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7년 10월 15일 일요일

글로리아 그램


흑백영화의 빅 스타로 오스카 수상자인 글로리아 그램(사진)은 스크린의 전설적인 팜므 파탈이었다. 탄력 있고 곡선을 한 몸매에 심술이라도 난 듯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남자를 도전적으로 응시하는 모습이 약간 맹한 소녀 같아 그 자극성이 자못 치명적인 스타였다. 얼굴이 내가 좋아하는 여배우 수전 헤이워드를 좀 닮았다.
그램은 필름 느와르의 여주인공의 특징인 불가항력의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타락한 미녀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해 범죄영화에 많이 나왔다. 그가 처음으로 오스카 조연상 후보에 오른 ‘크로스화이어’(Crossfire^1947)도 범죄영화다.
그램은 실제 삶도 자기 영화들만큼이나 극적이었는데 삶의 마지막 2년 남짓한 기간을 자기보다 28세나 어린 청년과 정염을 불사르다 사망, 센세이션을 일으켰었다. 무대배우 출신인 그램은 스크린 스타로서 완전히 한물간 지난 1978년 56세 때 연극으로 재기하려고 영국에 와 리버풀에 머물다가 당시 28세인 연극배우 지망생 피터 터너를 만나 그를 자기 애인으로 삼았다.
둘의 뜨거운 정열로 시작된 관계는 보다 깊은 사랑과 이해의 관계로 이어지고 그램은 터너로부터 위안을 찾으면서 삶의 욕망을 다시 불태우게 됐다. 그러나 이 메이-디셈버 로맨스는 그램의 유방암이 재발해 1981년 미국으로 귀국하면서 끝이 났다. 그램은 귀국해 뉴욕의 병원에 입원한지 몇 시간 뒤에 57세로 사망했다.     
이 얘기가 아넷 베닝과 제이미 벨 주연으로 ‘영화 스타는 리버풀에서 죽지 않는다’(Film Stars  Don‘t Die in Liverpool)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오는 12월 15일에 개봉된다. 터너의 자전을 바탕으로 폴 맥귀간이 감독한 이 로맨스 드라마에서 볼만한 것은 베닝의 연기다.
베닝은 그램의 태도나 모습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으면서도 깊이 있고 민감하며 또 연민을 갖게 만드는 연기로 그램의 분위기를 잘 살려 마치 오래간만에 그램을 스크린에서 재회하듯이 기쁨에 젖게 된다.
그램의 절정기는 1952년이었다. 이 해 그는 조운 크로포드와 잭 팰랜스가 공연한 서스펜스 스릴러 ‘서든 피어’(Sudden Fear)와 오스카 작품상을 탄 올스타 캐스트의 ‘지상 최대의 쇼’(The Greatest Show on Earth) 및 ‘악인과 미녀’(The Bad and the Beautiful) 등에 출연했다.
‘악인과 미녀’는 커크 더글러스, 라나 터너, 딕 파웰, 월터 피전 등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나오는 할리웃의 내막을 파헤친 명작이다. 이 영화에서 그램은 각본가 파웰의 아내로 나와 오스카 조연상을 탔는데 그램이 스크린에 나온 시간은 달랑 10분이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그램은 영화에서 대부분 조연이었는데 많은 역이 끼 있고 간계를 꾸미는 남자 잡는 암커미 같은 것.
