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7년 1월 11일 수요일

패터슨(Paterson)


패터슨이 버스 안에서 노트에 시를 쓰고 있다.

매일 똑같은 버스 기사의 지루한 삶…‘시’쓰는게 유일한 낙


패터슨은 뉴저지 주의 한 작은 도시의 이름이다. 그리고 도시 버스를 운전하는 운전사의 이름이기도 하다. 패터슨은 버스 운전사이면서 시인이다. 도시와 보통 사람의 평범한 일상 그리고 시를 사랑하는 마음에 바치는 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헌사는 미 인디영화의 탁월한 감독 짐 자무시가 각본을 쓰고 연출했다.
꾸밈이라곤 없는 소박하고 로맨틱하며 명상하는 듯한 작품으로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보통 사람의 다소 지루한 삶의 속 깊은 곳에 있는 풍요와 기쁨과 사랑 그리고 희망을 담담하게 시처럼 표현하고 있다. 단순한 것의 미학과도 같다. 
예술적 혼이 가득한 아름답고 명랑한 아내 로라(이란 배우 골쉬프테 파라하니)와 영국 불독 마빈과 함께 작은 집에서 살고 있는 패터슨(애담 드라이버)의 일상은 단조로울 정도로 똑 같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옆에 누운 로라를 바라보고 이어 로라가 만들어준 아침을 먹고 도시락을 싸들고 걸어서 버스종점으로 간다. 
버스가 떠나기 전 패터슨은 갖고 다니는 노트에 떠오르는 시상을 적는다. 그리고 버스를 몰면서 다양한 승객들의 대화를 듣고 거기서 또 시상을 얻는다. 점심 땐 자기가 좋아하는 패터슨폭포를 찾아가 점심을 먹으면서 또 시를 쓴다. 그리고 퇴근해 집에 돌아오면 로라가 그를 반갑게 맞는다. 이어 패터슨은 저녁을 먹고 마빈을 데리고 근처의 바에 들러 맥주 한잔을 마시면서 바텐더와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로라와 함께 잠자리에 든다. 매일이 똑 같다. 
패터슨과 로라는 전연 성격이 다르다 패터슨은 과묵하고 조용한 반면 로라는 쾌활하고 진취적이다. 집의 커튼과 자기 옷을 아름다운 무늬로 칠하고 예쁜 컵케이크를 만들고 또 컨트리싱어가 되겠다면 기타를 사 치고 노래한다. 로라가 걱정하는 것은 패터슨이 시를 적은 노트를 잃거나 훼손되는 것. 그래서 틈만 나면 패터슨에게 시를 복사를 해놓으라고 종용하나 패터슨은 시를 출판할 생각이 없어 별 신경을 안 쓴다. 
이런 패터슨의 반복되는 삶이 마치 시의 각운과 노래의 후렴처럼 순환하는데 패터슨의 시는 시인 론 패젯이 쓴 것이다. 매우 깊고 아름다운데 여느 시처럼 라임을 갖추진 않았다. 
평범하고 단조롭고 무상한 것의 다채로움과 아름다움을 극적 리듬이 없는 드라마로 만들었는데 단조로움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는 에피소드가 좋다. 하나는 열 살 정도 난 소녀가 자기가 쓴 시를 패터슨에게 읽어 주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패터슨을 방문한 일본인 시인(마사토시 나가세)과 패터슨이 패터슨 폭포 앞에서 나누는 대화. 그러나 패터슨이 찾아간 바에서 짝사랑에 시달리던 흑인남자가 총을 휘두르는 에피소드는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다.
초가을 일주일간의 패터슨의 하루하루를 주도면밀하면서도 너그러울 정도로 서정적으로 그린 영화는 드라이버의 차분하고 조용한 연기로 빛난다. 현자의 모습이요 삶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을 정적으로 표현해 감동적이다. 그는 LA영화비평가협회에 의해 2016년도 최우수 주연배우로 뽑혔다. 촬영도 곱다.  영화를 보고나서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인다. R. Amazon.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세기 여자(20th Century Woman)


도로테아(왼쪽)는 아들 제이미를 책임감있는 남자로 키우려고 한다.

