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8년 5월 8일 화요일

털리(Tully)


만삭의 말로가 두 아이에게 밥상을 차려 준 뒤 지쳐 축 늘어져 있다.

육아와 집안 일에 찌든 주부
사실적이며 초현실적으로 그려


어린 두 남매가 있는데다가 세 번째 아기를 가진 주부 말로는 무거운 몸으로 일벌레 남편과 아이들 돌보랴 밥 짓고 집안 청소하랴 곤죽이 되도록 피곤해 축 늘어져 산다. 그런 말로에게 어느 날 뜻밖에도 구원의 천사와도 같은 보모가 찾아오면서 밤에 우는 아기 젖 먹이는(말로의 젖이다) 일을 비롯해 말로가 하던 일들을 말끔히 대신 해주니 말로는 이제야 살 것 같다. 
삶에 지친 말로가 밝고 명랑한 보모를 통해 일상의 재충전을 하게 되는 사실적이면서도 거의 초현실적인 이야기로 코미디기마저 지녔다. 보통 어머니이자 아내인 여인들의 다사다난한 삶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그린 드라마로 약간 기이한 작품이다.
영화는 ‘주노’(Juno)와 ‘젊은 어른’(Young Adult)의 각본을 쓴 여류 디아블로 코디와 이 두 영화를 감독한 제이슨 라이트만이 다시 손잡고 만든 것으로 보통 사람들의 일종의 환상적 인물을 통한 삶의 질곡에서의 탈출기라고 하겠다. 
젊었을 때 브루클린의 자유혼을 지닌 여자였다가 이제 남편 드루(론 리빙스톤)와 결혼해 교외로 이주한 말로(샬리즈 테론)는 어린 두 남매를 가진데 이어 세 번째를 곧 낳기 직전이어서 몸이 무거워 거동이 불편할 지경이다. 
드루는 착한 사람이지만 일벌레로 아이들 돌보는 것을 비롯해 집안 만사는 말로에게 맡겨놓고 사는 모든 보통 남편이자 아버지들의 대명사와도 같은 사람이다. 말로는 무거운 몸으로 밥하고 아이들 학교에 데려다 주고 집안 치우랴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게다가 어린 아들이 정서적으로 다소 불안해 학교 교장으로부터 따로 개인교사를 두라는 말까지 들어 속된 말로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다. 
여기에 말로는 셋째를 낳으면서 밤잠을 설쳐 삶이 삼중으로 고달파졌는데 이를 보다 못한 말로의 즉흥적인 남동생 크레이그(마크 뒤플라스)가 혼자 고생하지 말고 자기가 돈을 대겠다며 밤에 일하는 보모를 두라고 조언한다. 처음엔 이를 거절하던 말로가 마지못해 승낙한다. 
이어 어느 날 저녁 보모가 말로의 집을 찾아온다. 20대의 보모의 이름은 털리(매켄지 데이비스)로 날씬하고 예쁘고 원기왕성하며 매사에 적극적이요 긍정적이다. 털리로 인해 말로는 오래간만에 밤잠을 제대로 자는데 자고 깨어나니 집안도 말끔히 정리됐다. 
이어 둘은 대화를 나누고 함께 술까지 들면서 친구처럼 급속히 가까워지는데 생기를 되찾은 말로는 그 동안 뜸했던 드루와의 섹스마저 재시도하게 된다. 그 동안 드루는 침대에 들기만 하면 귀에 헤드폰을 쓰고 비디오게임 하느라 섹스 같은 것에 대해선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영화는 테론이 혼자 짊어지다시피 하고 있다. 테론은 거대한 몸으로 일상에 지칠 대로 지친 아내요 어머니의 역을 깊이 있고 진중하게 하는데 그 모습을 보는 사람마저 피곤에 절게 만든다. 이에 대조적으로 데이비스도 경쾌하고 사뿐한 연기를 잘 한다. 데이비스는 앞으로 연기파 스타가 될 소지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R등급. Focus. ★★★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레이서와 죄수(The Racer and the Jailbird)


레이서 비비(왼쪽)와 강도 지지는 서로 첫 눈에 반한다.

