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7년 7월 3일 월요일

‘베이비 드라이버’(Baby Driver)


늘 선글래스를 끼고 있는 베이비 드라이버는 록뮤직을 들으며 도주한다.

도주장면 일품인 강도단의 액션영화
록음악 배경 처리 한편의 뮤직비디오


보고 있으면 피가 끓는 흥분을 느끼게 만드는 초고속 스피드의 강도 액션영화로 록뮤직이 끊임없이 나오고 앳된 청춘 남녀의 고운 로맨스마저 있는 흥미진진한 하이스트(heist) 영화다. 살아서 길길이 날뛰는 사나운 만화영화 같기도 하고 뮤직 비디오 같기도 한데 특히 자동차 추격과 도주 장면이 일품이다. 아찔하다.
한 가지 결점은 후반부에 가서 극심한 유혈폭력이 일어나면서 영화가 만화처럼 처리된 것. 전반부는 코믹 액션 영화 같다가 후반부에 들어 믿을 수 없는 액션이 일어나면서 영화의 톤이 완전히 바뀌어 두 개의 다른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장소는 애틀랜타. 고아 베이비(앤셀 엘고트-‘폴트 인 아우어 스타즈’)는 강도전문 범죄를 계획하는 닥(케빈 스페이시)에 고용된 도주차 운전사. 베이비는 늘 선글래스를 끼고 있고 강도 후 도주하면서도 귀에 꽂은 헤드폰으로 록뮤직을 듣는다. 그가 듣는 록뮤직이 사운드 트랙으로 나오면서 액션에 걸맞는 반주를 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강도와 속도감 있는 도주로 보는 사람의 혼을 빼앗는다. 베이비가 도주차 운전사 노릇을 하는 이유는 그가 닥에게 진 빚이 있어서다. 닥은 강도를 음모할 때마다 매번 범행을 저지를 사람을 바꾼다. 베이비만 상시 고용이다. 
그런데 베이비가 간이식당에 들렀다가 아름다운 웨이트리스 데보라(릴리 제임스)를 보고 첫 눈에 반하면서 마지막 강도를 끝으로 범죄에서 손을 털고 역시 자기를 좋아하는 데보라와 함께 깨끗한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그의 이런 은퇴계획은 물론 뜻대로 되지 않는다. 
닥은 은행 강도를 계획하고 이 범행에 성질이 불같은 버디(존 햄)와 그의 애인 달링(에이자 곤잘레스) 및 배츠(제이미 팍스)가 가담한다. 그런데 이 범행이 삐딱하게 나가면서 자동차 도주와 함께 파괴와 유혈폭력이 난무한다. 그리고 동지였던 베이비와 나머지 강도들이 서로 적이 되면서 베이비 뿐 아니라 데보라의 생명마저 위협을 받는다.
곱상하게 생긴 엘고트가 침착하게 도주 차량의 운전사 노릇을 잘 하면서 영화를 혼자 어깨에 짊어지다시피 하고 있다. 그와 제임스의 콤비도 곱고 나머지 배우들도 잘 한다. 도주 장면 중 경탄을 금치 못할 것은 강도들이 탄 빨간 소형 수바루가 양 옆에서 달리는 같은 모양과 색깔의 수바루와 함께 나란히 달리는 것. 헬기의 경찰이 구분을 못해 안달이 났다. 
영국인 에드가 라이트 감독. R. TriStar.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빅 식’(The Big Sick)


에밀리(왼쪽)와 쿠마일이 소파에 누워 다정한 때를 보내고 있다.

