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7년 1월 20일 금요일

붉은 거북이(Red Turtle)


남자가 섬을 떠나려 하자 큰 붉은 거북이가 훼방을 놓는다. 

무인도에 표류한 남자… 자연과 공존을 아름답게 그린 무언극 만화영화


인간과 자연의 평화공존을 신비한 기운 속에 그린 우화요 동화이자 전설이요 신화 같은 영화로 단순한 선과 아름다운 색채로 그린 무언극 만화영화다. 
네덜랜드계 영국인 만화가 마이클 두독 데 비트(1994년 ‘승려와 물고기’로 오스카 단편 만화영화상 수상) 가 감독한 이 영화는 플롯이 매우 단순하나 그런 단순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는 남녀노소(그러나 아주 어린 아이들보다는 어른들에게 더 어울릴 것이다) 모두 즐길 수 있는 명상적인 작품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바람이 분다’ 및 ‘이웃집 토토로’ 등을 만든 하야오 미야자키와 이사오 타카하타(이 영화의 애니메이션을 공동제작)가 공동으로 창립한 만화영화사 스튜디오 기빌리가 공동으로 제작했는데 영화를 보면 기빌리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요와 간단한 것이 지닌 미학과 힘을 깨닫게 해주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영화다.
이름 없는 남자가 표류해 무인도에 도착해 자연과 다투고 공존하면서 생존의 지혜를 터득하는 얘기다. 남자는 뗏목을 만들어 섬을 떠나려고 하는데(‘캐스트어웨이’의 탐 행스 같다) 뗏목을 띠워 바다로 나갈 때마다 해저로부터 거대한 붉은 거북이가 뗏목을 치받고 올라와 번번이 실패한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남자는 거북이를 때려뉘어 모래 위로 끌고 가 죽기를 기다리는데 거북이가 꿈틀대며 변신해(영화에 자주 나오는 여러 모양의 변신 과정이 매우 신비하고 보기 좋다) 긴 머리를 한 아름다운 여자가 된다. 
그리고 둘은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가 되어 아이도 낳고 세상의 부부처럼 산다. 둘의 단순한 삶은 가끔 자연의 강렬한 힘의 시련을 받는데 그 중 장관인 것은 쓰나미로 섬의 숲이 완전히 쑥대밭이 되는 것. 
잉크와 수채로 그린 그림이 유연한 애니메이션에 의해 생명을 띠고 화면에서 살아나는데 짧지만(상영시간 80분) 깊이와 폭과 아름다움을 지닌 작품이다. 가족과 생존 그리고 실낙원의 이야기로 정수만 갖춘 로빈슨 크루소의 삶이라고 하겠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작품 속으로 더욱 빨려 들어가게 되는 산수화 시와도 같은 아늑한 작품이다. 음향효과가 좋다. PG.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화운더(The Founder)


레이 크락(중간)이 미네소타지점을 차린 뒤 종업원들과 함께 축하하고 있다.