뭇 남자들의 욕망의 대상이었던 그램은 생애 모두 네 번 결혼했는데 두 번째 남편이 제임스 딘이 나온 ‘이유 없는 반항’(Rebel without a Cause^1955)을 감독한 할리웃의 이단자 니콜라스 레이다. 그램은 레이가 감독한 명작 드라마 ‘고독한 곳에서’(In a Lonely Place^1950)에서 살인 누명을 벗으려고 애쓰는 할리웃의 각본가 험프리 보가트의 애인인  떠오르는 스타로 나왔다.
격정적이요 과격한 여인이었던 그램은 레이와 결혼 4년 만에 이혼했는데 그 이유가 가히 태블로이드 감이다. 그램은 레이의 전처의 아들 앤소니가 13세 때 그와 정사를 나눴는데 레이가 자기 아들과 그램이 함께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보면서 결혼 생활이 끝났다. 그리고 헤어졌던 그램과 앤소니는 그램이 세 번째 남편과 이혼한 뒤 재회, 결혼해 남매를 뒀는데 그램은 앤소니와도 이혼 했지만 둘의 관계가 네 남편 중 가장 길었다. 둘의 관계는 우디 알렌과 순이의 그 것과 같다.       
그램은 1953년 둘 다 프리츠 랭이 감독하고 글렌 포드가 주연한 ‘빅 히트’(The Big Heat)와 ‘인간의 욕망’(Human Desire)에 나왔다. ‘인간의 욕망’은 에밀 졸라의 소설 ‘인간 짐승’(La Bete Humaine)이 원작이다. 그러나 그램의 생애는 뮤지컬 ‘오클라호마!’(Oklahoma!^1955)에 나온 뒤로 내리막길로 치달리면서 할리웃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순진의 가면을 쓴 요부 같은 그램의 얼굴을 결코 잊지 못하게 만든 영화가 ‘빅 히트’다. 가차 없이 살벌하고 폭력적인 필름 느와르로 그램은 여기서 범죄단 두목의 오른 팔로 촌티가 뚝뚝 흐르는 무자비한 갱스터 빈스 스톤(리 마빈)의 애인 데비 마쉬로 나온다. 그런데 스톤이 자신이 연루된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데이브 배니언(글렌 포드)과 마쉬가 만났다는 것을 알고 마쉬의 얼굴에 펄펄 끓는 커피 팟의 커피를 들이 붓는다. 이로 인해 마쉬의 왼쪽 얼굴 전체에 처참한 흉터가 남는다. 얼굴 반쪽은 예쁘고 다른 반쪽은 흉측해 괴이하게 매력적이었다. 
이 장면이야 말로 할리웃 영화사에 짐승 같은 남자가 연약한 여자에게 행한 가장 잔혹한 행위로 남아 있다. 나는 고등학생 때 서울 시청 앞에 있던 경남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는데 이 장면을 보면서 느꼈던 충격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 그 후 나는 그램의 도발적이요 선정적인 유혹에 이끌려 그의 팬이 되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7년 10월 1일 일요일