아들 제이미를 책임감 있는 남자로 키우려는 히피 엄마 이야기


틴에이저 이들을 홀로 키우는 히피 어머니의 얘기를 다양한 주변 인물들과 엮어 만든 사실적이요 따스하면서도 정답게 그린 드라마로 주연하는 아넷 베닝의 조용하면서도 다채로운 연기가 보기 좋다. 베닝(배우이자 감독인 워렌 베이티의 아내)이 뛰어난 연기자라는 것을 재차 확인시켜준 아담한 영화로 볼만한 소품이다.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들도 연기가 좋지만 그들이 너도 나도 마치 극의 주도권이라도 잡겠다는 듯이 나서는 바람에 얘기를 산만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흠. 시간대가 1970년대 말로 사람들의 모습이나 상황과 장면을 비롯해 분위기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조촐하고 재미있는 영화다.
1979년 산타바바라. 58세의 줄담배를 태우는 도로테아 필즈(베닝)는 착하고 총명한 15세난 아들 제이미(루카스 제이드 주맨)를 홀로 키우는 과거의 히피. 도로테아는 루이 암스트롱과 ‘카사블랑카’와 험프리 보가트를 극진히 좋아한다.
도로테아는 아들을 책임감 있는 남자로 키우려고 하나 문제는 집안에 제이미에게 모범이 될 만한 남자가 없다는 것. 남자라고 하숙을 하는 핸디맨 윌리엄(빌리 크러덥)이 있긴 하나 윌리엄은 과거 히피로 기분대로 사는 바람둥이여서 하나도 도움이 못 된다.
그래서 도로테아는 또 다른 하숙생인 20대의 애비(그레타 거윅)와 제이미 나이또래의 여자 친구 줄리(엘리 패닝)의 도움을 받기로 한다. 머리를 총천연색으로 물감을 들인 애비는 암을 앓는 사진사인데 진보적인 신여성으로 제이미에게 인체와 섹스에 관한 책을 읽으라고 권한다. 그러니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조숙한 줄리는 툭하면 밤에 제이미의 방을 찾아와 잠자리를 같이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플래토닉한  잠자리이지 결코 섹스가 있는 잠자리가 아니다. 이들의 왁자지껄한 얘기가 재미있게 서로 포옹하고 감싸 돌면서 제이미의 성장기를 엮는데 제이미는 이렇게 자기 성장에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영육이 성장한다.
이와 함께 도로테아는 나름대로 자기도 아들만큼이나 삶의 재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영화가 인물들의 미래를 보여주면서 환상적으로 끝난다. 베닝과 조연진들의 연기가 볼만하다. 마이크 밀스 감독(각본 겸)이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것으로 촬영이 곱다. R. ★★★1/2(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나의 2016년 베스트 텐


1년 내내 영화만 보면서 살다보니 현실이 영화 같고 영화가 현실과도 같다.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는데 영화가 내게 주는 위로와 휴식과 기쁨을 생각하면 영화는 내게 있어 하나의 종교가 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영화 때문에 한 가지 안 된 것은 책을 많이 읽을 수 없다는 점.
내가 2016년에 한 해에 본 영화제목을 적은 노트북을 들춰보니 300편 정도의 영화를 봤다. 예년에 비해 좀 모자라는 수여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게을리 한 것 같은 마음이다.
한 해의 베스트 텐을 고르기가 쉽지 않다. 이는 예술성과 재미를 완벽하게 겸비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 그러나 2016년은 재미있는 양질의 영화가 많다. 극영화 뿐 아니라 만화영화와 기록영화 및 외국어영화 등 모든 분야에서 좋은 것들이 많이 나왔다.
베스트 텐의 첫째 것과 둘째 것은 내가 좋아하는 순서대로요 나머지는 알파벳순이다.        
*‘바닷가의 맨체스터’(Manchester by the Sea)-보스턴 인근 맨체스터를 무대로 비극적 과거를 가진 아파트 막일꾼(케이시 애플렉)의 삶을 가슴 저미도록 사실적이요 우수 가득하며 또 때론 우습게 그렸다. 골든 글로브 작품상(드라마) 등 5개 부문 후보작. (사진)

*‘라 라 랜드’(La La Land)-젊은 배우지망생 여자(엠마 스톤)와 콧대  높은 재즈 피아니스트 청년(라이언 가슬링)의 사랑과 삶을 엮어 옛 할리웃과 뮤지컬에 바치는 향수 짙은 황홀한 헌사. 골든 글로브 작품상(뮤지컬/코미디) 등 7개 부문 후보작.