맥도널드 제국을 창설한 레이 크락의 실화 영화


맥도널드의 음식이 결코 자양분이 풍부하고 맛이 있는 것이 못 되듯이 이 영화도 내용이 견실하지 못하고 전반부와 후반부가 균형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어정쩡한 작품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끔 별식으로 맥도널드의 버거를 먹듯이 이 영화도 맥도널드 제국을 창설한 레이 크락의 실화라는 점에서 호기심 거리는 충분히 된다.
크락은 자본주의(자본주의 비판영화라고 하기엔 모질지가 못하다)가 낳은 전형적인 사업가이자 협잡꾼인데 그의 맥도널드 제국은 처음에 사실 자기 것이 아니라 남의 버거가게 이름과 메뉴를 빌린 뒤 궁극적으로 이를 가로채 세운 것이다. 따라서 영화는 어둡고 냉소적인 분위기를 지녀야 하는데도 잔 리 행콕 감독은 무엇이 두려운지 이런 모진 것을 다독인 솜방망이 터치로 연출해 소스가 빠진 버거를 먹는 맛이다.
50줄에 든 크락(마이클 키튼)의 얘기로 시작된다. 체코에서 이민 온 부모 밑에서 시카고에서 성장한 세일즈맨 크락은 주머니에 술이 담긴 플래스크를 넣고 다니는 술꾼으로 쉐비를 몰고 다니면서 밀크쉐이크를 만드는 믹서를 판다. 집을 자주 비우는데다 술꾼이어서 양처인 아내 에셀(로라 던)과의 관계가 안 좋다. 
세일즈 여행 중에 크락은 비서 준(케이트 니랜드)으로부터 캘리포니아주 남부 샌버나디노의  맥도널드 버거가게로 부터 여러 대의 믹서를 주문받았다는 전갈을 받는다. 크락이 찾아간 패스트푸드 가게는 맥과 딕 맥도널드형제(잔 캐롤 린치와 닉 오퍼맨)가 경영하는데 이들은 손님들이 주로 찾는 메뉴만 집중적으로 만들어 신속히 재공하면서 문전성시를 이룬다. 형제의 모토는 최고의 품질 버거다. 
이를 본 영악한 크락은 형제에게 가게를 확장하라고 종용, 메뉴와 식당 이름과 맥도널드의 상징인 ‘황금 아치’의 프랜차이즈권을 얻어 자기 고향이 있는 일리노이에 가게를 차린다. 크락은 아내에게 알리지도 않고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려 식당을 차려 아내와의 관계가 극도로 나빠진다.       
그리고 사업이 성공하면서 크락은 지점을 확장하는데 이 과정에서 한 지점의 주인(패트릭 윌슨)의 금발미녀 아내 조운(린다 카델리니)과 눈이 맞는다. 
크락과 조운은 둘 다 돈벌이에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들로 크락은 조운의 독려를 받으며 맥도널드형제를 배신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이를 촉진하는 것이 크락의 재정자문인 해리(B.J. 노백)의 아이디어. 즉 프랜치이즈 확장의 관건은 버거가 아니라 부동산에 있다는 것. 
여기서부터 크락은 일종의 악마처럼 변신, 맥도널드형제를 완전히 배신하고 상호와 ‘황금 아치’까지 빼앗는다. 
그리고 영화의 색조와 음조도 여기서부터 전반부의 밝고 경쾌한 분위기에서 다소 어두운 기운으로 변이하나 진짜로 어둡고 가혹하다기 보다 온건해 짜릿한 느낌이 모자란다. 볼만한 것은 키튼의 연기. 아첨 떠는 세일즈맨에서 인정사정 없는 사업가로 변신하는 과정을 다채롭게 해낸다. PG-13. Weinstein.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미셸 모르강


