재미라고 생각하려고 한다. 그리고 난 옷을 만드는 사람들을 훌륭한 예술가라고 여긴다. 그런데 내 스타일리스트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이다. 그러나 난 보통 때는 그저 편하고 느슨한 옷을 즐긴다.”

△유산하는 장면을 찍기가 힘들었는가.
“그 장면은 영화 내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서 찍기 전에 정말로 안절부절 못했다. 그리고 데렉은 촬영을 간단히 끝내는 감독이 아니어서 그 장면을 찍는데 무려 45분이 걸렸고 그런 장면을 다섯 번인가 여섯 번인가를 반복해야 했다. 한 번 찍고 나면 완전히 졸도할 지경이 되곤 했다.”                

△배우들은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사는데 어디서 사는가.
“지난 5년 전부터 런던에서 살고 있다. 난 나를 유러피안으로 생각한다.”

△삶에서 매우 아끼고 긍정적이며 또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경험은 어떤 것인가.
“삶 전체가 바로 그런 것 아니겠는가. 내가 잃고 이루지 못해 슬퍼하는 일들도 많지만 시간이 지나고 또 그것들과 거리를 두게 되면 과거를 통찰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 새로운 길을 걸으면서 자신이 바라는 것도 이룰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런던에서 살고 LA에서 활동하면서 어느 나라 말로 생각하고 꿈을 꾸는가.
“스웨덴 말인데 영어를 주로 쓰다 보니 모국어마저 서투르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니 어느 한 나라 말도 제대로 못하는 셈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로스 올비다도스(Los Olvidados·1950)


불량배 소년들이 거리의 악사를 희롱하고 있다.

멕시코시티에 사는 가난한 아이들의 삶


스페인의 명장 루이스 부누엘(공동 각본)이 멕시코에서 찍은 멕시코 영화로 영어제목은 ‘The Young and the Damned’. ‘소년들과 저주 받은 아이들’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멕시코시티에 사는 찢어지게 가난한 아이들의 삶을 매우 사실적이요 진지하게 다룬 사회 비판적인 명작이다. 
사회적 사실주의 작품으로 흑백촬영(가브리엘 피게로아)이 뛰어난데 부누엘의 많은 다른 영화들처럼 초현실적인 요소가 가미됐다. 부누엘이 칸영화제서 감독상을 받았다. 당초 부누엘은 멕시코시티에 사는 복권을 파는 소년의 얘기를 만들려고 했으나 제작자의 권유에 따라 내용을 변경했다.  
소년원에서 탈출한 불량배의 리더 엘 하이보는 갱과 함께 거리의 맹인 악사를 털고 악기를 부순다. 이어 엘 하이보는 친구 페드로와 함께 자기를 경찰에 고발한 훌리안을 찾아간다. 훌리안은 자신이 고발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나 엘 하이보는 훌리안을 죽이고 그의 돈을 훔쳐 페드로와 나눠 갖는다. 
페드로는 자기 어머니가 자신에게 크게 실망한 것을 알고 정직하게 살려고 대장간에 취직한다. 그런데 엘 하이보가 찾아와 비싼 칼을 훔치면서 페드로가 누명을 쓰고 교화소에 들어간다. 그는 여기서도 말썽을 피우는데 교화소장이 페드로를 시험하기 위해 그에게 50페소를 주고 심부름을 시킨다.
페드로는 심부름을 제대로 수행할 작정이었으나 길에서 만난 엘 하이보가 페드로로부터 돈을 훔치면서 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난다. 그리고 페드로는 엘 하이보가 훌리안을 죽였다고 소리치면서 엘 하이보는 달아난다. 
이어 다시 만난 두 사람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면서 엘 하이보가 페드로를 죽인다. 그리고 달아나던 엘 하이보는 쫓아온 경찰의 총을 맞고 죽는다. 영화는 페드로의 어머니가 아들을 찾아 거리를 헤매는 장면으로 끝난다. 
내용이 너무 참담해 멕시코 정부가 부누엘에게 압력을 행사, 페드로가 교화소 소장의 심부름을 제대로 수행하고 돌아오는 것으로 된 일종의 해피 엔딩이 있다. ★★★★½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암캐’