*‘아슬아슬한 17세’(Edge of Seventeen)-여고 3년생(헤일리 스타인펠드)이 겪는 10대 특유의 성장통. 지혜롭고 사실적이며 유머러스하다. 스타인펠드의 골든 글로브 주연상(뮤지컬/코미디) 후보작.

*‘핵소 리지’(Hacksaw Ridge)-신앙을 이유로 집총을 거부하고 의무병으로 오끼나와 전투에 투입돼 단신 수십 명의 부상당한 전우와 함께 일본군마저 구출한 데즈먼드 S. 도스(앤드루 가필드)의 실화. 골든 글로브 작품(드라마) 남우주연(드라마) 및 감독상(멜 깁슨) 등 3개 부문 후보작.

*‘헬 오어 하이 워터’(Hell or High Water)-차압 위기에 놓인 텍사스의 목장을 살리려고 은행을 터는 형제와 이들을 쫓는 노련한 텍사스 레인저(제프 브리지스)의 긴박감 넘치는 현대판 웨스턴. 브리지스의 골든 글로브 조연상 후보작.

*‘러빙’(Loving)-1960년대 흑백결혼이 불법인 버지니아에서 결혼한 백인 리처드 러빙(조엘 에저턴)과 흑인 밀드레드(루스 네가)의 결혼 합법화를 위한 투쟁 실화. 골든 글로브 작품(드라마) 및 남녀주연상(드라마) 후보작.

*‘문라이트’(Moonlight)-플로리다의 달동네에 사는 동성애자 흑인 소년의 성장을 세 시간대에 걸쳐 그린 달빛처럼 고운 감동적인 드라마. 골든 글로브 작품(드라마) 및 감독상 등 6개 부문 후보작.

*‘패터슨’(Patterson)-뉴저지 패터슨시의 버스 운전사 패터슨(애담 드라이버)은 하루 하루의 삶을 시로 옮긴다. 마치 시의 각운처럼 패터슨의 일상이 아름다운 반복음을 낸다. 드라이버가 LA 영화비평가협회의 2016년도 최우수 주연배우로 뽑혔다.        

*‘침묵’(Silence)-17세기 일본에 자원해 간 두 명의 예수회 선교사(앤드루 가필드와 애담 드라이버)가 겪는 핍박과 믿음과 회의. 마틴 스코르세지 감독의 신을 향한 구원과 속죄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정열적이요 경건한 작품. 보고 나서 한참 지나서야 작품의 깊이와 열정을 느끼고 이해하게 된다.

*‘선셋 송’(Sunset Song)-19세기 초 스코틀랜드 농촌 처녀의 성장기. 대사와 연기와 연출 등이 연극과도 같은 서정적인 산문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작품의 분위기에 깊이 잠기게 된다. 테렌스 데이비스 감독 특유의 여유 있고 다소 묵직한 연출이 아름답다.        

이 밖에도 ‘아메리칸 하니’(American Honey), ‘나는 대니얼 블레이크‘(I, Daniel Blake), ’캡틴 팬태스틱’(Captain Fantastic), ‘어 비거 스플래쉬’(A Bigger Splash) 등이 좋았다.
외국어영화로는 첫 사랑과 그것의 오랜 후유증을 그린 ‘나의 황금기’(My Golden Days-프랑스), 겁탈 당한 50대 여인이 제물이 되기를 거부하고 역전극을 펼치는 변태적으로 섹시한 ‘엘르’(Elle-프랑스), 파리 교외 달동네에 살면서 서푼짜리 범죄를 밥 먹듯이 저지르는 10대 소녀의 생존 몸부림을 그린 ‘디바인즈’(Divines-프랑스) 그리고 데모하다 잡혀 경찰의 트럭에 갇힌 가지각색의 이집트 시민들의 모습을 통해 현 이집트의 사회 및 정치 상황을 보여주는 ‘충돌’(Clash-이집트) 및 노벨상을 받은 소설가가 오래간만에 자기 작품의 영감이 된 고향을 찾았다가 겪는 온갖 해프닝을 그린 풍자극 ‘출중한 시민’(The Distinguished Citizen-아르헨티나)  등이 기억에 남는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7년 1월 3일 화요일

할리웃 배우‘커크 더글라스’100세 생일 맞아


커크 더글라스와 부인 앤. 