‘아메리칸 메이드’(American Made)

배리 실이 콘트라반군에게 전달할 무기를 비행기로 나르고 있다.

‘탑 건’서 밀수 조종사로… 탐 크루즈의 범죄 액션


100만 달러짜리 미소를 지닌 만년 소년티가 나는 탐 크루즈가 비행기를 타고 미국과 중남미를 오락가락하면서 마약과 총과 현찰을 수송, 수수료조로 떼돈을 버는 코미디기가 있는 범죄 액션 스릴러로 경쾌하고 속도감 있고 흥미진진하다. 
1980년대 레이건의 하수인인 올리버 노스 대령이 주도한 이란-콘트라 스캔들에 개입했던 에이스 조종사 배리 실의 실화에 허구를 잔뜩 입힌 비도덕적인 배달꾼의 터무니없을 정도로 대담무쌍한 모험 얘기다. 
아메리칸 드림의 하나인 황금만능주의를 풍자한 얘기이기도 한데 여러 가지 정치적 스캔들을 깊이 파헤치기보다 피상적으로 다루면서 재미 일변도의 영화로 만들어 주인공도 만화 속 인물처럼 묘사되긴 했으나 오락영화로선 A급이다.
얘기는 실이 자기 과거를 고백한 비디오 테이프를 통해 내레이션을 하면서 진행된다. 1970년대. 아내 루시(새라 라이트)와 두 아이를 둔 실(크루즈)은 TWA 조종사로 부업으로 쿠바 시가를 밀반입해 돈을 번다. 
이를 파악한 CIA로부터 몬티 셰이퍼(돔날 글리슨)가 실을 찾아와 시가 밀반입을 눈감아주는 대신에 임무를 지시한다. CIA가 제공한 프로펠러 비행기로 파나마로 날아가 노리에가 대령에게 현찰을 주고 정보를 받아오는 일. 
실의 잦은 중부 아메리카 비행이 콜롬비아의 메데인 마약 카르텔에 의해 포착이 되고 이 카르텔의 두 두목 호르헤 오초아(알레한드로 에다)와 파블로 에스코바르(마우리시오 메이아)는 실을 붙잡아 미국으로 코케인 수송을 지시한다. 그리고 실에게 코케인 킬로 당 2,000달러를 지불한다. CIA의 묵인 하에 실은 코케인 밀반입으로 엄청난 돈을 번다. 
1980년대에 들어서도 이런 밀반입 수송으로 떼돈을 벌던 실은 마약단속국에 걸리지만 셰이퍼가 개입해 풀려난다. 그리고 메데인 카르텔로부터 손을 뗀 실은 CIA에 의해 거주지를 바톤 루지로부터 아칸소주의 작은 마을 메나로 옮긴다. 집과 함께 개인 비행장이 있는 2,000에이커의 땅주인이 된 실은 밀반입으로 번 현찰이 너무 많아 창고에 쌓아두다 못해 집 마당에 나무를 심듯 구덩이를 파고 감춘다. 
셰이퍼는 이번에는 실에게 니카라과 좌파정부에 저항하는 콘트라 반군들에게 무기를 전달하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줄 타는 곡예사처럼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상황을 잘도 피해 다니던 실은 결국 내리막길로 접어들게 된다. 크루즈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약삭빠른 비도덕적인 인간의 연기를 잽싸게 해낸다. 덕 라이만 감독. R. Universal.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마크 펠트: 백악관을 무너뜨린 남자’(Mark Felt: The Man Who Brought Down the White House)

워싱턴 포스트에 정보를 제공하는 마크 펠트.