사랑에 빠진 레이서·은행털이범... 커플 연기 강렬


백주털이 범죄 액션 스릴러요 순애보 멜로드라마 벨기에 영화로 볼만은 한데 구조가 산만하고 플롯이 중구난방이어서 도대체 이 영화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러는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프랑스 범죄영화의 분위가 느껴지는데 삼빡하니 끝나는 프랑스 영화와 달리 장황하게 뱀 꼬리를 달아 2시간이 넘는 영화가 다소 지루하다. 마치 끝날 줄을 모르는 한국 범죄 스릴러를 보는 느낌으로 기대감을 채워주진 못한다.
감독 미하엘 로스캄과 각본을 쓴 사람은 너무 욕심을 부리면서 강도질과 사랑의 얘기를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처리한데다가 제3막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대폭 잘라도 되는데도 알다가도 모를 얘기를 늘어놓아 혼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두 주연남녀의 뛰어난 연기와 콤비네이션 그리고 힘차고 강력한 강도질 액션 등은 볼만하다.
어릴 적부터의 친구들 사이에 지지라 불리는 지노(마티아스 쇠너츠-‘덴마크 여인’)는 자동차 경주를 구경 갔다가 건강하고 탐스러운 여자 레이서 비비(아델 엑사르쇼풀로스-‘푸른 색은 가장 따뜻한 색’)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비비도 마찬가지로 둘은 대뜸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되는데 지지는 자기 직업을 묻는 비비에게 자동차 수출입을 한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둘이 사귄지 얼마 안 돼 비비는 지지가 자기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한다.
지지는 어릴 때부터 불량청소년으로 자란 범죄자로 어릴 적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정기적으로 대규모 강도질을 하는데 이들은 충성심으로 똘똘 뭉쳤다. 지지가 비비에게 출장을 갔다 온다면서 백주 은행 강도질이 벌어지는데 이 장면이 멋있다. 비비는 지지가 어두운 남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지극히 사랑하는데 지지도 비비를 극진히 사랑하게 되면서 자기 직업(?)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지지는 마지막 한탕으로 친구들과 백주에 고속도로에서 현금 수송차를 터는데 잽싸게 연출되는 이 장면이 박력 있다. 그러나 곧 이어 경찰의 추적을 받으면서 일당은 체포되고 지지는 수감된다. 비록 떨어져 있어도 여전히 변치 않는 지지와 비비의 사랑.
여기쯤에서 끝나야 할 영화가 비비가 암에 걸리면서 완전히 신파극으로 돌변한다. 그 때까지 보던 영화가 완전히 순애보 넋두리 조로 돌변, 보는 사람을 혼란시키면서 당황케 만들 정도다. 그리고 쓸데없이 얘기를 질질 끌어간다. 볼만한 것은 두 배우의 강렬한 연기. 멋있는 쇠너츠의 쿨한 모습과 연기도 좋지만 이보다 뛰어난 것은 엑사르쇼풀로스의 연기. 강인하고 차분하면서도 허점이 있는 연기를 변화무쌍하게 보여준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8년 5월 1일 화요일

불복종 (Disobedience)


에스티(왼쪽)와 로닛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밀회 장소를 찾아가고 있다.