1950년~1960년대 흥행보증 수퍼스타로 군림
아내 앤과 함께 수천만 달러 기부 한 자선가


열화와 같은 사나이 커크 더글라스가 지난 9일로 100세가 되었다. 각이 진 얼굴에 옴폭 패인 턱이 트레이드마크인 더글러스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생명력과 에너지와 분기와 강인함 그리고 정열과 끈기이다.
더글라스를 대뜸 세계적 스타로 만들어준 권투영화로 그의 첫 오스카 주연상 후보작인 ‘챔피언’(Champion^1949)과 신랄한 뉴욕형사로 나온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형사 이야기’(The Detective Story^1951) 그리고 반 고흐로 열연한 ‘삶의 열망’(Lust for Life^1956) 및 ‘스파르타커스’(Spartacus^1960) 등은 다 그의 이런 특성을 잘 보여주는 영화들이다.
배우요 제작자요 감독(그의 여러 일 중 가장 약하다)이자 작가요(10권의 저서) 박애주의자인 더글라스의 인생역정은 ‘빈자에서 부자’로라는 말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제정러시아 때  뉴욕으로 이민 온 유대인 부모 밑에서 6자매와 함께 자란 더글라스는 고물장수인 아버지를 도와 생계를 꾸리느라 어릴 때부터 길에서 물건을 팔았다. 학생 땐 카니발에서 레슬링을 해 돈을 벌기도 했다. 그의 강인성과 근면은 이런 성장과정에서 기인한다.
더글라스의 스크린 데뷔작은 바바라 스탠윅과 공연한 멜로물 ‘마사 아이버스의 이상한 사랑’(The Strange Love of Martha Ivers^1946). 이 영화에서의 연약한 남자 노릇을 끝으로 더글라스는 생애 출연한 90여 편의 영화에서 거의 다 강하고 터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더글라스는 1950년대와 1960년대 흥행보증 수퍼스타로 군림하면서 진지한 드라마와 웨스턴 및 전쟁영화에 많이 나왔다. 1950년 더글라스의 연기학교 동창이자 오랜 친구였던 로렌 바콜(험프리 보가트의 아내로 2014년 사망)과 공연한 ‘혼을 든 젊은 남자’(Young Man with a Horn)는 재즈 혼 연주자 빅스 바이더베키의 실화로 호평을 받았다. 
이어 특종에 눈이 먼 기자로 나온 빌리 와일더 감독의 ‘에이스 인 더 호울’(Ace in the Hole?1951)에서 뜨거운 연기를 하고 다음 해 라나 터너와 공연한 빈센트 미넬리 감독의 ‘악인과 미녀’(The Bad nad the Beautiful)에서 무자비한 할리웃의 제작자로 나와 두 번째 오스카 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이 영화와 함께 더글라스의 세 번째 오스카 주연상 후보작으로 반 고흐 전기인 ‘삶의 열망’도 미넬리가 감독했다. 생긴 것도 고흐처럼 생긴 더글라스는 ‘삶의 열망’에서 생애 최고의 것이라 해도 될 만큼 열광적인 연기를 해 오스카상은 놓쳤으나 골든 글로브 주연상(드라마)을 탔다.액션 터프 가이로 잘 알려진 더글라스는 코미디에도 능한 재주꾼. 쥘 베른의 소설이 원작인 ‘해저 20,000리’(20,000 Leagues under the Sea^1954)에서 유크렐레를 켜며 경쾌한 연기를 했다. 
더글라스는 1955년 자기 어머니 이름을 딴 브라이나 제작사를 설립, 그 후 많은 영화에서 제작과 주연을 겸했다. 양질의 영화들을 만들었는데 그 대표작이 반전영화 ‘영광의 길’(Paths of Glory^1957). 스탠리 쿠브릭이 감독한 이 영화에서 더글라스는 제1차 대전 때 반역죄의 누명을 쓰고 군재에 회부된 부하들을 변호하는 변호사로 나와 맹렬한 연기를 보여줬다. 
이어 토니 커티스, 어네스트 보그나인 및 재넷 리 등 올스타 캐스트의 오락액션물 ‘바이킹’(The Vikings^1958)에서 외눈 바이킹으로 나왔다. 더글라스의 대명사와도 같은 영화가 1960년에 제작하고 주연한 ‘스파르타커스’. 쿠브릭이 감독한 영화에서 더글라스는 로마제국에 반기를 든 노예반군의 지도자로 나왔다.
이 영화는 정의파인 더글라스가 1950년대 할리웃에 존재했던 좌경영화인들에 대한 블랙리스트를 깬 역사적인 작품이다. 더글라스는 영화의 각본을 당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던 달턴 트럼보에게 맡긴 뒤 그 때까지 가명으로 글을 썼던 트럼보의 이름을 처음으로 크레딧에 올렸다. 이를 계기로 할리웃의 블랙리스트는 흐지부지 소멸됐다. 더글라스는 당시 경험을 ‘나는 스파르타커스다!’(I Am Spartacus!)라는 책으로 써냈다.