프랑스 영화 ‘안개 낀 부두’의 주인공인 탈영병 장은 항구도시 르 아브르의 싸구려 술집에서 만난 넬리를 보고 “당신은 눈은 참으로 아름다워요”라고 사랑의 언어를 건넸다. 이 아름다운 눈을 지녔던 넬리 역의 미셸 모르강(Michelle Morgan^사진)이 지난 12월 20일 96세로 프랑스의 뫼동에서 사망했다.
영혼에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모르강의 눈을 닮았을 것이다. 그의 눈은 신비에 감싸인 깊고 맑은 호심과도 같아 보는 사람을 익사토록 유혹한다. 그래서 모르강의 부음을 들은 프랑솨 올랑드 대통령도 “모르강은 프랑스의 관객들을 사로잡은 눈을 지녔던 전설”이라고 애도했다. 모르강의 회고록 제목도 ‘이 눈들로써’이다.
내가 모르강의 눈을 처음 보고 최면에 걸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영화가 역시 ‘안개 낀 부두’(Port of Shadows^1938)다. 시인이자 극본가인 자크 프레베르가 극본을 쓰고 명장 마르셀 카르네가 감독한 이 영화는 1930년대 프랑스 영화계에 유행했던 시적 사실주의의 대표작으로 염세적 분위기가 짙은 안개처럼 작품 전체에 깔려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인 고독한 두 남녀와 그들의 주변 인물들은 이 운명 같은 안개 때문에 사랑하고 헤어지고 자살하고 살인을 저지른다고 해도 되겠다. 모든 것이 안개 탓이다.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안개와 음습한 기운과 불길한 분위기를 찍은 흑백촬영이 아름다운 ‘안개 낀 부두’의 남자 주인공은 군모를 삐딱하게 쓴 탈영병 장(장 가방). 장이 안개가 자욱한 비 내리는 밤 지나가던 트럭을 세워 운전사와 함께 르 아브르로 간다.
장은 르 아브르에서 가짜 여권을 얻어 항구에 정박한 유령선처럼 을씨년스런 검은 화물선을 타고 베네수엘라로 튀어 새 인생을 살아 보려고 이곳에 왔다. 장은 부둣가의 씨구려 술집에서 역시 현실에서 도주하려는 투명한 비닐 레인코트에 베레모를 쓴 넬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그러나 둘의 사랑은 애초부터 처형을 당한 것. 장은 넬리를 소유한 자벨(미셀 시몽)을 살해하고 배를 타기 위해 가다가 갱스터의 총을 맞고 넬리의 품에 안겨 죽는다. 종잇장처럼 얇은 입술에 큰 코를 한 과묵한 가방과 저 세상 여자 같은 모습의 모르강의 가라앉은 연기와 둘의 콤비가 보기 좋다. 절망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영화다.
염세적 색감을 머금은 이 영화는 그 성질 때문에 나치 점령 하 프랑스의 괴뢰정권 비시정부로부터 “프랑스가 전쟁에 진 것은 ‘안개 낀 부두’ 탓”이라는 엉뚱한 소리를 들었고 상영 금지 조치를 받았다.
시적 사실주의는 주로 파리의 주변을 무대로 한 노동자 계급의 도시 드라마로 어둡고 염세적인 분위기가 특징이다. 신화 속 존재 같은 남자들이 주인공으로 이들은 범죄를 저지르고 저주 받은 사랑을 하다가 대부분 처절한 종말을 맞는다. 전쟁의 암운이 하늘을 가린 1930년대 당시 프랑스인들의 절망과 허무를 대변했는데 뛰어난 형식미 속에 서민층의 각박한 일상과 함께 서정적이요 감정적인 무드를 안고 있다.
‘안개 낀 부두’ 외에 장 가방이 나온 또 다른 좋은 시적 사실주의 영화들로는 ‘페페 르 모코’(Pepe le Moko^1931)와 ‘새벽’(Daybreak^1939) 등이 있다.        
본명이 시몬 르네 루셀인 모르강은 파리 교외의 부유층 동네에서 태어나 15세 때 배우가 되려고 집을 떠나 파리로 왔다. 미셸 모르강은 그가 영화에 엑스트라로 나올 때 지은 예명이다. ‘안개 낀 부두’는 모르강의 두 번째 주연 작품으로 모르강은 이 영화로 대뜸 스타가 되었다.
모르강은 프랑스가 나치의 침공을 받으면서 1940년에 할리웃으로 왔다. 여기서 프랭크 시내트라가 노래하는 뮤지컬 ‘하이어 & 하이어’(Higher & Higher^1943)와 험프리 보가트가 나온 전쟁영화 ‘마르세유로 가는 길’(Passage to Marseille^1944) 등 몇 편의 영화에 나오긴 했으나  타작들이다. 1942년 미국인 B급 배우이자 감독인 윌리엄 마샬과 결혼해 아들을 두었으나 6년 후 헤어졌다.
모르강의 배우로서의 생애는 전후 프랑스로 귀국하면서 만개했다. 귀국 후 첫 영화인 ‘전원 교향곡’(Pastoral Symphony^1946)으로 모르강은 칸영화제 최초의 여우주연상을 탔다. 앙드레 지드의 글이 원작인 이 영화에서 모르강은 자기를 데려다 키워준 아내와 자식이 있는 목사의 사랑을 받는 눈 먼 게르트뤼드로 나와 깊고 고요하며 엄격히 절제된 연기를 보여 주었다. 모르강의 영어영화로 유명한 것이 영국감독 캐롤 리드가 만든 ‘추락한 우상’(The Fallen Idol^1948)이다. 이 영화는 그래암 그린의 소설이 원작으로 아내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하인(랄프 리처드슨)을 우상처럼 여기는 소년의 드라마인데 모르강은 하인의 젊은 연인으로 나온다.
모르강은 30여 년의 연기 생활을 통해 총 60여 편의 영화에 나왔다. 그와 함께 일한 프랑스의 명장들로는 르네 클레망, 장 그레미용, 클로드 오탕-라라, 이브 알레그레, 사샤 귀트리, 르네 클레어, 앙리 베르뇌유, 로베르 오셍, 클로드 샤브롤 및 클로드 를루쉬 등이 있다.
할리웃의 바인 스트릿에 있는 ‘명성의 거리’에 모르강의 이름이 적힌 별이 있다. 아디외 모르강!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7년 1월 17일 화요일

줄리에타(Julieta)


줄리에타(앞)와 소안은 열차 안에서 만나 뜨거운 정사를 나눈다.