워터게이트 사건 제보‘딥 스로트(Deep Throat)’ 정체는 바로…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인해 닉슨이 하야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FBI 부국장 마크 펠트에 관한 실화로 정석 전기영화의 틀을 밟은 드라마다. 너무 고지식하게 직선적이어서 딱딱한 강의를 듣는 기분이지만 미국 정치사의 희대의 스캔들을 돌아보는 흥미는 있다.
펠트 역의 리암 니슨이 견실한 연기를 하는데 그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은 지극히 피상적으로 그려졌다. 따라서 니슨의 독무대이다시피 해 극적 다양성이 모자라고 강한 충격도 없다.
워터게이트 스캔들은 그 내막을 폭로한 워싱턴 포스트의 두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틴의 얘기를 다룬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에서 흥미진진하게 묘사된 바 있다. 이들에게 정보를 제공한 사람이 펠트인데 그의 암호명은 ‘딥 스로트’(Deep Throat)였다. ‘딥 스로트’는 최초로 극적 구성을 한 빅 히트 포르노영화의 이름을 딴 것이다.
영화는 닉슨의 첫 번째 임기 말년에 시작된다. 펠트는 경력 30년의 베테런으로 정의감이 강하고 FBI의 독립성을 철저히 강조하는 사람으로 그는 FBI를 ‘세계에서 최고로 존경 받는 기관’으로 여긴다. 그래서 백악관을 비롯한 외부기관의 내부간섭에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인다.
수십 년간 FBI 국장직을 맡았던 후버가 사망하고 모두가 당연히 국장직을 승계하리라고 생각했던 펠트를 제치고 닉슨은 법집행 경력이 전무하나 자기에게 충실한 L. 패트릭 그레이(마턴 시소카스)를 임명한다. 이어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터지면서 펠트가 이를 수사하자 닉슨의 보좌관인 존 딘(마이클 C. 홀)과 그레이는 펠트에게 수사를 빨리 종결지으라고 압력을 넣는다.
그러나 FBI의 독립성과 진실과 정의에 집착하는 펠트는 이를 무시하고 수사를 계속하면서 백악관이 FBI를 훼손시키려고 한다는 사실에 분노, 자신의 수사정보를 우드워드에게 전달한다. 이런 과정이 매우 스릴이 있어야 하는데도 너무 평범하게 처리돼 심심하다.
곁가지로 펠트의 좌파 무장저항단체 웨더 언더그라운드에 대한 대처가 묘사되나 별 의미가 없다. 펠트가 이 단체에 대해 특별히 신경을 쓰는 것은 자신의 가출한 딸이 이 단체의 일원일지도 모른다는 이유 탓이다.
펠트가 고발자 역을 자임한 것이 승진하지 못한데 대한 반감 탓일지도 모른다는 기색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영화는 어디까지나 그의 정의와 진실 그리고 FBI에 대한 사랑을 그 이유로 그리고 있다. 펠트의 아내 오드리로 다이앤 레인이 나온다. 피터 란데스만 감독. PG-13. Sony.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레베카’디지털로 복원