순진하고 어리숙한 남자를 유혹해 파멸로 안내하는 여자를 팜므 파탈(femme fatale)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여자의 원조는 아마도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어보라고 꼬드겨 인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이브일 것이다. 그리고 삼손을 영육으로 눈멀게 만든 딜라일라와 호세의 칼에 맞아 죽은 카르멘도 이브의 후예다.
팜므 파탈은 전후 미국에서 크게 유행한 장르인 필름 느와르에서 단골로 나온 주인공들로 그 대표적 여자가 필리스 디트릭슨이다. 로스펠리즈에 사는 필리스 디트릭슨(바바라 스탠윅)은 빌리 와일더가 감독한 ‘이중배상’에서 봉같은 보험 세일즈맨 월터 네프(프레드 맥머리)를 유혹해 보험에 든 나이 먹은 자기 남편을 살해시키는 요부로 팜므 파탈 중에서도 으뜸가는 여자라고 하겠다.
소심하고 순진하기 짝이 없는 모리스가 넋을 잃고 욕정과 사랑에 빠지는 룰루도 영화사에 길이 남을 만한 팜므 파탈이다. 룰루는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피에르-오귀스트 르느와르의 아들로 ‘위대한 환상’과 ‘인간 짐승’ 및 ‘게임의 규칙’ 같은 명화를 만든 장 르느와르 감독의 애욕과 기만과 살인이 뒤엉킨 삼각관계의 치정극 ‘암캐’(La Chienne·1931·사진)의 주인공이다. 원작은 조르지 드 라 후샤르디에르의 소설.
영화는 인형극 속의 인물의 “이 영화는 드라마도 아니요 희극도 아니며 또 도덕적 메시도 없다”로 시작되지만 실은 계급과 신분을 비롯한 사회적 현상과 도덕성을 다룬 코미디 드라마다. 파리 몽마르트르에 사는 회사 경리사원으로 아마추어 화가인 수줍은 모리스 르그랑(미셸 시몽)은 바가지를 긁어대는 아내 아델의 엉덩이에 깔려 사는 불행한 공처가.
그의 유일한 위안은 그림을 그리는 것인데 어느 날 밤 회사 회식 이후 귀가하다가 길에서 자기 애인인 핌프 데데(조르지 플라망)에게 얻어터지는 젊고 섹시한 밤의 여자 룰루(자니 마레즈)를 구해 주면서 파멸의 길로 접어든다. 룰루는 데데와 짜고 자기에게 반한 모리스의 껍데기를 벗겨 먹기로 하면서 모리스는 룰루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기 위해 회사 돈을 횡령한다.