이어 만든 영화가 컬트 웨스턴 ‘용감한 자는 고독하다’(Lonely Are the Brave^1962). 역시 트럼보가 각본을 쓴 영화로 더글라스는 탈옥한 카우보이로 나와 현대문명의 이기를 사용하는 경찰 추격을 받는다. 사라져가는 서부에 대한 향수가 가득한 흑백명화다. 
1964년 더글라스의 친구이자 동료인 버트 랭카스터와 공연한 영화가 ‘5월의 7일간’(Seven Days in May). 랭카스터는 미 대통령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음모하는 공군장성으로 더글라스는 이를 저지하려는 해병대령으로 나와 서로 팽팽하게 맞선다. 둘은 이 영화 외에도 생애 모두 6편의 영화에서 공연했다.
그 첫 영화가 ‘나는 홀로 걷는다’(I Walk Alone^1948). 이어 ‘O.K.목장의 결투’(Gunfight at the O.K. Corral^1957)에서 더글라스는 폐병을 앓는 전직 치과의사 건맨으로 랭카스터는 애리조나주의 작은 무법마을 툼스톤의 명보안관 와이엇 어프로 각기 나왔다.
또 다른 둘의 공연영화로는 버나드 쇼의 희곡이 원작인 ‘악마의 제자’(The Devil‘s Disciple^1959), ‘에이드리안 메신저 리스트’(The List of Adrian Messenger^1963), ‘엔테베의 승리’(Victory of Entebbe^1976) 및 둘이 나이 먹은 열차강도로 나온 ‘터프 가이즈’(Tough Guys^1986) 등이 있다.
더글라스는 연극배우로도 활동했다. 1963년 브로드웨이 연극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에 주연했다. 그는 이 연극의 원작인 켄 케이시의 소설의 영화화 판권을 사 후에 자기 아들이자 제작자요 배우인 마이클 더글라스에게 줘 마이클이 오스카 작품상을 탄 영화로 만들었다. 
더글라스는 1970년부터 2008년까지 40편에 가까운 영화에 나오긴 했으나 작품의 질은 전성기 때만 못하다. 그가 감독으로 데뷔하고 주연한 ‘보물섬’의 서부판 ‘무뢰한’(Scalawag^1973)은 졸작이나 두 번째로 감독하고 주연한 웨스턴 ‘파시’(Posse^1975)는 볼만하다. 
헨리 폰다와 공연한 웨스턴 코미디 ‘사악한 자가 있었으니...’(There was a Crooked Man...^1970)는 재미있지만 브라이안 드 팔마가 감독한 ‘분노’(Fury^1978)와 시간여행을 하는 항공모함의 드라마 ‘마지막 카운트다운’(The Final Countdown^1980) 등은 타작. 1980년대 더글러스가 나온 영화 중 가장 훌륭한 것이 ‘매드 맥스’를 만든 호주 감독 조지 밀러가 연출한 ‘눈 내린 강에서 온 남자’(The Man from Snowy River^1982). 경치와 내용이 준수한 서사웨스턴이다.
더글라스가 얼마나 강인한 사람인지 보여주는 일례가 영화 ‘다이아몬드’(Diamonds^1999)다. 그는 1996년 뇌졸중으로 쓰려져 거동과 말이 불편한데도 끈질기게 발성치료를 받은 뒤 이 영화에 나왔다. 여기서 그는 뇌졸중에서 회복하는 권투선수로 나온다. 그리고 2003년에는 마이클과 또 다른 아들 조엘 더글라스가 제작하고 온 가족이 출연 하다시피 한 ‘혈통 탓이야’(It Runs in the Family)에 나왔다. 그의 마지막 무대 출연은 지난 2009년 LA 인근 컬버시티에 있는 커크 더글라스극장에서의 자전적 1인 쇼 ‘잊기 전에’(Before I Forget).     
더글라스는 뇌졸중 이후 신을 찾기 시작, 현재 유대교 율법사와 함께 매주 1회씩 성경공부를 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오스카 생애업적상 수상자인 더글라스는 또 지난 60년간을 함께 살아온 두 번째 아내 앤과 함께 수천만 달러 상당의 기부를 한 자선가이다. 
수년 전 그는 자기 소장 미술품을 팔아 캘리포니아의 400여 학교에 운동장을 만들어 주었다. 필자가 속한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는 최근 더글라스의 100세 생일을 기리는 뜻에서 그의 자선단체에 100,000 달러를 기부했다. 그리고 더글라스와 앤은 이 기부에 감사하는 비디오 메시지를 우리에게 보내왔다. 해피 버스데이 앤 롱 리브 미스터 더글라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침묵(Silence)