성적 욕망과 믿음 사이 고뇌... 긴장감 있고 깊이 있게 고찰


 ‘글로리아’(Gloria)와 올 해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멋있는 여자’(A Fantastic Woman)에서 여성의 성적 갈망과 심리를 깊이 고찰한 칠레 감독 세바스티안 레리오의 첫 영어영화로 보수 유대교 신도들의 사회 속에서 개인의 자유를 갈망하는 동성애자와 오래간만에 이 여인을 만난 옛 연인의 육체적 정신적 몸부림을 다룬 심오하고 자비로운 작품이다.
인간의 자유의지 대 신앙의 대결과 함께 욕망과 믿음 그리고 사랑을 다룬 얘기로 전반부는 다소 느리고 지나치게 엄격하지만 후반에 들어 서서히 작품에 불길이 당겨지면서 서스펜스 영화를 보듯이 진한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특히 이 영화에서 볼만한 것은 세 주인공의 연기. 오래간만에 재회해 사랑의 불꽃을 다시 점화시키는 두 여인 역의 레이철 바이스와 레이철 맥애담스 그리고 이들 여인 사이에서 인간적 정신적 갈등을 심하게 겪게 되는 남자 역의 알레산드로 니볼라의 연기가 깊이와 무게를 가득히 지녔다.     
오래 전에 런던의 보수 유대교 신자들의 사회를 떠나 뉴욕으로 온 사진사 로닛(바이스)은 막강한 힘을 지닌 유대교 목사인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받고 런던으로 온다. 왜 로닛이 런던을 버렸는지에 대한 이유는 명확히 전모가 밝혀지지 않으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조금씩 알게 된다.
영화 처음에 로닛의 아버지가 교회에서 인간의 자유와 신앙에 관해 설교를 하다가 쓰러지는데  로닛은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충격에 빠져 긴 산책과 바에서의 음주 그리고 술에 취한 채 바의 화장실에서의 남자와의 섹스로 슬픔을 달랜다.
고향에 돌아온 로닛을 처음 맞는 사람이 로닛의 어릴 적 친구로 자기 아버지의 후계자로 꼽히는 도빗(니볼라). 그러나 도빗은 자기 가족과 커뮤니티를 버린 로닛을 다소 차갑게 맞는다. 그리고 로닛의 친척과 친지 및 동네 사람들도 “오래 살기를 바란다”라는 말 한마디로 매우 냉랭하게 로닛을  대한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로닛이 가장 큰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은 역시 어릴 적 친구인 에스티(맥애담스)를 만나면서다. 뜻 밖에도 에스티가 도빗의 아내가 된 것. 적극적인 로닛과 소심한 에스티는 학생 시절 연인 사이였다.           
로닛과 에스티가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로닛은 에스티가 경직된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남편과 사랑 없는 섹스를 하면서(매주 금요일 의식처럼 치른다) 질식할 것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도빗은 선하고 연민의 마음을 가진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둘이 만남을 거듭하면서 사랑이 재점화되고 이윽고 둘은 골목에서의 키스에 이어 호텔방을 빌려 뜨거운 성애를 나눈다. 둘의 섹스신이 마치 짐승들의 그것처럼 매우 노골적이요 뜨겁고 지극하다.
그리고 도빗의 아기를 가진 에스티는 남편에게 “날 자유롭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아내의 요구에 대한 대답을 자기에게 주어진 목사의 직무를 거절하는 답변으로 대신하는 도빗의 절규에 가까운 설교가 가슴을 강하게 친다. 바이스와 맥애담스의 대조적인 연기도 좋지만 거의 충격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니볼라의 안으로 꾹꾹 누르는 내적 폭발력을 지닌 연기다.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출생 100주년 잉그마르 베리만 대표작 상영


저승사자(왼쪽)와 기사가 체스를 두고 있다. ‘제7의 봉인’.

LACMA 빙극장서 ‘제7의 봉인’ 등 5월 한달 간


LA카운티 뮤지엄 내 빙극장(윌셔와 페어팩스)은 5월 1일부터 29일까지 매주 화요일 오후 1시에 영혼과 믿음, 고독과 도덕 등 삶의 심오한 문제들을 탐구한 스웨덴의 거장 잉그마르 베리만의 영화를 상영한다. 올 해 출생 100주년을 맞는 베리만을 기리는 행사로 그의 영화들은 6월 말까지 빙극장 외에도 LA의 여러 극장에서 상영된다.