룰루와 데데는 돈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모리스의 그림을 팔아먹는데 룰루는 화상에게 자기를 클라라 우드라고 소개하고 그림을 자기가 그렸다고 속인다. 그런데 그림들이 인기를 얻으면서 고가로 불티나게 팔린다. 모리스는 자기 그림을 팔고도 한 푼도 못 건지지만 룰루가 행복한 한 자기도 만족하는데 룰루가 데데의 애인이요 둘이 짜고 자기를 기만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와 질투에 눈이 멀어 룰루를 편지봉투 여는 칼로 찔러 죽인다. 그리고 살인혐의는 데데가 뒤집어쓴다.
마지막 장면이 역설적 희극으로 끝난다. 알거지가 된 모리스가 팔려서 고급 승용차에 실리는 자신의 자화상을 보면서 함지박 미소를 짓는다. 거지가 되면서 비로소 자유로워진 모리스의 커다란 미소에 체념의 예지가 가득하다. 우물쭈물하는 시몽의 뛰어난 연기와 화면 구성과 흐름이 좋은 흑백촬영 그리고 발자국 소리 등 실제 음을 쓴 음향효과 및 유효 적절히 쓴 노래 등이 모두 훌륭한 명화로 플라망과 마레즈도 잘 한다. 그런데 플라망은 아마추어 배우로 실제로는 직업 범죄자였다.
영화에서 모리스가 그리는 그림은 상징적 의미를 지녔다. 르느와르는 늘 아버지의 그늘을 의식하며 살았는데 이 영화를 위해 아버지의 그림을 팔아 제작비를 조달했다고 한다.
한편 마레즈는 룰루처럼 실제로 비극적 운명을 맞았다. 르느와르는 영화의 사실성을 살리려고 마레즈와 플라망이 실제로 사랑에 빠지도록 부추겨 둘은 애인이 됐다. 그런데 시몽도 마레즈를 사랑하면서 영화 밖에서도 삼각관계가 발생했다.
그리고 운전이 서툰 플라망은 출연료로 산 자동차에 마레즈를 태우고 달리다가 교통사고로 마레즈가 사망했다. 방년 23세로 영화는 마레즈 사망 3개월 후인 1931년 11월에 개봉됐다.
‘암캐’는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독일 감독 프리츠 랭(‘M’ ‘메트로폴리스’)에 의해 ‘진홍의 거리’(Scarlet Street·1945)로 리메이크 됐다. 프랑스 판보다 훨씬 어두운 가학적 영화로 병적인 염세주의 분위기가 가득하다. 주인공들은 공처가 크리스(에드워드 G. 로빈슨)와 폭력적이요 간교한 핌프 자니(댄 듀리에) 그리고 자니의 애인으로 자극적인 거리의 여자 키티(조운 베넷).
특히 상스러우면서도 치명적인 색정미를 발산하는 베넷의 모습과 연기가 눈부시다. 크리스가 잠옷 가운 차림으로 침대에 길게 누운 키티가 앞으로 길게 내민 맨발의 발톱에 정성껏 패디큐어를 해주는 모습이 선정적이다. 이 영화는 냉소적으로 끝나는 ‘암캐’에 비해 비극적 여운을 남긴다. 유럽의 여유가 아쉽다. ‘암캐’가 크라이티리언(Criterion)에 의해 DVD로 나왔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6년 8월 30일 화요일