캡션 추가

대저택 떠도는 죽은 부인의 망령… 히치콕 스릴러물


알프레드 히치콕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제작한 데이빗 O. 셀즈닉과 계약을 맺고 미국에 진출해 만든 첫 작품으로 로맨틱하고 강렬한 심리 로맨스 드라마다. 히치콕과 셀즈닉은 영화를 만들면서 의견 대립이 심했는데 히치콕은 이 영화 이후 계약 때문에 셀즈닉의 영화들인   ‘망각의 여로’(Spellbound·1945)와 ‘패라다인 케이스’(The Paradine Case·1948) 등 2편을 더 만들고 둘이 헤어졌다.
영화는 또 귀신 이야기이자 살인 미스터리 분위기를 지닌 분위기 스산하면서도 우아한 흑백 명작으로 대프니 뒤 모리에의 1938년 작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작품상과 감독상 등 모두 11개 부문에 오스카상 후보에 올라 작품상과 촬영상을 탔다. 남우주연(로렌스 올리비에), 여우주연(조운 폰테인), 여우조연(주디스 앤더슨) 및 각색상 등이 오스카 수상 후보에 올랐었다. 
폰테인은 후에 이 영화와 분위기가 매우 비슷한 ‘제인 에어’(Jane Eyre·1944)에도 주연했다. 이 흑백영화는 샬롯 브론테가 쓴 동명소설이 원작으로 ‘레베카’처럼 서민층의 젊은 여자와 ‘손필드 홀’이라는 음습한 기운을 내뿜는 대저택을 소유한 지체 높고 정체가 신비한 중년 남자 미스터 로체스터의 사랑을 그렸는데 로체스터로 오손 웰즈가 나온다.   
시종일관 으스스한 분위기 속에 서술되는 신비하고 비가적인 사랑의 이야기로 특이한 것은 제목의 레베카는 남자 주인공 맥심 드 윈터의 첫 아내로 얘기가 시작되기 전에 죽어 영화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반면 영화의 주인공인 여자는 이름이 없다는 것.
그런데 이 죽은 여자 레베카는 영화 전편을 통해 맥심과 그의 젊은 두 번째 아내 그리고 레베카의 충실한 하녀였던 댄버스 부인(앤더슨)을 집요하게 군림한다. 
이름 없는 순진한 젊은 여자(폰테인)는 돈을 받고 나이 먹은 귀부인 이디스 밴 호퍼의 동반자가 되어 몬테 칼로로 여행을 갔다가 귀족가문의 멋쟁이로 침울한 남자 맥심 드 윈터(올리비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둘은 만난 지 2주 만에 결혼해 콘월의 맥심의 고풍 창연한 저택 ‘맨덜레이’로 온다. 귀신 들린 집과도 같은 ‘맨덜레이’가 영화에서 사람만큼이나 중요한 구실을 한다.  
새 부인을 맞는 사람이 차갑고 도도한 레베카의 하녀 댄버스 부인으로 사망한 레베카에게 아직도 그가 살아있는 듯이 집착하는 댄버스 부인은 드 윈터 부인을 냉정히 영접한다. 댄버스 부인 역의 주디스 앤더슨이 소름끼치는 사악한 연기를 한다. 
그런데 드 윈터 부인은 ‘맨덜레이’ 곳곳에 레베카의 존재와 흔적이 뚜렷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집의 매스터 베드룸 문과 레베카가 쓴 문필도구와 손수건 그리고 침대의 린넨 쉬트 등에 레베카의 두문자 ‘R‘과 드 윈터의 부인을 뜻하는 ‘R de W’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댄버스 부인은 새 부인에게 수시로 레베카의 미와 우아함과 세련미 및 지성에 대해 얘기해 드 윈터 부인은 레베카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 된다. 
이로 인해 드 윈터 부인은 가끔 자기에게 별 이유도 없이 크게 화를 내는 남편과의 관계에 의심을 갖게 되나 그가 아직도 자기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이어 드 윈터 부인은 남편이 ‘맨덜레이’를 비운 사이 집을 방문한 소위 ‘제일 좋은 사촌’이라 불리는 잭 화벨(조지 샌더스)을 만난다. 과연 화벨은 누구인가. 
레베카의 망령에 시달리던 드 윈터 부인은 마침내 댄버스 부인과 정면 대결을 하고 남편으로부터도 레베카와의 결혼생활이 외부에서 보았듯이 완벽한 것이 아니라 자기는 레베카의 방종하고 부도덕한 생활 스타일의 희생자였다는 고백을 받아낸다. 그리고 레베카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남편이 첫 아내가 아니라 자기를 진실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드 윈터 부인은 그 동안의 소녀처럼 순진하던 삶의 태도를 내던지고 ‘맨덜레이’의 안방 주인 노릇을 시작하면서 아울러 레베카의 죽음으로 인해 궁지에 몰린 남편의 충실한 조언자 역을 떠맡는다. 
광기에 휩싸인 댄버스 부인에 의해 ‘맨덜레이’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댄버스 부인은 무너져 내린 천장에 깔려 죽고 영화는 레베카의 침대에 놓인 비단 잠옷 케이스에 새겨진 ‘R’자가 불길에 타면서 끝난다. 순진하고 겁먹은 모습의 폰테인의 연기와 허점이 많은 남자의 연기를 교활하도록 기민하게 해낸 올리비에의 연기가 훌륭하다.  ‘레베카’가 새로 4K 디지털로 복원돼 크라이티리언(Criterion)에 의해 나왔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7년 9월 23일 토요일