이민자의 문화충돌 따뜻하고 감동적으로 그린 수작


올 해 선댄스 영화제서 극찬을 받아 도대체 얼마나 잘 만들었기에 그런 평을 받았는지 궁금했는데 보고나니 진짜 잘 만들었다. 재치 있고 경쾌하고 사뿐하며 사실적이고 직선적이면서 가슴에 와 닿는 감동적인 로맨틱 코미디다. 
파키스탄 이민자로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쿠마일 난지아니의 실화. 그가 주연하고 그의 미국인 백인 부인인 에밀리 고든과 함께 각본을 썼다. 문화 충돌과 부모와의 갈등 그리고 에밀리의 건강이 엄청난 위기를 맞으면서도 이를 모두 극복하고 사랑으로 맺어지는 두 사람의 얘기가 흠 잡을 데 없이 잘 묘사됐다. 
두 사람이 겪는 위기를 조금 더 심각하게 그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상냥하고 기분 좋은 영화로 특히 에밀리의 부모로 나오는 레이 로마노와 할리 헌터의 연기가 출중하다. 자녀들의 타인종과의 결혼이 보통사가 된 이민자들인 한국인 부모들을 비롯해 모든 세대가 보면 남의 얘기 같지가 않을 것이다.
에밀리는 쿠마일을 스탠드업 코미디쇼에서 만나 둘은 금방 사랑에 빠진다. 문제는 쿠마일은 파키스탄 사람이요 에밀리(조이 카잔)는 백인 미국사람이라는 사실. 쿠마일은 아직 성공한 코미디언이 못 돼 우버 운전사로 밥벌이를 한다.
물론 쿠마일의 보수 전통적인 부모는 아들이 다른 직업을 선택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쿠마일에게 어서 장가가라면서 계속해 파키스탄 처녀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선을 보게 한다. 그러나 쿠마일은 속으로 난 절대로 중매결혼을 안 한다고 작심한 청년이다.
쿠마일은 보수적인 부모 때문에 자기가 에밀리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숨긴다. 이런 사실을 알렸다간 가족에서 쫓겨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밀리가 원인 모를 중병에 걸리면서 그에 대한  대책과 충격으로 청년 쿠마일은 본격적인 어른 쿠마일로 성장하게 된다.
쿠마일이 병원에서 에밀리를 돌보면서 비로소 에밀리의 부모 테리(로마노)와 베스(헌터)를 만나게 되는데 두 사람은 물론 처음에 쿠마일을 냉랭하게 대한다. 그러나 에밀리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이들은 쿠마일이 자기들의 딸을 극진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는다. 그리고 성깔 있는 베스는 완전히 쿠마일의 편이 돼 반 무슬림 데모를 하는 사람들에게 고함을 지르면서 맞서기까지 한다.              
이제 쿠마일은 자기 부모에게 에밀리의 정체를 밝히고 한판 겨룰 만반의 준비를 한다. 물론 영화는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감정적이요 따스하게 해피엔딩! 쿠마일과 카잔(감독 엘리아 카잔의 손녀로 생김새와 연기가 다 귀엽다) 그리고 로마노와 헌터가 모두 연기를 기차게 자연스럽게 잘 하는데 특히 헌터가 앙칼지면서도 속으로는 인정 있는 어머니의 연기를 눈부시게 한다. 상감이다. 마이클 쇼월터 감독.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비가일드’ (The Beguiled)


교장 마사(왼쪽서 네번째) 일행이 북군 존을 대접하고 있다.

여자 기숙사에 온 북군 둘러싼 소동… 겉만 번지르르‘칸영화제 감독상 무색’


필자는 데이빗 린치 감독의 ‘와일드 앳 하트’에게 작품상을 준 칸영화제를 불신하는데 지난 5월 ‘비가일드’를 연출한 소피아 코폴라(프랜시스 코폴라의 딸)에게 감독상을 주는 것을 보고 한층 더 불신하게 됐다. 도대체 이런 폼만 재는 영화를 감독한 사람에게 상을 준 것이 불가사의할 뿐이다.
소피아는 사람도 침착하고 조용하며 연출도 착 가라앉다시피 차분한데 이 영화는 차분하다 못해 무기력할 정도다. 보는 사람 맥 빠지게 하는 영화로 스타일만 있지 나오는 인물들의 성격 개발이나 얘기가 다 턱 없이 모자라고 지지부진하다.
크림 빛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이 학교 맨션 안을 오락가락하다 마는데 작품이 지닌 열정과 라이벌 의식과 질투와 배신과 적대감이 내 뿜어야 하는 열기가 하나도 안 느껴진다. 배우들의 연기도 마찬가지. 이 영화는 지난 1971년 단 시겔이 감독하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한 동명 영화의 리메이크다.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파고드는 햇빛을 찍은 첫 장면부터 촬영과 조명은 좋다. 따라서 외화내빈의 작품이다. 포성이 멀리서 끊임없이 울리면서  남북전쟁 중임을 알려준다. 미 남부 버지니아주의 여자전용 기숙사학교의 한 학생이 버섯을 따러 나갔다가 중상을 입은 북군 존 맥버니(칼린 패럴)를 발견, 학교로 데려간다.
학교에는 교장 마사(니콜 키드만)와 교사 에드위나(커스튼 던스트) 그리고 상급생 알리시아(엘리 패닝) 외에 4명의 여학생만 있다. 이런 여자들의 세계에 잘 생기고 신체 건강한 남자가 나타나면서 여자들 사이에 성적 욕망과 경쟁의식 그리고 질투와 적대감이 악성 전염병처럼 번진다. 존은 여자들의 이런 심중을 파악하고 자신의 매력을 사방팔방에 흩뿌리는데 그 중에서도 에드위나와 눈이 맞아 욕정을 불사른다. 그런데 과연 존은 에드위나를 사랑하는 것인가.
마지막은 여자들이 자신들의 죄(?)에 대한 ‘메아 쿨파’ 식으로 폭력적으로 끝이 나는데 무슨 해괴한 공포영화나 괴물영화를 보는 것 같다. 배우들 간의 교감도 매우 모자라는 성장이 제대로 안된 미숙한 작품이다.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헛것 많이 보는 봉준호