*1일
▲‘모니카와의 여름’(Summer with Monica·1953)
근로자 계층의 두 젊은 남녀의 여름 철 짧은 사랑을 민감하게 그렸다. 공격적인 젊은 여자와 아직도 소년 같은 젊은 남자가 사랑하고 아기를 가지지면서 결혼한다. 단순하고 맑고 아름답다.

*8일
▲‘제7의 봉인’(The Seventh Seal·1957)
십자군 전쟁에 나갔다가 모든 것에 실망한 채 귀가하던 기사(베리만의 단골 배우 맥스 본 시도)가 도중에 검은 망토를 입은 저승사자를 만난다. 기사는 자신의 죽음을 잠시 유예해준 저승사자와 체스를 두면서 삶의 신비에 대해 생각한다. 롱 샷으로 찍은 흑백 라스트 신이 경이롭다. 베리만을 국제적으로 알려준 불후의 명작이다. (사진)

*15일
▲‘산딸기’(Wild Strawberries·1957)
스톡홀름의 노 교수가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러 차를 몰고 가면서 자기 삶의 실망스러운 것들을 회고한다. 플래시백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감정적으로 강렬한 충격을 주는 영화로 역시 베리만의 단골 배우인 교수 역의 빅토 쇼스트롬의 연기가 훌륭하다. 

*22일
▲‘마술사’(The Magician·1958)
19세기. 최면술사이자 마법사인 알베르트 에마누엘 보글러(맥스 본 시도)가 자신의 순회공연단을 이끌고 한 마을에 도착하자 마을 사람들이 보글러가 엉터리 가짜라는 것을 밝혀내려고 한다. 그러나 보글러가 마을 주민들보다 한 발 앞서 간다.   .