성의 대결(Battle of the Sexes)


세기의 테니스 대결에 앞서 기자 회견을 하는 빌리 진 킹(왼쪽)과 바비 릭스.

세기의‘테니스 성 대결’통해 남녀평등 재미있게 터치


지난 1973년 여자 알기를 신발털이 깔개 정도로 아는 쇼비니스트인 55세의 왕년의 테니스 챔피언 바비 릭스(1995년 77세로 사망)와 29세의 여자 테니스 챔피언 빌리 진 킹(73)의 세기의 성의 테니스 대결을 그린 재미있는 코미디성 드라마다. 휴스턴의 애스트로돔에서 야단스러운 행사에 이어 열린 이 경기는 전 세계에서 9,000만 명이 TV를 통해 봤다.
스포츠 영화이지만 그 안에 남녀평등 문제와 동성애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기민하고 진지하게 다루었는데 궁극적으로 보는 사람의 기분을 고양시키는 작품으로 안팎으로 사뿐하고  능률적으로 잘 만들었다. 
빌리 진 킹(엠마 스톤)이 입심이 센 홍보담당자 글래디스 헬드맨(새라 실버맨)의 인솔 하에  동료 선수들과 전국을 돌며 경기를 할 때만 해도 여자 선수들이 받는 돈은 남자 선수들의 12분의 1이었다. 그 때만해도 여자는 남자의 보증 없이는 크레딧 카드를 발급받지 못했다. 
당시 여자 선수들의 경기인 버지니아 슬림스대회가 생겼는데 단연 두각을 나타낸 선수는 킹. 따라서 킹은 보수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아 테니스협회의 간부 잭 크레이머(빌 풀맨)를 찾아가 항의하나 별무 소득. 
킹은 래리 킹(오스틴 스토웰)의 아내로 래리는 아내의 코치요 매니저이자 트레이너. 그런데 킹이 미용사 매릴린 바넷(앤드레아 라이스보로)을 만나면서 둘 사이에 동성애가 싹이 튼다. 래리도 아내의 성적기호에 대해 눈치를 챈다. 그리고 킹은 죄책감과 자신의 미래에 대한 염려로 슬럼프에 빠진다.  
한편 오래 전에 테니스 챔피언이었던 바비 릭스(스티브 카렐)는 백만장자 상속녀 프리실라(엘리자베스 슈)의 건달기 있는 도박광 남편으로 데스크잡에 염증을 느껴 시도 때도 없이 도박에 매달린다. 이를 참고 용서하는 프리실라. 쇼맨인 바비는 다시 한 번 각광을 받을 생각에 킹에게 시합을 제의하나 거절당한다.   
이에 바비는 현 여자 챔피언인 마가렛 코트(제시카 맥내미)와 경기를 치루고 승리한다. 바비가 기자회견을 통해 여자를 마구 깔보고 조롱하는 말을 하는 것을 본 킹은 바비와의 경기를 수락한다. 상금 10만 달러가 걸린 경기다. 이 경기 장면을 옛날 식으로 찍은 촬영이 향수감을 불러일으킨다. 또 영화에는 당시 이 경기를 중계한 하워드 카셀도 컴퓨터로 재생시켰다. 
작년에 ‘라라 랜드’로 오스카 주연상을 탄 스톤이 젊은 시절의 킹과 똑 닮은 모습을 하고 여유만만하면서도 인간미가 넘쳐흐르는 연기를 기막히게 해낸다. 그리고 카렐도 곡예를 하는 원숭이 같은 쇼맨 연기를 활기차게 한다. 보고 즐기기엔 안성맞춤의 영화로 여자들이 박수를 칠 것이다. 발레리 화리스와 조나산 데이턴(‘리틀 미스 선샤인’) 공동 감독의 솜씨가 유연하다. 구식 의상과 프로덕션 디자인 등도 좋다. 보다 극적으로 깊고 강력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PG-13.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빅토리아와 압둘(Victoria & Abdul)


빅토리아 여왕과 압둘이 궁정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영국 여왕과 인도 말단 서기간 우정의 비결은