스파 나잇(Spa Night)


데이빗이 스파에서 몸을 씻고 있다.

부모의 기대와 자신의 정체성 찾기에 시달리는 한인청년


LA 코리아타운에서 전형적인 한국인 스타일의 부모와 함께 사는 18세난 조용한 데이빗 조(조 서-올 선댄스 영화제서 연기상)의 세대 및 문화갈등과 함께 자신의 정체 추구를 담담하고 솔직하고 민감하며 또 가슴 아프게 그린 빼어난 작품이다. 그동안 코리아타운을 무대로 한 한국인 젊은이들의 영화는 더러 있었지만 이토록 통찰력 있고 모나지 않으면서 연민과 이해심 가득한 영화는 없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기대와 실망 그리고 동서양의 가치관의 차이와 함께 아메리칸 드림 문 밖에서 서성거리면서 자신의 좌표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주인공의 드라마가 차분하고 뼈에 사무치도록 진실되게 그려졌다. 
데이빗의 고뇌가 다른 아이들보다 더욱 심각한 이유는 그가 동성애자이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이 영화는 순전한 게이영화는 아니다. 
한국계 앤드루 안(30) 감독(‘오피니언’면 ‘주말산책’ 참조)의 데뷔작으로 그의 서두르지 않고 자상하게 관조하는 식의 식견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는데 그와 함께 조 서의 고요하면서도 안으로 팽팽하니 감긴 연기가 돋보인다. 이 얘기는 미국에 사는 모든 한국인 부모들과 그들의 자녀들의 것이나 마찬가지로 전 코리안-아메리칸들이 봐야 할 작품이다. 
코리아타운에서 식당을 하다가 실패한 데이빗의 아버지 진(조연호)과 어머니 소영(김해리)은 아들에 대한 기대가 크다. 좋은 대학(USC)에 가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기독교를 믿는 한국 여자를 만나 아들·딸 낳고 잘 살기를 바라지만 데이빗은 SAT 성적이 안 좋은 데다가 대학에 별 관심도 없다. 과묵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며 외톨이인 데이빗의 문제는 자신의 동성애 성향. 데이빗은 이를 억누르려고 안간힘을 쓰나 욕망은 용트림을 친다.
막일을 하면서 술에서 위안을 찾는 아버지와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어머니가 데이빗을 비싼 SAT 과외학원에 집어넣자 데이빗은 부모를 돕는다고 스파의 일꾼으로 취직한다(영화는 스파에서 데이빗과 아버지가 서로 몸을 닦아주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데이빗은 남자 손님들의 나체를 훔쳐보면서 죄의식과 욕망에 시달리는데 주인이 데이빗에게 스파에서 동성애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적발하라고 지시한다. 데이빗의 스파 안에서의 착잡한 표정과 훔쳐보는 눈길 그리고 어색한 행동에서 으스스한 분위기(촬영 김기진)가 스며나와 마치 스릴러를 보는 느낌이다. 
소영의 교회 지인인 수다쟁이 아주머니가 친절을 베푼다고 데이빗을 USC에 들어간 자기 아들 에디(태 송)과 함께 며칠을 보내게 하면서 데이빗은 술과 파티와 타운 노래방의 환락을 엿보게 되나 이런 것들이 데이빗이 시달리고 있는 여러 가지 육체적 정신적 문제를 위로해 주진 못한다. 데이빗의 고뇌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찢어지게 아픈데 영화는 어떤 해결책을 내리지 못한 채 데이빗이 웨스턴 길을 따라 조깅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왜 데이빗은 그렇게 매일 같이 열심히 뛰는 것일까. 성인용. Strand. ★★★★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돌주먹(Hands of Stone)


트레이너 레이(왼쪽)가 두란에게 작전지시를 하고 있다.