*29일
▲‘처녀의 샘’(The Virgin Spring·1960)
중세. 신앙심 깊은 시골 농가의 한 가족의 딸이 약탈자들에 의해 겁탈당한 뒤 살해되자 딸의 아버지(맥스 본 시도)가 이들에게 가차 없는 보복을 시도한.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을 탄 심오하고 아름다운 우화.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최은희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던 최은희씨가 16일 92세로 별세했다. 최씨는 감독이자 남편인 한국영화계의 거목 신상옥과 함께 1960년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끈  큰 별이었다. 최씨는 생애 총 130여 편의 영화에 나왔는데 여러 편이 신감독의 작품. ‘꿈’ ‘춘희’ ‘로맨스 빠빠’ ‘지옥화’ ‘상록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성춘향’ 및 ‘빨간 마후라’ 등이 그 대표작들이다.
많은 영화들 중에서 최은희 하면 대뜸 생각나는 것이 ‘성춘향’(1961^사진)이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학칙을 무시하고 이 영화를 명보극장에서 봤는데 극장은 초만원을 이뤘었다. 총천연색 화면에 펼쳐지는 춘향과 이(몽령)도령의 계급을 무시한 파란만장한 사랑이 재미 만점이었는데 당시 30대의 최씨가 전형적인 한국 미인이긴 했지만 춘향이로선 너무 늙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도령 역의 김진규도 마찬가지.
그런데 이 영화에서 춘향과 도령보다 더 화면을 압도했던 배우는 변사또역의 이예춘이다. 호색한인 사또가 자기 집 마당에 관기들을 일렬횡대로 세워놓고 수청 들 여자를 고르면서 하나도 마땅한 것이 없다고 인상을 쓰며 상소리를 섞어 투덜대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이와 함께 역시 나이는 먹었지만 방자역의 허장강과 향단역의 도금봉의 밀고 당기는 애정의 줄다리기도 볼만했다.
‘성춘향’하면 또 하나 못 잊을 사건이 1960년대 최고의 스타 중 하나였던 김지미가 나온 ‘춘향전’이다. 이 영화는 당시 김씨의 남편 홍성기가 감독, ‘춘향전’과 동시에 국제극장에서 개봉했는데 흥행서 참패했다. 30대였던 최씨에 비해 20대였던 김씨가 춘향역에는 더 어울렸지만 흥행 실패의 큰 까닭 중 하나는 도령역에 신인인 신귀식을 쓴 것. 그리고 방자역의 김동원과 향단역의 양미희도 허장강과 도금봉 콤비에 비하면 한 수 아래였다.
1961년은 신상옥-최은희 콤비의 최고의 해로 둘은 이 해 심훈의 계몽소설이 원작인 ‘상록수’와 ‘연산군’ 및 주요섭의 단편소설이 원작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원제 ‘사랑 손님과 어머니’)도 함께 만들었다. ‘사랑 손님과 어머니’는 주요섭의 또 다른 단편 ‘아네모네의 마담’과 함께 내가 고교시절 애독한 글이다.
내용은 어린 딸(전영선)을 둔 미망인인 어머니(최은희)가 사랑방에 하숙을 하는 남자(김진규)에게 애정을 느끼지만 재혼은커녕 연애조차 하지 못하고 생이별을 해야 하는 과거 한국의 모든 미망인들의 한숨과도 같은 이야기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손 한번 제대로 못 잡아보고 헤어져야하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안타까워 속을 태웠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장면은 어머니가 사랑에 타들어가는 속을 진화시키려고 피아노로 쇼팽의 ‘즉흥 환상곡’을 치는 모습. 소설도 그렇지만 신감독은 감상성을 잘 조절해가며 은근하고 애틋한 감정의 여운을 남기는 연출솜씨를 보여주었다.
총천연색인 ‘연산군’에서 폭군 연산군으로는 후에 ‘빨간 마후라’에서도 최씨와 공연한 신영균(90)이 나와 열연을 했는데 역시 명보극장에서 봤다. 표가 완전 매진이었고 영어자막이 없었는데도 외국인까지 관람하는 대성황을 이뤘었다.
단아한 이미지의 최씨로선 파격적인 역인 양공주로 나온 영화가 ‘지옥화’(1958)다. 한국전 후 기지촌 주변의 양공주들과 이들의 남자들인 범법자들을 둘러싼 애증과 배신과 폭력 그리고 형제간 갈등과 비극적 죽음을 그린 뛰어난 작품이다. 필름 느와르이자 멜로드라마로 네오리얼리즘 분위기마저 띠었는데 1950년대 영화로선 가히 충격적인 작품이다.
기지촌 주변에 살면서 패거리들을 이끌고 미군부대 군수품을 터는 터프가이 영식(김학)과 그의 여자로 팔등신 미녀인 소냐(최은희) 그리고 시골서 상경한 영식의 동생 동식간의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양공주들과 범법자들의 삶과 한탕을 사실적이요 박력 있게 그렸다. 대담한 것은 과감히 노출된 여인들의 육체와 선정적인 섹스신. 안개가 자욱하니 핀 갯벌에서 영식이 자신을 배신하고 도주하는 소냐를 쫓아가 칼로 찔러 죽이는 마지막 장면은 치정살인의 오페라적 표현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신감독과 최은희의 최고걸작은 이들 영화보다 1978년 둘이 몇 달 차이로 영화광 김정일의 지시로 홍콩서 납북된 사건일 것이다. 둘은 북한에서 7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최씨는 ‘소금’으로 모스크바 영화제서 주연상을 탔다. 두 사람은 1986년 영화를 만든다는 핑계로 비엔나에 갔다가 주 비엔나 주재 미대사관을 통해 망명, 그 후 한동안 LA에서 살았다.
이 때 어느 날  내게 신감독으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당시 서울의 일간스포츠에 주 1회 쓰던 영화면에 자기가 줄 기사가 있으니 지면을 비워 놓으라는 지시적 부탁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 감감 무소식. 둘의 납북사건은 기록영화 ‘연인들과 폭군’(The Lovers and the Despot)에서 흥미진진하게 다뤄졌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8년 4월 25일 수요일

나 예뻐졌네(I Feel Pretty)


르네가 거울 속의 뱃살이 빠진 자기 몸을 보면서 놀라고 있다.