내용과 색깔이 모두 기이할 정도로 다채로운 작품을 만드는 스페인의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20번째 영화로 그의 다른 작품인 ‘볼베르’와 ‘토크 투 허’처럼 여성이 주인공인 가족 멜로드라마이다. 운명과 상심, 죄의식과 기억에 관한 명상적인 작품으로 시간대를 오락가락 하면서 과거와 현재가 교차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기억에서 소멸시키려고 하는 사람과 이에 역주행하는 사람의 상반된 감정이 세월을 거쳐 신비한 기운에 안겨 이야기 되는데 약간 히치콕 스타일을 따른 장면도 있다. 
플롯이 질서 정연히 이어지지 않아 다소 산만하고 알모도바르의 뛰어난 다른 작품보다 처지긴 하나 흥미 있는 작품이다. 
눈부신 것은 주인공 줄리에타의 젊었을 때와 나이 먹었을 때의 역을 각기 맡은 두 배우의 연기와 적색과 청색 그리고 황금색 등으로 채색된 색채. 색깔은 작중 인물과 내용을 불타는 듯이 대변하고 있다. 이와 함께 디자인과 소품 등까지 작품의 내성을 감지시킨다.
마드리드에 사는 중년의 여류문학가 줄리에타(엠마 수아레스)는 포르투갈로 주거를 옮기게 위해 애인 로렌조(다리오 그란디네티)와 함께 짐을 싼다. 
잠깐 밖에 나간 줄리에타가 자기 딸 아니타의 어릴 때 친구를 만나면서 줄리에타는 이사와 로렌조를 다 포기하고 불확실의 미로로 빠져든다.
그리고 줄리에타의 과거가 회상된다. 짧은 금발의 젊고 아름다운 줄리에타(아드리아나 우가르테)가 야간열차를 타고 가다가 열차 안에서 정체가 다소 불분명한 늠름하고 토속적인 냄새가 나는 소안(다니엘 그라오)을 만나 달리는 열차 속에서 뜨거운 정사를 나눈다. 
이어 둘은 소안이 사는 해안 마을의 집에서 동거에 들어간다. 그리고 줄리에타는 딸 아니타를 낳는다. 
이어 죽음이라는 비극이 일어나면서 모녀는 깊은 슬픔에 시달리는데 비극과 슬픔이 둘 사이를 점차 멀리 떼어 놓는다. 그리고 아니타(블랑카 파레스)는 18세가 되면서 어머니에게 아무 말도 안 남기고 집을 나가버린다. 
줄리에타는 그 뒤로 딸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쓰나 찾지 못해 심신이 피폐해진다. 줄리에타가 딸의 옛 친구를 만난 뒤 이사와 애인마저 포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간은 거의 치명적인 슬픔마저 치유하지만 그 과정에서 엄청난 상처를 남기는데 이런 삶의 잔인함에 지쳐 후줄근해진 중년의 줄리에타의 모습을 수아레스가 깊이와 함량을 갖춰 연기한다. 이에 반해 삶의 쾌락을 탐하는 젊은 줄리에타를 우가르테가 생동감 넘치게 보여준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봉하고 무언으로 감추려는 여인의 드라마로 스페인어 원제는 ‘침묵’이었으나 현재 상영 중인 마틴 스코르세지의 ‘침묵’과 혼동될 것을 우려해 ‘줄리에타’로 바꿨다. R. Sony Pictures Classics. 랜드마크(피코와 웨스트우드) 플레이하우스7(패사디나). ★★★1/2(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골든 글로브‘라 라 랜드’잔치


‘라 라 랜드’의 감독 데미언 차젤과 남녀 주연상(뮤지컬/코미디)을 탄 라이언 가슬링과 엠마 스톤(왼쪽부터).