빅토리아는 영국 여왕이고 압둘은 여왕의 즉위 50주년을 맞아 인도에서 예물을 들고 온 말단 서기의 이름이다. 두 사람의 오래 지속된 뜻밖의 우정의 실화로 얘기가 아기자기하게 재미있고 연기와 촬영과 의상 그리고 프로덕션 디자인과 음악 등이 고루 훌륭한 대중의 입맛에 딱 맞을 시대극이다. 
형식에 얽매인 궁중생활에 싫증과 짜증이 난 여왕이 모든 것이 색다른 이국 인도의 젊고 잘 생기고 격식을 무시하는 남자를 만나 생기와 활기를 찾는 얘기를 유머와 페이소스를 잘 섞어 한 상 잘 차린 풍성한 잔치처럼 내놓았다. 
타지 마할이 있는 아그라에서 선발된 압둘(알리 화잘)과 그의 동료 모하메드(압딜 악타르)는 빅토리아여왕(주디 덴치)에게 바칠 선물을 들고 영국으로 간다. 압둘과 달리 모하메드는 압제자의 나라에 가는 것을 탐탁하지 않게 여긴다. 이어 여왕의 궁중생활이 우습고 재미있게 묘사되는데 격식을 싫어하고 퉁명스러우나 속은 인자하고 현명한 여왕이 식탁에 앉아 닭고기를 손으로 집어 뜯어 먹고 곧이어 조는 모습이 웃긴다.
압둘이 여왕에게 예물을 바칠 때 영국 왕실 관리인의 지시를 무시하고 여왕과 눈을 마주치면서 여왕은 즉시로 이 남자에게 매력을 느낀다. 그리고 압둘은 여왕의 발에 입을 맞추면서 “여왕 폐하에게 봉사하는 것은 몸 둘 바를 모를 특전입니다”라고 말한다. 영화에서 도무지 이해 못할 점은 어떻게 해서 압둘이 정복자요 탄압자인 여왕에게 그렇게 충성과 애정의 표시를 하는 것인가 하는 것. 종이나 하인의 근성으로 영화에서 이에 대해 아무 설명이 없는 것이 흠이다. 따라서 압둘의 개성 묘사도 빈약하다. 
여왕은 관리들의 반대에도 불사하고 압둘을 자기 심복이자 친구요 조언자로 삼고 산책을 하면서 개인적이요 공적인 일들까지 얘기를 나누고 이어 압둘로부터 우르두어까지 배우면서 압둘은 여왕의 선생이 된다. 영화는 대부분 이런 여왕과 압둘의 지극한 관계를 그리고 있는데 둘은 플라토닉한 우정관계이나 애정관계처럼 느껴진다. 
이 관계로 인해 여왕은 소녀처럼 웃고 떠들고 생기와 신선함이 되살아나는데 뒤늦게 압둘이 결혼했다는 것을 밝히고 또 무슬림이라는 것도 드러나면서 두 사람의 관계에 작은갈등이 생긴다. 그러나 압둘을 철저히 믿고 사랑하는 여왕은 압둘의 가족까지 초청해 압둘을 자신의 보좌관처럼 만든다. 여왕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버티(에디 이자드)가 왕이 되면서 압둘과 그의 가족은 인도로 쫓겨난다. 풍경화처럼 아름다운 작품인데 극적 굴곡이 약해 큰 감동은 모자란다.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 PG-13.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팜므 파탈 카르멘