4체급 세계 챔피언 권투선수 로베르토 두란 전기영화



권투영화인데 강펀치가 없다. 50년간의 선수생활을 통해 라이트급을 비롯해 미들급에 이르기까지 무려 4체급의 세계 챔피언을 차지했던 ‘돌주먹’이라는 별명의 파나마 권투선수 로베르토 두란(65)의 전기영화다.
주인공의 불우한 어린 시절과 주먹 하나로 역경을 극복하고 국민의 영웅이 되는 피와 땀의 승전보 그리고 승리에 도취한 방종과 몰락과 재기 및 로맨스 등 전기영화의 정석적인 궤도를 그대로 따라간 평범한 작품으로 강렬한 극적 높낮이가 결여됐으나 충분히 보고 즐길 만하다. 극적인 드라마로서 헤비급이 못 되고 라이트급에 그쳐 유감이지만.
영화는 특히 성질이 불같고 오만할 정도로 자신만만한 두란과 그를 챔피언으로 만들어준 전설적 코치 레이 아르셀(로버트 드 니로)과의 관계를 뚜렷이 부각시키는데 레이는 두란에게 ‘전략’을 강조하면서 침착성을 챙겨주는 코치이자 정으로 그를 감싸 안는 아버지이기도 하다. 드니로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가 나온 역시 권투선수 전기영화인 ‘성난 황소’(Raging Bull)가 생각난다. ‘돌주먹’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성난 황소’가 얼마나 위대한 영화인가를 확인케 된다.
미국이 파나마운하를 관리하던 1970년대. 달동네서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두란은 불량소년. 그의 미국인 아버지는 아내와 아들을 버렸다. 영화는 제국주의적 미국에 대한 반감을 강하게 묘사했다. 감독이 베네수엘라 태생의 조나산 자쿠보위즈여서 그럴까.
청년 두란(에드가 라미레스)은 가난하고 문맹이지만 콧대 하나는 높아 아름다운 고교 여학생 펠리시다드(아나 데 아르마스가 불덩이다)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면서 구애를 하는데 만난지 30초만에 구혼하는 열혈한이다. 펠리시아드는 후에 두란의 아내가 되고 아이 여럿을 본 둘은 지금도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
두란의 주먹실력을 먼저 간파한 사람은 파나마의 갑부로 두란의 매니저가 된 칼로스 엘레타(루벤 블라데스). 그러나 두란을 무려 18차례나 세계 챔피언으로 만들어준 사람은 72세에 처음 두란을 만난 레이다. 레이는 두란의 안에 가둔 굶주린 분노와 이를 분출할 주먹질을 잘 배합할 줄 안 뛰어난 트레이너. 두란과 레이의 콤비에 의해 두란은 연전연승을 하나 뉴욕 마피아(존 투투로가 조용하게 겁주는 연기를 잘 한다)가 개입하면서 레이는 트레이너직을 떠난다.
촬영이 훌륭하고 액션도 박진한 권투장면 중에서 볼만한 것은 두란과 슈가 레이 레너드(팝스타 어셔)의 대결. 레너드가 생애 처음으로 패한 경기다. 승리감에 취한 두란은 먹고 마시면서 방종한 생활을 하는데 엘레타가 미국인 흥행사 단 킹과 두 사람의 재대결을 5개월 후로 잡으면서 체중이 40파운드나 증가한 두란은 몰락한다. 1980년 11월25일 뉴올리언스에서 열린 경기에서 두란은 느닷없이 도중에 경기를 포기한다. 둘은 지금도 친구지간이다.
벗겨진 머리에 주름이 진 얼굴을 한 드 니로의 차분한 연기가 돋보이고 라미레스(TV 드라마 ‘칼로스’)의 연기도 강렬하다. 그러나 영화는 전반적으로 더러 허점이 있고 다소 절름거리는 연출로 매끈하게 흐르지를 못한다. PG-13. Weinstein.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스파 나잇’의 앤드루 안