작품상^남녀주연상 등 총 7개 부문 최다 수상
생애업적상 메릴 스트립, 트럼프 비판 수상소감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가 주관하는 제74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은 ‘라 라 랜드’(La La Land)의 잔치였다. 지난 8일 베벌리 힐스의 베벌리 힐튼호텔에서 거행된 시상식에서 작품상(뮤지컬/코미디)을 비롯해 남녀주연상 등 모두 7개 부문에서 수상 후보에 오른 이 영화가 7개 부문의 상을 다 타면서 골든 글로브사상 최다 수상작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는 필자를 비롯해 나이 먹은 사람들이 전체 회원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HFPA가 이 같은 복고풍의 뮤지컬을 매우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실례다. 이로써 이 영화는 오는 24일에 발표될 오스카상 후보작들 중에서도 선두를 달리게 됐고 마지막 영광을 누릴 가능성도 커졌다.
‘라 라 랜드’는 할리웃에서 성공하려고 몸부림치는 두 젊은 남녀(라이언 가슬링과 엠마 스톤)의 매력적이요 아름다운 작품으로 가슬링과 스톤이 각기 남녀주연상(뮤지컬/코미디)을 탔다. 이 밖에도 이 영화는 감독과 각본(데미언 차젤) 그리고 음악과 주제가상을 탔다. 차젤(‘윕래쉬’)은 이로써 이날 3관왕이 됐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각본상을 탄 것은 다소 이변이다.  
‘투나잇 쇼’의 지미 팰론이 사회를 본 시상식은 ‘라 라 랜드’의 첫 장면을 본 딴 올스타 캐스트의 춤과 노래를 담은 필름으로 시작됐는데 여기서부터 ‘라 라 랜드’가 여러 부문에서 상을 탈것이라는 조짐이 느껴졌다.
작품상(드라마) 등 총 5개 부문에서 수상 후보에 올랐던 ‘바닷가의 맨체스터’(Manchester by the Sea)는 케이시 애플렉이 남자주연상을 타는 것으로 끝났다. 고통스런 과거를 지닌 남자의 자기 치유와 소생의 이 드라마는 남자주연상과 함께 작품과 각본상 수상이 유력했었다.
작품상(드라마) 등 총 6개 부문에서 수상후보에 올랐던 ‘문라이트’(Moonlight)는 시상 맨 마지막에 있는 작품상 수상작이  발표되기 전까지 단 한 개 부문에서도 상을 못 타 영패를 면치 못할 것처럼 보였으나 최후에 ‘바닷가의 맨체스터’를 제치고 작품상을 타는 영광을 누렸다. 이 영화는 마이애미인근의 달동네에 사는 흑인소년의 성장과 동성애자로사의 자기 정체를 수용하는 얘기를 세 개의 시간대로 나누어 그린 부드러운 드라마다.
시상식 전까지만 해도 이 영화에서 소년을 자기 품 안에 받아들이는 마약딜러로 나오는 마헤르샬라 알리가 남자조연상을 탈 것이 거의 확실했으나 뜻밖에도 이 상은 ‘야행성 동물’(Nocturnal Animals)에서 흉악무도한 모녀납치범으로 나온 아론 테일러-잔슨이 탔다. 시상식 첫 이변이었다.
이 날 가장 놀라운 일이라 할 것은 강간을 당한 50대의 여자가 희생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복수자로서 여성의 힘을 행사하는 프랑스영화 ‘엘르’(Elle)의 주인공인 이자벨 위페르가 여자주연상(드라마)을 탄 것. 위페르는 미국의 내로라하는 에이미 애담스, 제시카 체스테인, 나탈리 포트만과 신인 영국배우 루스 네가를 제치고 상을 탔는데 이 베테런 배우가 골든 글로브상을 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로써 위페르는 오스카상 후보에 오를 가능성이 높아졌다.
‘원초적 본능’을 만든 네덜랜드 감독 폴 베어호벤이 연출한 ‘엘르’는 여자주연상과 함께 외국어영화상도 타 2관왕이 됐다. 필자를 포함한 외국인 기자들로 구성된 HFPA가 위페르에게 주연상을 준 것은 어쩌면 놀랄 일도 아니다.        