봉준호감독(49)은 7년 전이나 지금이나 성실한 대학생 같은 모습과 자세가 마찬가지다. 7년 전에는 ‘마더’ 홍보 차 LA에 온 그를 만났고 최근에는 스트리밍업체 네트플릭스가 제작한 ‘옥자’를 위해 와 만났다.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콧수염을 한 것.
지난 5월 칸영화제서 경쟁부문에 올랐던 ‘옥자’는 강원도 산골 소녀 미자가 자기가 10년간 키운 수퍼 돼지 옥자가 미 대기업 식품업체 「미란도」에 의해 뉴욕으로 끌려가자 옥자를 찾아 미국에 오면서 일어나는 모험과 액션을 그렸다.
봉감독은 작품의 아이디어에 대해 지난 2010년 차를 몰고 시내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눈 앞에  높이 3^4층짜리의 순하고 내성적인 거대한 돼지가 나타나 방황하는 모습이 보인 뒤로 그 돼지의 앞날이 궁금해 영화를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봉감독은 “나는 이처럼 헛것을 많이 본다”며 웃었는데 이 헛것이란 예술가의 비전일 것이다.
‘스노피어서’로 국제적 감독이 된 봉감독은 ‘옥자’로 그 입지를 더욱 다지게 됐는데 이 영화는 칸영화제 상영 시 극장 상영이 아니라 온라인으로 공개되는 영화라는 점 때문에 큰 논란거리가 됐었다. 그래서 한국의 대형극장 체인들도 28일에 개봉된 ‘옥자’를 보이콧했다.
봉감독은 이에 대해 “극장 측 입장도 이해한다”면서 “그러나 온라인 개봉은 영화 관람의 새 형식으로 나는 이 것과 극장 관람이 평화공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러나 사실 이를 둘러싼 문제는 궁극적으로 영화업계의 것이지 창작자들의 문제는 아니다”고 덧 붙였다.    
봉감독은 네트플릭스가 자기 일에 일절 관여치 않아 자유롭게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면서 음악과 편집 등에서 한국인들을 기용한 것도 다 내 의도대로였다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최근 한국영화계에 대해 예산규모도 커지고 작업환경과 대우도 많이 개선됐다고 말하고 영화의 질적 개선도 낙관적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제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한국영화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오스카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것에 대해 “‘마더’의 김혜자씨가 권위 있는 LA영화 비평가협회에 의해 주연상을 받았듯이 조만간 오스카상도 받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영화에 대한 열정이 가득해 보이는 봉감독은 ‘스노피어서’와 ‘옥자’를 만드느라 근 7년간 해외생활을 하다시피 했다면서 두 영화에 다 나온 틸다 스윈튼과는 친구 같은 사이라고. 스윈튼은 ‘옥자’ 구상 때부터 제작에 개입, 자신의 대사를 본인이 수정하기도 했다.
돼지 이름을 옥자로 지은 것에 대해서는 순 한국적인 것과 유전자를 조작해 수퍼돼지를 생산하는 대기업 「미란도」간의 동^서양 및 신^구식의 대조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봉감독은 스릴러를 잘 만드나 장르감독이 아닌 오퇴르(작가주의 감독)다. 그가 비평가들의 호응을 받는 이유도 장르의 변형적 연출을 통해 오락성과 개인적 색채가 강한 예술성을 훌륭히 결합하기 때문이다. 봉감독은 장르를 따지기 전에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을 원칙으로 여긴다.
봉감독은 이어 미자 역의 안서현은 ‘하녀’를 비롯해 꼬마 때부터 영화와 TV작품에 나온 베테런이라며 ‘옥자’의 캐스팅이 처음에 매우 힘들었으나 안서현을 고른 뒤로 잘 풀려나갔다고 안서현을 칭찬했다.
봉감독의 멘토는 김기영 감독과 쇼헤이 이마무라. 그리고 히치콕도 좋아한다. 그래서 ‘마더’의 어머니는 히치콕의 ‘사이코’의 어머니로부터 다소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알려줬다.
봉감독은 초등학생 때부터 방 안에 틀어박혀 주한미군 방송인 AFKN-TV에서 방영하는 영화를 보면서 영화인의 꿈을 키웠다. 이 때 본 영화 중 깊은 충격과 감동을 받은 영화는 프랑스의 앙리-조르지 클루조가 감독하고 이브 몽탕과 샤를르 바넬이 나온 서스펜스 가득한 ‘공포의 보수’. 그는 특히 바넬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면서 “영화를 빼지 않고 끝까지 보기 위해 오줌을 참느라고 혼이 났었다”며 크게 웃었다.
그는 앞으로 송강호를 기용해 작은 영화를 만들 계획인데 한국영화건 미국영화건 간에 작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한다. 그러면서 “조금만 더 젊었으면 좋겠다”고 하기에 “내 앞에서 그런 말 하면 안 되지”라고 가볍게 야단을 쳤다. 봉감독은 제작자에 대한 예의로 많은 관객이 보는 영화를 만들고 싶지만 돈을 추구하거나 내용을 타협하진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철저한 오퇴르다.
헤어지면서 샌디에고 인근에 사시는 한국영화계의 원로 정창화감독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액션영화를 잘 만드신 감독인줄 알고 있다”면서 인사와 함께 안부를 물었다. 다음에 LA에 오면 함께 정감독을 방문하자고 제의했다. 봉감독과 나는 정답게 악수를 나눈 뒤 헤어졌는데 급히 다음 인터뷰 차 떠나는 그가 자랑스러웠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7년 6월 20일 화요일