26일 개봉되는 ‘스파 나잇’(Spa Night-‘위크엔드’판 영화평 참조)에서 코리아타운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부모와 함께 살면서 자신의 성적 정체성 확인과 함께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18세난 데이빗 조(조 서)의 삶을 통해 이민가족의 꿈과 현실과 좌절을 차분하게 사실적으로 그린 앤드루 안(30·한국명 안기철·사진)을 최근 타운 내 한 식당에서 만났다. 어릴 때 주말 한글학교를 다녀 한국말을 어느 정도 하는 앤드루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자기 영화에 대해 “내 영화는 무엇보다 가족 간의 사랑에 관한 것으로 각본을 쓸 때부터 그런 의도에서 썼다”라고 소개했다. 그는 “영화의 상세한 면을 빼고는 대부분 내 경험과 비슷한 내용”이라고 말했는데 이 말처럼 영화가 매우 솔직하다.
앤드루는 인터뷰 내내 부모 자랑과 함께 그들이 자기에게 베푼 사랑에 대한 보답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부모를 돕고 싶다고 거듭 말했는데 동성애자인 자기를 너그럽게 받아들여준 부모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가득히 느껴졌다.
2011년 선댄스 영화제서 단편 ‘돌’(첫 생일)로 호평을 받은 앤드루의 첫 장편인 ‘스파 나잇’도 선댄스의 후원을 받아 만들어졌는데 앤드루는 “내 영화를 포함한 독립영화는 미국의 다양한 경험을 반영하는 문화적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앤드루는 LA 인근 토랜스에서 성장했는데 타운서 한의원을 경영하는 아버지와 비즈니스 컨설던트인 어머니도 전형적인 한국인 부모여서 처음에는 자기가 의사나 변호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이젠 영화인이 된 것에 만족한다고. 자기 어머니도 데이빗의 어머니처럼 교회엘 나가는데 앤드루는 “부모님은 날 미 동부 뉴햄프셔에 있는 사립 중·고둥학교에 보낼 정도로 사랑했다”고 또 부모 자랑을 했다.
앤드루는 올 초 이 영화가 선댄스 영화제에 나갔을 때 처음엔 어떤 반응을 받을지 몰라 너무나 겁이 났다면서 그러나 조 서가 주연상을 받고 영화가 호평을 받으면서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 영화로 앤드루의 실력이 널리 알려져 그는 최근 굴지의 연예대행업체인 ICM과 계약을 맺었다. 다음 작품에 대해 물으니 ‘스파 나잇’보다는 규모가 큰 한국인 작가의 글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만들 예정이라고만 알려줬다.
영화 제목처럼 스파는 코리아타운의 상징물이 되다시피 했다고 말하는 앤드루는 자기도 타운 내 스파를 종종 찾는다면서 영화에서처럼 아버지와 함께 가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이 영화는 자기가 부모와 함께 겪은 문화적 의식이요 가족의 전통을 묘사한 것이라면서 “동성애에 관한 내용이 있어 나이 먹은 어른들이 다소 불편해 할 수도 있겠지만 내 영화는 모든 우리 이민가족의 실상으로 세대를 불문하고 한국인들이 볼 수 있는 작품”이라며 많은 관람을 당부했다. 그는 이어 한국인들은 서브타이틀을 빼고 보면 더 실감이 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스파 나잇’은 지난 4월에 열린 전주영화제에서도 호응을 받았는데 8세 때 처음 한국을 방문한 앤드루의 22년만의 재방문이었다. 감동적인 방문으로 다시 가보고 싶다고 한다. 선댄스의 후원과 푼돈을 모아 만든 ‘스파 나잇’에서 데이빗의 부모 역을 맡은 두 배우는 한국 배우들. 앤드루의 열성과 진지성을 깨달아 조연호씨(아버지 역)와 김혜리(어머니 역)씨가 선선히 출연에 응해 LA까지 왔다. 모은 돈은 몽땅 제작비에 투입해 앤드루는 연출료는 고사하고 수중에 단 1페니도 지닌 것이 없다고 한다.
자신도 언젠가 가족을 갖고 싶다면서 겸연쩍은 미소를 짓는 앤드루는 한국서 자란 한국 젊은이들보다 더 한국적이다. 소주를 마실 때 잔을 들고 얼굴을 옆으로 돌린채 마시기에 내가 “거 참 보기 드문 모습이네”라고 말했더니 앤드루는 “지금도 부모 앞에서 술 마시기가 매우 어렵다”고 고백한다.
영화의 주인공 데이빗 역을 고르는데 무려 1년 이상이 걸렸는데 응모자 중에는 이름을 들면 알만한 한국계 배우도 있었지만 조 서를 보자마자 바로 ‘이 사람이다’하고 느꼈다고 한다. 그런데 스포츠광인 조 서가 영화 촬영기간에 축구를 하다가 다리를 다쳐 그의 조깅장면 중 일부는 대역을 써야 했다.      
보수적인 한국인 사회에서 게이라는 정체를 유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아는 앤드루는 그래서 영화에서 ‘한국인+게이’라는 두 가지의 정체를 결합해 솔직하고 진지하게 묘사하려고 했다. 영화는 또 다분히 감정적이다. 앤드루는 특히 데이빗이 술에 취해 리빙룸 바닥에 누워 자는 아버지의 입에 물린 이쑤시개를 빼내는 장면이 마음에 간다고 말했는데 부자 간의 애정을 슬프도록 아름답게 묘사한 부분이다.
한국인 감독으로는 이창동과 홍상수를 좋아한다는 앤드루는 브라운대에 이어 칼아츠에서 영화감독 석사학위를 받았고 선댄스랩에서 각본 수련을 받았다. 인터뷰 후 “좋은 앞날을 빈다”고 말하니 앤드루는 고개를 깍듯이 숙이며 “댕큐 베리 머치”라며 미소를 지었다. 자랑스런 한국인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