한편 여자조연상은 덴젤 워싱턴이 감독한 오거스트 윌슨의 무대극 ‘울타리’(Fences)에서 피츠버그의 쓰레기차 용원으로 집안을 독재자처럼 지배하는 남편(워싱턴)의 횡포와 허세를 인내와 예지로 견디어내는 아내 역을 한 바이올라 데이비스가 탔다. 만화영화상은 디즈니의 ‘주토피아’(Zootopia)가 받았다.
한편 이번 시상식에서는 지난 달 세상을 떠난 할리웃 뮤지컬과 코미디의 수퍼스타 데비 레놀즈와 그보다 하루 먼저 타계한 배우이자 작가인 딸 캐리 피셔를 기리는 필름모음을 내보내 장내를 숙연케 했다.    
그러나 이날 무엇보다도 시상식 장내를 침묵으로 잠기게 한 뒤 열화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은 것은 생애업적상인 세실 B. 드밀상을 탄 메릴 스트립의 수상소감이었다. 스트립은 상을 탄 후 직접 이름을 거명하지 않고 도널드 트럼프 차기 미대통령을 신랄하고 준엄하게 비판했다.
스트립은 “할리웃은 국외자들과 외국인들이 가득한 곳으로 우리가 그들을 모두 내쫓는다면 당신들은 예술이 아닌 풋볼과 종합무술 밖에 볼 것이 없게 될 것”이라면서 트럼프의 외국인 기피증을 꾸짖었다.
그는 이어 트럼프가 유세중 지제부자유자인 뉴욕타임스의 기자 세르게이 코발레스키의 흉내를 낸 것에 대해 “그것은 올 해 나를 아연케 만든 연기였다. 나는 그것을 보았을 때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아직도 그것을 내 머리 속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화가아니라 실제 삶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분개해 했다.
스트립은 또 트럼프의 인간을 모멸코자하는 본능을 개탄하면서 “힘 있는 자들이 그들의 위치치를 위협용으로 쓴다면 우린 모두 잃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트럼프는 몇 시간 후 트위터를 통해 이렇게 반박했다. “메릴 스트립은 할리웃에서 가장 과대평가 받고 있는 배우 중 하나다. 그는 나를 모르면서도 어제 밤 골든 글로브시상식에서 나를 공격했다. 그는 대패한 힐러리의 추종자이다.” 대통령답지 못한 반응이다.
사실 이날 트럼프에 대한 힐난은 팰론의 첫 인사말부터 시작됐다. 팰론은 서두에서 “골든 글로브는 미국에서 아직도 일반투표를 존중하는 몇 안 되는 곳 중의 하나다”라면서 실제 유권자의 지지 투표수는 힐러리 보다 적었으나  선거인단수로 이긴 트럼프를 빗대어 조롱했다.
그리고 ‘야근 매니저’(The Night Manager)로 TV드라마 시리즈 부문(HFPA는 TV부문에 대해서도 시상한다) 국제적 무기 밀매상 거부로 나와 남자조연상을 탄 영국배우 휴 로리도 매섭게 트럼프를 공격했다. 로리는 수상소감에서 “이번이 마지막 골든 글로브 시상식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할리웃’과 ‘포린’과 ‘프레스’라는 단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면서 “ 이 상을 모든 곳의 사이코 억만장자를 대신해 받는다”고 말했다.
이번에  처음으로 시상식 호스트를 맡은 지미 팰론의 사회는 톡 쏘는 맛이 없는 무덤덤한 것이었다. 작년과 그 전에 몇 차례 사회를 본 독설가 릭키 제르베즈의 할리웃과 HFPA를 조롱하는 신랄한 농담이 결여돼 맹물 먹는 맛이었다.
그런데도 NBC-TV를 통해 전 세계로 생중계된 시상식의 시청률은 작년보다 8% 높아져 전 미국에서 2,000만명이 시상식을 시청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굿 럭 이자벨”