슈테판 즈바이크: 유럽이여 안녕(Stefan Zweig:Farewell to Europe)


슈테판 즈바이크가 아내와 함께 차창을 통해 불타는 사탕수수밭을 바라보고 있다.

지적이고 아름답게 그린 유명작가의 브라질 망명생활


1920년대 토마스 만과 함께 독일어 작가로서 많은 독자를 확보했던 유대계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즈바이크의 브라질에서의 망명생활을 시각적으로 지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깊고 아름답게 그린 전기영화다.
다작인 그의 소설 중 대중에게 잘 알려진 것이 ‘모르는 여인의 편지’. 옆 아파트에 이사 온 멋쟁이 피아니스트를 소녀 시절부터 성장해서 까지 사랑한 여인의 얘기로 이 글은 막스 오펄스가 감독한 루이 주르단과 조운 폰테인 주연의 아름답고 비극적인 영화로 만들어졌다.
작가의 몇 개의 특별한 순간들을 중심으로 서술되는데 1930년대 중반에서 1942년 그가 두 번째 부인 로테(애네 슈바르츠)와 함께 브라질의 페트로폴리스에서 자살할 때까지의 삶을 5개의 에피소드와 에필로그로 구성했다.
심리적으로 통찰력 있고 감정적으로 강렬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감독(공동 각본)은 배우이기도 한 여류 마리아 슈라더로 독어 대사에 영어자막.
작가의 타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작가의 성격과 끊임없는 망향을 절실하고 품위있게 묘사하면서 육신은 안전하나 자기 언어의 고향인 조국을 떠나온 작가의 방황하는 마음을 절실히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 즈바이크(요젭 하더)를 환영하는 브라질 대통령궁에서의 만찬장면으로 시작된다. 즈바이크는 나치를 피해 1934년 런던으로 망명했다가 브라질에 정착하는데 영화는 그가 자기를 찬양하는 대도시와 시골마을의 독자들을 찾아 끊임없이 여행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뿌리 없는 망명생활의 모습이다.
이어 1936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열린 국제작가회의. 여기서 즈바이크는 나치정권을 비판하라는 요청을 거절한다. 이유는 변화를 가져올 수 없는 비판은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즈바이크는 이어 아내와 함께 바히아주로 여행을 하는데 차창을 통해 타오르는 사탕수수밭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장면은 불타는 자신의 조국을 바라보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엄격한 영화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시골마을의 엉성한 시장과 그의 직원들이 즈바이크의 방문에 채 때를 못 맞춰 준비하느라 법석을 떠는 장면. 우수와 경쾌함이 병행된 장면으로 넌센스 코미디 같다.
그리고 즈바이크는 1941년 뉴욕에 사는 전처 프리데리케(바바라 주코바)를 방문한다. 여기서 그와 프리데리케는 조국에서 구원을 요청하는 친구들과 친지에 대한 문제를 심각히 논의한다. 에필로그에서는 즈바이크 부부의 시신이 침실에서 발견된다. 배우들의 연기가 위엄이 있고 촬영도 훌륭하다. 일부지역.  ★★★½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황금 투구(Caque D‘or·1952)