내가 6개월마다 남자를 갈아 치우는 스페인 세빌의 담배공장 여공 카르멘이 단순한 요부가 아니라 여성 자유와 해방의 주창자요 자기 소신을 위해선 하늘과 죽음과도 맞설 용의가 있는 대담무쌍한 여자라는 것을 새삼 깨달은 것은 지난 14일 LA 다운타운의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언에서 오페라 ‘카르멘’(Carmen^사진)을 보고나서였다.
주인공이 담배공장에서 일해 오페라 처음에 “담배는 공기를 향기롭게 해 준다”라는 여공들의 끽연찬양 합창이 있는데 요즘처럼 모든 것이 ‘폴리티칼리 코렉트’한 세상에선 야단맞을 소리다.
뭇 남자들의 욕망의 대상인 카르멘은 자신의 성적 매력이 지닌 힘을 이용해 여자를 우습게 알던 때에 성의 불균형을 깨어버린 여자요 천대받는 집시라는 신분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긴 의기양양한 여자다. 이 정열덩어리 여인이 자신의 사랑과 진실을 위해선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고 운명을 수용하는 것을 보자니 경외심마저 인다. 믿음을 위해 자기 생명마저 바치는 순교자와도 같은 여자다.
비제의 ‘카르멘’은 시종일관 변화무쌍하고 다채로운 음악과 극적인 내용 때문에 팬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작품이다. 이번에도 팬들의 열렬한 요청에 따라 LA오페라는 1회 공연을 추가했다.
이번 공연은 보고 즐기기엔 큰 손색은 없지만 상당히 평범한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돋보인 것이 카르멘 역을 맡은 푸에르토 리코 태생의 소프라노 아나 마리아 마르티네스. 작달만한 체구나 불덩어리였는데 노래는 물론이요 춤과 제스처를 비롯한 동작이 모두 당당하고 정열적이었다. 음성은 청아하면서도 약간 칙칙했는데 마치 밑에서 피어오르는 물 먼지가 건드리는 맑은 냇물과도 같은 음색이다.
그런데 카르멘을 사랑해 함께 살자고 애걸복걸하다가 퇴짜를 맞자 살인을 저지르는 단순한 마음의 호세 역의 테너 리카르도 마시는 덩지만 컸지 카리스마도 노래도 모자랐다. 그리고 마르티네스와의 화학작용도 미적지근해 이 정열적이요 비극적인 오페라의 특성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돈 호세의 라이벌로 투우사인 에스카밀로 역의 베이스 알렉산더 비노그라도프의 노래는 시원했으나 전반적으로 가수들이 별 특색이 없고 노래도 그만 그만했다.
눈요기 거리는 남녀댄서들의 플라멩코. 빨간 드레스에 빨간 부채를 든 여인들과 검은 바지에 흰 셔츠 그리고 빨간 타이를 맨 남자들이 어울려 구두 발로 리드미컬하게 박자를 맞추며 절제된 동작으로 추는 플라멩코가 화사하다. 합창도 좋았고 LA오페라 음악감독 제임스 콘론이 지휘하는 LA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속도 있고 스무스 했다.
‘카르멘’은 여러 편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프란체스코 로시는 플라시도 도밍고(현 LA오페라 총감독)와 줄리아 미제네스-존슨이 주연하는 오페라 영화 ‘카르멘’(1984)을 만들었고 칼로스 사우라는 ‘카르멘’(1983)을 댄스극으로 연출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오토 프레민저가 제작^감독하고 흑인 배우들만 나오는 ‘카르멘 존스’(Carmen Jones^1954)다. 2차대전 때 군인 조(해리 벨라폰테)와 낙하산 제조공장 여공 카르멘 존스(긴 다리 미녀 도로시 댄드리지가 아스팔트도 녹일 화씨 100도짜리 검은 성적 매력을 발산한다) 그리고 권투 챔피언 허스키 밀러(조 애담스)간의 삼각관계를 그렸는데 주옥같은 노래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온다.
댄드리지의 노래는 마릴린 혼이 벨라폰테의 노래는 르번 허처슨이 그리고 애담스의 노래는 마빈 헤이스가 각기 더빙했는데 노래 가사는 뮤지컬 ‘오클라호마!’ ‘카루셀’ ‘남태평양’ ‘왕과 나’ 및 ‘사운드 오브 뮤직’의 가사를 쓴 오스카 해머스틴 II가 썼다.
카르멘이 비록 여권 신장의 선창자이긴 하지만 역시 이 격정적인 여자에게는 치명적인 유혹녀인 ‘팜므 파탈’(femme fatale)의 명칭이 더 잘 어울린다. ‘팜므 파탈’은 자신의 섹스 어필을 동원해 어리숙한 남자를 유혹해 이용한 뒤 파멸의 길로 몰아넣는 요부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범죄영화 장르인 ‘필름 느와르’의 주인공들로 ‘카르멘’의 주인공과 내용은 이 장르의 전형적인 사례다.
아담을 유혹해 인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이브와 천하장사 삼손을 파멸시킨 딜라일라가 원로급 ‘팜므 파탈’. 영화 ‘이중 배상’(Double Indemnity^1944)에서 봉 같은 보험외판원 프레드 맥머리를 유혹해 보험에 든 자기 남편을 살해시키는 바바라 스탠윅과 ‘살인자들’(The Killlers^1946)에서 역시 어리숙한 전직 권투선수 버트 랭카스터를 유혹해 파멸시키는 에이바 가드너도 카르멘과 어깨를 나란히 할 탑 클래스 ‘팜므 파탈’들이다.
‘카르멘’은 23일, 28일 및 10월 1일 세 차례 공연이 남았다. 28일 공연(하오 7시 30분)은 LA다운타운 엑스포지션 공원과 샌타모니카 피어에서 야외에 설치된 스크린을 통해 무료 관람할 수 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