골든 글로브 시상식이 열리는 베벌리 힐스의 베벌리 힐튼 호텔로 연결된 레드 카펫을 밟는 스타들을 향해 야외 석에 앉은 팬들이 스타들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음에 가까운 환호성을 지른다. 아예 도시락과 물까지 싸들고 온 팬들도 보인다. 팬들 뿐만이 아니다. 레드 카펫 옆으로 일렬횡대로 선 전 세계서 온 기자들도 스타들에게 인터뷰를 청하느라 고함을 지른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골든 글로브 시상식을 주최하는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의 회원인 나는 지난 8일 거행된 제74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의 레드 카펫 안내원 노릇을 했다. 스타들에 대한 우상 숭배와도 같은 팬들의 열광 속에 레드 카펫을 오라가락 하면서 도대체 스타란 무엇인가 하고 자문했다.
영화란 결국 미몽이요 허상이자 대리만족의 잔영일진대 그런 업무를 수행하는 스타들 역시 신기루와도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이날 생애업적상인 세실 B. 드밀 상을 받은 메릴 스트립은 배우를 이렇게 정의했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것이 어떤 느낌을 지녔는지를 당신들로 하여금 느끼도록 만들어주는 사람들이다.”
매년 레드 카펫에서 보는 여자가 ‘하이 눈’과 ‘그날이 오면’ 그리고 ‘흑과 백’과 같은 명화를 제작하고 감독한 스탠리 크레이머의 딸 캐서린 크레이머다. 마침 얼마 전에 TV로 ‘그날이 오면’을 다시 봐 캐서린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고 그의 아버지 얘기를 잠시 나눴다. 캐서린은 “올해가 아버지가 만든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개봉 50주년이 되는 해”라며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팬들이 “에이미”라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돌아보니 이날 ‘어라이발’로 여우주연상(드라마) 후보에 오른 에이미 애담스가 카펫을 밟고 온다. 스타들의 인기에 비례해 팬들의 환호도 높아지는데 저스틴 팀벌레이크가 나타나자 팬들이 “저스틴, 저스틴”이라며 아우성을 친다. 스타란 자기를 알아주는 인식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어서 팬들의 이런 반응이야말로 그들에겐 필수적인 충전과도 같은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얼음색 푸른 드레스를 입고 카펫을 밟기에 용기를 내 찾아가 악수를 나누고 “당신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난 당신을 사랑 한다”고 고백했다. 이자벨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당신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고 묻기에 “한국”이라고 알려줬더니 “그럼 내 친구 홍상수도 알겠네”하며 반긴다. 모습이 고상하다.
이날 ‘엘르’로 여우주연상(드라마) 후보에 오른 이자벨과 사진을 찍은 뒤(사진) 식장으로 들어가는 그를 향해 “굿 럭 이자벨”이라고 소리쳤더니 이자벨이 뒤 돌아보면서 미소를 짓는다. 내 “굿 럭”이 신통력을 발휘했는지 이자벨은 주연상을 탔고 ‘엘르’는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나도 이자벨과 영화에 표를 던졌다.
키다리 베테런 명우 존 리트가우도 만났다. 나는 그를 오래 전에 UCLA의 공연장인 로이스 홀에서 만나 목례를 나눈 적이 있어 “요즘도 로이스 홀에 가냐”고 물었더니 “물론이지”라며 반가워했다. 리트가우는 TV시리즈 ‘크라운’에서의 처칠 역으로 조연상 후보에 올랐는데 내가 “당신 처칠 역하기엔 키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커도 훨씬 크지”라며 활짝 웃었다. 그는 이어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자 “박찬욱의 ‘아가씨’ 정말 잘 만들었더라”며 칭찬했다.
시상식 개막이 가까워지면서 별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팬들은 잃어버렸던 가족 만난 것처럼 반가워한다. 샴페인이 흘러넘치는 골든 글로브 시상식은 오스카 시상식과 달리 먹고 마시고 떠드는 가운데 진행되는 스타들의 파티나 마찬가지다. 원조 ‘배트맨’으로 유명한 마이클 키튼은 시상식 전부터 식장에 딸린 오픈 바에서 칵테일을 시켜 들고 제 자리로 갔다. 나도 그를 따라 스카치 온 더 락스를 한잔 시켰다.  
스타들은 식 중에도 자리를 떠 오픈 바 옆 발코니로 나가 끽연들을 하는데 이날 ‘골리앗’으로 TV시리즈 남우주연상을 탄 빌리 밥 손턴은 손에 골든 글로브를 쥔 채 담배를 태운다. 역시 끽연하는 로렌스 피시번과도 인사와 함께 짧은 대화를 나눴다. 모두들 인터뷰를 통한 구면이어서 친구처럼 반갑다.
이 파티 저 파티 장으로 다니다가 이날 ‘핵소 리지’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신병 훈련 교관 역으로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던 쾌활한 빈스 본을 만났다. 내가 “야 당신 진짜 겁나더라”고 추켜세웠더니 “그렇지. 해피 뉴 이어”라며 큰 미소를 지었다.
골든 글로브 시상식은 시상식보다 식 후 여러 영화와 TV사에서 여는 파티가 더 인기 있다. 인 스타일/워너 브라더스, HBO, 폭스, NBC/유니버설/E!, 와인스틴/네트플릭스, WME 및 아마존 스튜디오 등이 각기 먹을거리와 술과 음악을 제공하며 손님들을 맞는데 파티장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난 대충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7년 1월 11일 수요일