"뚱보가 미녀로" 에이미 슈머의 코미디


요즘 인기가 한창 오르고 있는 토실토실 살이 찐 코미디언 에이미 슈머(‘트레인렉’)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통통한 맨살을 드러낸 채 전력투구하는 코미디로 어리석다. 여자의 미에 대한 강박관념을 나무라면서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라는 얘기인데 다분히 설교조다.
그렇게 미인도 아니고 또 살이 찐 슈머의 자기선전이자 자화자찬 같은 영화인데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을 거두고 자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는 메시지를 지나치게 강조해 우습다기보다 짜증이 난다. 
자기 몸에 자신이 없는 여자들을 격려하려는 사명감이 가상하기는 하지만 별 재미가 없고 엉성한 영화다. 볼만한 것이라면 종횡무진으로 스크린을 주름잡는 슈머와 왕년의 수퍼 모델이자 배우인 로렌 허튼(많이 늙었다)과 나오미 캠벨 등 고참 모델들과 화장품 회사의 늘씬한 미녀들. 남자들에겐 어필하지 못할 여자들 영화다.
6년간 맨해튼의 차이나타운의 지하 골방에서 동료직원 메이슨(에이드리안 마티네즈)과 둘이 굴지의 화장품회사 릴리 르클레어를 위해 컴퓨터작업을 하는 르네 베넷(슈머)의 꿈은 5번가에 있는 고층건물 회사본부에서 일하는 것. 
르네는 직장도 있고 아파트도 있고 또 친한 두 친구 비비안(에이디 브라이언트)과 제인(비지 필립스)도 있지만 다소 비대한 몸 때문에 자신감이 없어 남의 눈치를 본다. 그런데 비비안은 뚱뚱하고 제인도 외모가 대단치 못해 셋이 다 남자 사귈 것을 거의 포기한 상태다.
마침내 르네는 큰 결심을 하고 날씬한 몸매를 만들기 위해 소울서클이라는 신체단련 짐에 등록한다. 그리고 자전거 페달을 냅다 밟는데 비둔한 몸으로 페달을 너무 강하게 밟는 바람에 페달이 떨어져 나가면서 르네는 바닥에 나 뒹군다. 그리고 머리를 다치면서 졸도한다. 
휴게실에서 깨어난 르네가 거울을 들여다보는데 이게 웬일인가. 르네는 거울 속에서 날씬한 팔등신 미녀가 된 자신을 발견하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러나 르네의 눈에만 그렇게 보일 뿐이지 실제로 그의 몸이 달라진 것이 아니다. 
이제 자신이 생긴 르네는 두 친구에게 자기 몸 자랑을 하면서 으스대는데 자기가 팔등신 미녀인 만큼 남자에게도 자신이 생겨 빵집에서 빵을 사러온 남자(로리 스카벨)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해 그를 결국 자기 애인으로 만든다. 물론 이 남자는 살이 찐 르네의 있는 그대로를 좋아하는 것. 그리고 르네는 애인이 대경실색하는 가운데 술집 비키니대회에 까지 나가 맨살을 드러낸 채 노래까지 부른다. 자신감이 부풀어 터질 지경이다. 
이어 르네는 늘씬한 미녀들이 일하는 본사의 리셉셔니스트 모집에 지원해 여차여차한 이유로 취직이 된다. 물론 르네는 자기가 팔등신 미녀여서 취직이 된 줄 안다. 릴리 르클레어의 사장은 쇳소리를 내는 음성을 지닌  에이버리 르클레어(연기파 미셸 윌리엄스가 웃긴다)로 회사는 에이버리의 할머니 릴리(허튼)가 창립했다. 
이 회사는 지금 막 모든 평범한 여성들이 사용할 화장품을 개발, 이에 대한 판촉방안을 구상하는 중. 매사에 자신이 만만한 르네는 어쩌다 판촉방안을 논의하는 회의에 들렀다가 미녀가 되기 이전의 평범한 여자로서의 화장품에 대한 의견을 발표, 릴리의 마음을 산다. 
이렇게 잘 나가던 르네가 자기를 탐내는 릴리의 오빠로 플레이보이인 그랜트(탐 후퍼)와 함꼐 타 도시로 출장을 갔다가 자기 방 욕실 유리문과 충돌해 기절을 했다가 깨어나는데 이를 어쩌나 자기가 옛날 자기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 PG-13. 애비 콘과 마크 실버스틴 감독(각본 겸).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경시청(Quai des Orfevres·1947)