저주 받은 사랑의 두 주인공 마리(왼쪽)와 조르지.

질투에 무참히 파괴되는 비극적 사랑
프랑스 명장 자크 베케의 흑백 걸작


프랑스의 명장 자크 베케의 비극적인 흑백 로맨스 걸작이다.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어른들을 위한 숭고한 동화이자 20세기 문턱의 파리의 지하세계의 후진 인간들의 삶과 사랑을 사실적이요 아름답게 그린 탁월한 작품이다. 
가난하고 어두운 과거를 지닌 두 남녀의 사랑과 정열이 타인의 욕정과 질투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는 내용을 시적으로 정감 짙게 그렸다. 특히 제목을 뜻하는 투구모양의 헤어스타일을 한 금발의 명우 시몬 시뇨레의 모습과 연기가 황홀하다.
1900년께. 파리교외 벨빌의 갱두목 펠릭스의 졸개 롤랑의 애인 마리(시뇨레)는 패거리들과 함께 교외로 놀러 갔다가 만난 목수 조르지(세르제 레지아니)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이 때문에 롤랑과 조르지 사이에 주먹다짐이 일어난다. 그런데 펠릭스도 마리를 탐낸다. 
조르지가 갱의 소굴로 마리를 만나러 갔다가 롤랑과 칼부림을 하게 되고 이어 롤랑이 조르지의 칼에 찔려 죽는다. 조르지와 마리는 시골로 사랑의 줄행랑을 놓고 둘은 짧지만 로맨틱한 목가적인 날들을 보낸다. 질투와 복수심에 불타는 펠릭스는 간계를 꾸며 조르지의 친구로 자기 졸개인 레이몽에게 롤랑의 살해범 누명을 뒤집어씌운다. 이를 안 조르지는 자수한다.
한편 마리는 조르지를 구해내려고 펠릭스에게 자기 몸까지 주나 펠릭스는 마리를 배신한다. 이 같은 사실을 안 조르지는 호송 도중 탈출해 길에서 만난 조르지를 권총으로 사살한다. 마지막 장면은 마리가 단두대에서 처형되는 조르지를 목격하는 것으로 끝난다. 
마리가 단두대가 놓인 교도소 마당이 내려다보이는 여관에서 애인의 마지막을 바라보는 모습이 가슴을 울린다. 대사가 별로 없는 단순하고 미적인 영화로 촬영이 감각적이다. 
시뇨레(배우이자 가수인 이브 몽탕의 아내였다)가 가장 아끼는 영화로 예술 혼이 가득하다.
이 영화와 함께 장-폴 사르트르의 희곡이 원작으로 전염병이 창궐하는 멕시코 깡촌에서 만난 상처 입은 영혼을 지닌 두 프랑스 남녀(제라르 필립과 미셸 모르강)의 사랑과 처절한 운명을 그린 ‘오만한 남자와 미녀’(The Proud and the Beautiful·1953년·이브 알레그레 감독)가 19일(오후 7시30분) 에어로(Aero)극장(1328 Montana Ave. Santa Monica)에서 동시 상영된다.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내가 만난 폴란스키