데비 레놀즈 별세...“딸과 함께 있고 싶어”


데비 레놀즈(왼쪽)와 딸 캐리피셔.

1953년‘사랑은 비를 타고'로 스타 대열에 올라
‘스타 워즈’캐리 피셔 딸 사망 하루 만에 숨져


내가 아메리칸 스위트하트라 불리며 미국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할리웃 황금기 빅 스타 데비 레놀즈를 스크린에서 처음 만난 것은 ‘그것은 키스로 시작했다’(It Started with a Kiss·1959)였다. 고등학생 때 명동극장에서 본 하찮은 코미디로 데비의 상대역은 글렌 포드였다. 영화보다는 데비가 참 귀엽고 예쁘구나 하고 탐을 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지난 2011년 6월 데비를 직접 만났을 때 난 그에게 “글렌 포드와의 키스가 얼마나 화끈했느냐”고 물었더니 데비는 “포드는 굿 키서였다”며 활짝 웃었다.
내가 이어 데비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자신을 한국 사람이라고 소개하자 데비는 “나 한국전 때 한국에 갔었는데 좋지 않은 때였지”라며 반가워했다. 데비는 그 때 한국전 참전 미군들을 위문하기 위해 방한했었다.
HFPA 회원들에게 소장품을 설명하고 있는 데비 레놀즈.
착한 이웃집 처녀와도 같았던 데비 레놀즈가 지난 달 28일 뇌일혈로 84 세로 타계했다. ‘스타 워즈’의 레아공주로 유명한 딸 캐리 피셔가 사망한지 하루 만에 딸을 따라 갔다. 데비를 임종한 아들 타드 피셔에 의하면 어머니는 “딸과 함께 있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할리웃의 전설이었던 데비 레놀즈 하면 대뜸 떠오르는 영화가 ‘사랑은 비를 타고’(Singin‘ in the Rain·1953)이다. 방년 18세의 데비가 진 켈리와 도널드 오카너와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영화 소장품 경매장에서 필자와 데비 레놀즈.
명품 뮤지컬로 데비는 이 영화로 대뜸 스타가 됐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데비는 1950년부터 196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전성기에 30여 편의 뮤지컬과 가벼운 코미디에 나왔는데 대부분 평범한 것들이다.
그 중 가장 뛰어난 것이 뮤지컬 ‘가라앉지 않는 몰리 브라운’(The Unsinkable Molly Brown·1964)으로 이 영화로 생애 딱 한번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다. 이 영화는 타이태닉호 침몰에서 살아남은 미국 사교계여성이자 박애주의자였던 마가렛 브라운의 삶을 그린 것이다.
내가 본 데비의 영화들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상기 두 편 외에 올스타 캐스트의 ‘서부 개척사’(How the West Was Won·1962)와 데비가 달콤한 주제가 ‘태미’를 직접 불러 노래와 영화가 다 히트한 10대들을 위한 ‘태미와 총각’(Tammy and the Bachelor·1957)이다.
데비의 다른 영화들로는 ‘2주간의 사랑’(Two Weeks with Love·1950), ‘도비 길리스의 연애’(The Affairs of Dobbie Gillis^1953), 토니 커티스와 공연한 ‘랫 레이스’(Rat Race·1960) 및 딕 밴 다이크와 공연한 ‘미국식 이혼’(Divorce American Style·1967) 등이 있다.
그러나 데비는 영화배우로서 인기가 시들해지자 무대와 TV로 방향을 틀어 나이 먹어서도 연기활동을 꾸준히 한 ‘가라앉지 않는 데비 레놀즈’를 입증한 배우다. 브로드웨이와 베가스의 나이트클럽에서 활약했을 뿐 아니라 NBC-TV쇼 ‘윌과 그레이스’(Will & Grace)에 나와 에미상 후보에 올랐다.
지난 1996년에는 좋은 드라마 ‘어머니’(Mother)에 나와 진지한 연기로 찬사를 받았는데 마지막 작품은 2013년에 방영된 HBO영화 ‘가지 촛대 뒤’(Behind the Candelabra)로 리베라치(마이클 더글러스)의 어머니로 나왔다.
데비 레놀즈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세기의 스캔들의 희생자다. 데비의 첫 남편은 히트송 ‘오 마이 파파’를 부른 유명 팝송가수 에디 피셔. 그런데 피셔가 느닷없이 데비를 버리고 데비의 절친한 친구였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가면서 전 세계의 화제가 됐었다.
당시 엘리자베스는 영화제작자인 마이클 타드가 비행기사고로 사망해 슬픔에 빠져 있었는데 피셔가 이런 엘리자베스를 위로하다가 사랑에 빠져 데비와 어린 남매 캐리와 타드를 버린 것이다. 그러자 데비를 사랑하던 미국인들이 피셔를 ‘죽일 놈’이라고 미워하면서 그의 인기도 시들해졌다. 그리고 얼마 못가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피셔를 버리고 ‘클레오파트라’에서 공연하던 리처드 버튼에게 갔다.        
데비는 피셔를 평생 원망하며 살았다. 내가 데비를 만난 것은 그가 평생을 수집한 영화의상과 소품들을 경매하기 전 이를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 회원들에게 소개할 때였다. 베벌리힐스의 페일리센터에서 였는데 그때 우리에게 “난 아직도 피셔라는 성이 싫다”고 고백했다. 이에 내가 “정말 아직도 싫으냐”고 묻자 데비는 단호히 “예스”라고 말했다.
데비는 그러면서도 유머감각이 풍부했다. 소품중 하나로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소녀 때 나온 ‘녹원의 천사’(National Velvet·1944)에서 입은 승마복에 대해 설명할 때였다. 데비는 “나는 엘리자베스와 좋은 친구였다”면서 “그럴 수밖에 없지. 내가 그에게 내 남편을 줬으니까”라며 깔깔대고 웃었다.
금발의 작고 아담한 데비는 당시 79세의 나이에도 영화에서처럼 여전히 귀엽고 예쁘고 명랑했다.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면서 위트와 농담을 섞어가며 과거를 줄줄이 펼쳐 놓았는데 나이답지 않게 생기발랄하고 신선했다.
그런데 데비는 얘기 중에 자주 자신의 늙음과 죽음에 대해 내던지듯이 말했는데 그것들을 직접 거명함으로써 그에 대해 염려를 걷어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어렸을 때 스크린을 통해 보고 즐기며 사랑했던 밝고 맑고 고운 데비의 피치 못할 죽음을 생각하자니 마음이 어수선해졌던 기억이 난다.
텍사스에서 태어나 LA인근 버뱅크에서 자란 데비 레놀즈의 본명은 메리 프랜시스 레놀즈. 16세에 미스 버뱅크에 당선되면서 워너 브라더즈와 계약을 맺었는데 데비라는 이름은 워너의 사장 잭 워너가 지어준 것이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유감인 것은 내가 속한 LA영화비평가협회(LAFCA)가 그 동안 몇 차례 데비 레놀즈를 생애업적상 후보로 거론했지만 막상 최종 투표에서 탈락한 일이다. 나는 찬성표를 던졌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