수사관 앙트완이 심문차 제니(왼쪽)를 방문했다.

“내가 죽였어요” 진범은? ‘프랑스 히치콕’ 클루조 감독 흥미만점의 수사 느와르


이브 몽탕이 주연한 서스펜스 가득한 실존적 생존의 드라마 ‘공포의 보수’(The Wages of Fear·1953)와 시몬 시뇨레가 나온 냉기가 감도는 살인 스릴러 ‘디아볼리크’(Diabolique·1955)를 만든 ‘프랑스의 히치콕’이라 불린 명장 앙리-조르주 클루조의 스타일 멋있고 아기자기하게 재미있는 필름 느와르다. 클루조는 이 영화로 1947년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클루조 특유의 사회적 사실주의와 심리적 가혹성을 결합한 흥미 만점의 영화로 특히 파리 경시청 수사관으로 나오는 베테런 루이 주베의 연기와 흑백촬영이 빼어난다.
1946년 크리스마스 직전의 파리. 육감적으로 아름다운 뮤지컬 가수 제니(수지 들레르)는 빅 스타가 되기 위해 자신의 피아노 반주자인 남편 모리스(베르나르 블리에)에게 감추고 자기를 탐하는 돈 많고 추한 늙은 제작자 브리뇽(샤를르 뒬랑)의 자택 초청에 응한다.
머리가 벗겨진 소심하고 착한 모리스는 제니를 몹시 사랑해 질투가 심한데 제니에게 수작을 거는 브리뇽에게 죽이겠다고 협박을 한 바 있다. 제니는 비록 애교가 많긴 하나 남편을 극진히 사랑한다.
그런데 뒤늦게 제니가 자기를 속이고 브리뇽의 집에 갔다는 것을 안 모리스는 차를 타고 브리뇽의 집엘 찾아간다. 그리고 브리뇽이 피살체로 거실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모리스는 당연히 제니가 브리뇽을 죽였다고 믿고 급히 브리뇽의 집을 빠져나오는 순간 누군가가 모리스의 차를 훔쳐 타고 달아난다. 
한편 제니는 자기 옆집의 사진사로 남편의 오랜 친구인 레즈비언 사진사 도라(시몬 르낭)에게 자기가 브리뇽을 죽였다고 고백한다. 이에 평소 브리뇽을 혐오하던 도라는 브리뇽의 집으로 가 모든 물적 증거를 제거한다.
이 사건을 수사하는 수사관은 외인부대 출신의 베테런 앙트완(주베). 세상이 피곤하다고 투덜대는 인정이 많은 휴머니스트 앙트완은 겉으로 보기엔 어수룩한 이웃집 아저씨 같지만 뛰어난 수사 감각을 지닌 사람으로 다소 냉소적이다.
앙트완은 모리스를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집요하게 심문하는데 이에 견디다 못한 모리스가 허위 자백을 한 뒤 유치장에서 자살을 시도한다. 이에 제니와 도라가 앙트완에게 서로 자기가 범인이라고 고백한다. 과연 누가 진범일까. 재미 가득한 추리영화로 이번에 새로 복원된 필름으로 로열극장(11523 산타모니카)에서 상영된다. (310)478-3836.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