세바스티아오 로드리게스 신부(왼쪽)가 숨어서 예배보는 일본인 신도와 작별을 하고있다.

일본서 종교적 폭력과 박해를 받는 두 명의 예수회신부


가난과 핍박에 시달리는 기독교 신자들과 투옥돼 처형을 기다리는 예수회신부가 구원과 안내를 찾아 부르짖는 소리에 대해 신이여 당신은 왜 침묵하십니까. 이 같은 물음은 이 영화의 제목이자 영화를 감독한 마틴 스코르세지 개인의 물음이다. 
보면서 162분 상영시간 내내 고행의 길을 걷는 인고와 참담함 그리고 고통과 쓰라림을 겪게 되는 믿음과 회의의 영화로 마지막에 가서 그 동안 기다렸던 구원을 받는 희열에 빠지게 된다. 인내심이 크게 필요한 영화다. 
주인공의 행적이 예수의 그것을 많이 닮은 이 묵직한 주제를 가진 ‘종교영화’는 스코르세지가 26년간을 만들려고 벼르다 완성한 것으로 그의 신에 대한 심리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이탈리아계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그는 어렸을 때 신부가 되려고 했으나 신앙이 이를 뒷받침 해주지 못해 포기했다. 
그 후 그는 평생을 신에 대한 믿음과 회의간의 갈등 그리고 자책감을 안고 살았는데 이 영화는 그의 신을 향한 구원과 속죄의 부르짖음이라고 하겠다. 영화를 보면 그의 이런 의도가 절실히 느껴진다. 스코르세지의 또 다른 종교영화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도 어떻게 보면 그가 신에게 바친 번제와도 같다.  
슈사쿠 엔도의 소설이 원작. 1643년. 포르투갈의 두 젊은 예수회신부 세바스티아오 로드리게스(앤드루 가필드)와 프란시스코 가루페(애담 드라이버)는 자신들이 존경하는 크리스토바오 페레이라신부(리암 니슨)가 일본에서 종교 탄압에 못 견뎌 신을 부인하고 일본인으로 살고 있다는 소문을 확인하려고 일본으로 간다. 
일본(대만서 촬영) 해변에 도착한 둘은 숨어서 예배를 보는 일단의 일본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합류한다. 여기서 둘은 일본인 통역사(타다노부 아사노)를 통해 일본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과 신자들의 상황 등에 대해 알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신자들과 함께 기아와 추위에 시달리면서 신도들에게 믿음을 전파한다. 이어 로드리게스와 가루페는 서로 헤어진다.           
이와 함께 기독교인들에 대한 마을 관리들의 가혹한 고문과 처형이 묘사되는데(해안에 세운 십자가에 신자들을 매단 뒤 밀물에 잠기게 해 죽인다) 이런 육체적 고통보다 더 보기 힘든 것은 신도들에게 신을 부인하라면서 예수의 모습이 새겨진 동판을 발로 밟게 하는 장면.  
페레이라를 찾아 가던 로드리게스는 어촌의 기독교신자들을 만나 그들과 생활하는데 배신을 당해 체포돼 투옥된다. 로드리게스는 장기간의 옥고를 치르면서 마을 군수 이노우에(이세이 오카타가 간교하고 코믹한 연기를 잘 한다)로부터 신을 부인하라는 종용을 받는다. 그리고 페레이라가 나타나 로드리게스에게 역시 신을 부인하라고 설득한다. 
이 과정에서 로드리게스는 믿음과 회의와의 갈등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린다. 전반부는 다소 내용이 단조롭고 인물들의 묘사도 부족하나 후반 들어 영육으로 강력한 충격을 받게 된다. 연기 촬영 및 음악도 좋다. R. Paramount.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히든 피겨즈(Hidden Figures)


존 글렌을 맞이하는 도로시, 캐서린 그리고 메리(왼쪽 세번째부터).