국제적 도망자인 명장 로만 폴란스키(83)의 오디세이는 언제나 끝날 것인가. 폴란스키는 지난 1977년 잭 니콜슨의 집에서 13세난 모델 지망생 새만사 가이머를 강제로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돼 최종 형을 선고 받기 직전 파리로 달아난 뒤 미 사법당국으로부터 지명수배가 내려 지금까지 ‘페르소나 논 그라타’ 취급을 받으며 살고 있다.
그런데 지난 9일 가이머(54)가 LA 형사법정에 출두, 판사에게 폴란스키에 대한 법적 소송절차를 중단해 달라고 요구하면서 또 다시 폴란스키가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다. 가이머는 “나는 이미 과거의 불상사를 극복한지 오래 된다”면서 “폴란스키에 대한 소송절차를 철회함으로써 나와 내 가족을 지난 40년간 따라다닌 미디어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아울러 폴란스키도 여행의 자유를 가지게 해 달라”고 청원했다.
폴란스키는 당시 재판 끝에 90일간의 교도소 정신병동 수감 형을 선고 받은 뒤 42일을 살고 출소했다. 폴란스키는 이로써 형을 완료했다고 믿었으나 담당판사가 당초 약속을 어기고 폴란스키에게 남은 48일을 교도소에서 마저 살고 그 뒤에 자진출국 하든지 아니면 더 긴 형을 내리겠다고 하는 바람에 달아난 것이다. 그 후 폴란스키는 지금까지 미국과 범인 인도협정을 맺은 나라에는 가지 않고 있다.
심리묘사에 뛰어난 폴란스키의 영화들은 공포와 집념 그리고 인간 마음의 탈선 특히 성적 일탈을 자주 그리고 있다. 그의 데뷔작 ‘물속의 칼’과 카트린 드뇌브 주연의 충격적인 심리극 ‘리펄션’ 그리고 미아 패로가 나온 ‘로즈메리의 아기’ 및 폴란스키가 주연도 한 ‘테넌트’ 등이 다 그렇다.
폴란스키가 할리웃에서 만든 영화로 가장 유명한 것이 잭 니콜슨과 페이 더나웨이가 공연한 ‘차이나타운’이다. 그는 지난 2003년 자기 소년시절의 참담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피아니스트’로 오스카 감독상을 탔다. 당시 흥분에 들뜬 폴란스키가 비디오영상으로 오스카 회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폴란스키를 지난 2011년 10월 파리에서 만났었다(사진) 그가 만든 연극이 원작인 4인 드라마 ‘카니지’ 홍보의 일환이었다. 작달막한 키의 폴란스키는 당시 78세라는 나이답지 않게 젊어 보이고 에너지가 가득했다. 장난기 짙은 약간 쥐 상의 아이 같은 얼굴에 총기가 번득이는 눈을 한 그는 쾌활하고 유머와 위트가 있었다. 매우 솔직해 모든 것을 그대로 털어놓았다.
그는 할리웃 귀환 의도에 대해 “요즘은 할리웃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서도 “그러나 할리웃의 친구들과 단골 식당이 그립다”고 고백했다. 그는 자신이 운명론자일지도 모른다면서 “내가 할리웃에 계속해 있었다면 내 생애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폴란스키는 도망자로서의 자기신세를 자조하면서 “여러분들이 ‘카니지’로 내게 골든 글로브상을 줘도 난 할리웃에 가지 못하니 일찌감치 다른 사람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능청을 떨었다.    
그는 자신의 젊음의 이유를 일단 유전자 탓으로 돌린 뒤 “스포츠하고 좋은 음식 먹고 시가를 빼고 금연하기 때문”이라고 그 비결을 고백했다. 폴란스키는 이어 반세기가 넘도록 영화를 만드는 동기의 원동력을 “새로운 것을 하고 싶은 도전정신”이라며 “그러나 작품의 주제가 날 움직여야한다”고 덧 붙였다. 폴란스키의 아내는 배우인 에마뉘엘 세녜(50)로 폴란스키는 아내와 해리슨 포드를 사용해 서스펜스 스릴러 ‘프랜틱’을 만들었다.
유대인인 폴란스키는 파리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모와 함께 아버지의 고향인 폴랜드로 이주했다. 2차대전이 나면서 그의 부모는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 갇혀 어머니는 개스 처형됐다. 그 후 폴란스키는 크라카우의 유대인게토를 탈출, 시골을 전전하며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면서 선한 타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남았다.
폴란스키의 많은 영화들이 보는 사람 심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데는 그의 이런 어린 시절의 악몽과도 같은 경험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는 또 할리웃에서 활동할 당시인 지난 1969년 임신한 아내로 배우인 샤론 테이트(26)가 현재도 수감 중인 맨슨가족에 의해 살해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미국의 법이 이제 그만 관용을 베풀어 폴란스키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할리웃에 돌아와 탁월한 재주와 실력을 발휘해 만든 영화를 보고 싶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