1960년대 NASA에서 차별 받던 흑인 여성이 최고가 되기까지 이야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만백성이 보고 즐기고 박수 칠 영화로 이런 믿지 못할 얘기가 왜 이제야 영화로 만들어졌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 1960년대 초 존 글렌의 지구궤도 선회를 성공시키는데 일등공신 노릇을 한 세 명의 여자 수학자들의 실화로 기분 좋고 감동적이다. 
흑백문제와 여성차별 그리고 미?소간 우주경쟁과 불의에 저항하는 투혼을 지닌 인간승리의 드라마로 앙상블 캐스트의 연기가 좋은 코미디이요 드라마이며 스릴과 긴장감까지 갖춘 흥미진진한 영화다.
미?소간 우주경쟁이고조에 이르렀던 1960년대 초. 캐서린 고블(타라지 P. 헨슨)은 수학의 천재로 NASA의 랭리과학센터에서 일하고 있으나 그의 실력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흑인을 이물질 보듯 하는 백인남자들 틈에 끼어서 별 볼일 없는 일을 하는 그의 실력을 알고 중요한 일을 맡기는 사람이 무뚝뚝하나 정의파인 실장 알 해리슨(케빈 코스너). 
인종차별을 보여주는 우스운 장면이 캐서린의 화장실 이용 장면. 자기가 일하는 건물의 백인전용 화장실을 못 써 건물 밖에 한참 떨어진 화장실까지 왕복으로 달리느라 고생이 많다. 캐서린의 달리기를 파렐 윌리엄스가 작곡한 주제가 ‘러닌’이 재미있게 반주한다. 
셋 중 제일 젊은 여자가 NASA에서도 알아주는 뛰어난 과학자 메리 잭슨(그래미상을 받은 가수 자넬 모나에가 발군의 연기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메리는 버지니아주의 대학을 다니기 위해 법원에 청원서를 내서야 야간학교에 나간다. 판사에게 자신의 청원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는 메리의 모습이 당차다.
셋 중 맏언니 격인 여자가 역시 같은 곳에서 일하는 수퍼바이저 도로시 본(옥타비아 스펜서). 그러나 도로시는 책임만 많지 봉급은 백인여자에 훨씬 못 미친다. 
이들 세여자의 인종차별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을 지키면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얘기가 아기자기하게 전개되는데 셋이 함께 있을 때가 각자 따로 있을 때보다 더 재미있다. 세 여자배우와 코스너의 연기가 좋다. 디오도어 멜피 간독. PG. Fox.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애수’


내일 하루가 가면 2016년도 간다. 연말 분위기란 치열한 쾌감 뒤에 느끼는 공허와도 같다. 슬프고 착잡하고 어수선하고 어리둥절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간다는 것은 안 됐고 슬프다. 이런 것을 미련이라고 하나보다.
나이를 먹으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개념이 희박해지고 그저 그들은 다 시간일 뿐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도 그 시간의 한 줌인 연말이 되면 과거가 아쉽다. 가슴은 천성이 센티멘탈한 것인가 보다.
이 과거의 감상성을 슬프면서도 달래주는 듯이 피력한 노래가 신년 전야 자정 직전에 부르며 새 해를 맞는 ‘올드 랭 자인’이다. ‘옛날 오래 전에 가버린 날들’을 뜻하는 ‘올드 랭 자인’은 스코틀랜드의 시에 민요의 멜로디를 붙여 지은 노래로 멜로디가 감미롭고 감상적이다.
“슈드 올 어퀘인턴스 비 포갓 앤드 네버 브럿 투 마인드? 슈드 올 어퀘인턴스 비 포갓 앤드 올 랭 자인?”으로 시작되는 노래는 지나간 날들을 회상하며 늘 기억하리라 다짐하면서 아울러 술 한 잔 차 한 잔을 서로 들고 나누는 인간의 친절을 기리고 있다.
이 안개가 자욱이 낀 듯한 곡은 지난 1929년 캐나다 태생의 지휘자 가이 롬바르도의 밴드 로열 커네이디언즈가 뉴욕의 신년 전야 파티에서 연주하면서 유명해졌는데 그 후 팝, 컨트리, 디스코 및 폴카로 편곡돼 널리 사랑을 받고 있다.
팝으로 히트한 것이 5중창단 G-클렙스가 부르는 ‘아이 언더스탠드’다. 떠난 님을 이해한다면서도 마음이 바뀌면 돌아오라고 호소하는 이 노래는 한국에서도 크게 유행해 다방과 음악감상실에서 자주 틀곤 했다.
‘올드 랭 자인’을 노래 부른 가수들도 많다. 바비 다린, 짐 리브스, 빙 크로스비 및 줄리 앤드루스 등이 불렀고 노래의 고향인 스코틀랜드의 스카티시 백파이프스 밴드의 여자의 고음 울음과도 같은 백파이프 연주도 좋다. 또 이 노래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로 시작되는 찬송가로도 불리고 있다.
‘올드 랭 자인’은 이런 내력을 지니고 있어 할러데이 시즌 영화에 즐겨 사용되고 있는데 특히 로맨틱하거나 감상적인 장면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많이 나온다. 이 노래가 가슴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는 영화의 으뜸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신파 멜로드라마의 결정판 ‘애수’(Waterloo Bridge^1940^사진)일 것이다. 멜로드라마를 잘 만들던 머빈 르로이 감독의 흑백영화로 MGM이 배급했다.
콧수염을 한 귀족집안의 영국군대령 로이(로버트 테일러)가 런던의 워털루 브리지에서 과거를 회상하면서 장면은 제1차 대전 때로 돌아간다. 공습경보에 지하대피소로 피하던 로이대위와 발레댄서 마이라(비비안 리)가 첫 눈에 사랑에 빠지면서 결혼을 약속한다.
전선에 나간 로이를 기다리던 마이라는 로이가 사망자 명단에 오른 것을 보고 자포자기해 워털루 역을 무대로 군인을 상대로 몸을 파는 여자가 된다. 그러나 전쟁포로가 됐던 로이가 귀국해 워털루 역에서 마이라와 재회, 둘은 사랑을 재확인하지만 죄책감에 못 견딘 마이라는 워털루 브리지에서 달려오는 트럭에 투신자살한다. 로이와 마이라의 댄스 장면을 비롯해 ‘올드 랭 자인’이 영화 내내 작품의 분위기를 애처롭게 감싸 안고 돌아 눈물깨나 쏟게 된다.      
나는 이 영화 때문에 런던에 세트방문이나 배우 인터뷰를 위해 갈 때마다 어느덧 워털루 브리지와 워털루 역을 찾아가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나 영화는 MGM 스튜디오에서 찍었다. 그런데 워털루 브리지는 실제로 전쟁 당시 창녀들이 런던을 거쳐 가는 군인들을 상대로 돈을 벌려고 모여들었던 곳이다.
‘올드 랭 자인’은 할러데이 시즌 단골영화 ‘멋진 인생’(It‘s a Wonderful Life^1946)에서도 콧등이 시큰해지도록 마지막 장면을 장식한다. 작은 마을 베드폴스에서 아내 메리(다나 리드)와 어린 자식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던 조지(제임스 스튜어트)가 사업에 실패, 강에 투신자살하려는 순간 조지의 수호천사 클래런스가 나타난다.
클래런스는 조지에게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베드폴스가 어떤 꼴이 되었겠는가를 보여준다. 이 세상이 얼마나 멋진 곳인가를 깨달은 조지와 메리와 둘의 아이들을 찾아온 동네 사람들이 ‘올드 랭 자인’을 부르고 집안의 크리스마스 트리 전구들이 깜빡이면서 노래를 따라 부른다.
이 밖에도 주디 갈랜드가 부르는 ‘해브 유어셀프 어 메리 리틀 크리스마스’가 나오는 뮤지컬 ‘세인트 루이스에서 만나요’와 빌리 와일더가 감독하고 잭 레몬과 셜리 매클레인이 나오는 ‘아파트먼트’ 그리고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와 ‘포사이던 어드벤처’ 및 내가 올 해 인상 깊게 보았던 스코틀랜드영화 ‘선셋 송’에도 ‘올드 랭 자인’이 나온다. 해피 뉴 이어!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