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6년 11월 15일 화요일

도착 (Arrival)


루이즈 박사가 외계인들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외계인 정체와 언어를 파악하려고 애쓰는 언어학자


스필버그의 ‘제3 세계와의 조우’를 연상케 하는 엄숙하고 아름다운 외계인 지구 도착에 관한 공상과학 영화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면서 얘기가 서술되고 내용이 무척 심각해 정신을 집중하고 봐야 한다. 쉬운 팝콘용 오락영화는 아니지만 마음을 비운 채 얘기에 함몰할 용의가 있다면 끝에 가서 정신적으로 희열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외계인의 정체와 언어를 파악하려고 애쓰는 언어학자를 통해 결국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문제를 묻고 있는 방대하고 심미적이자 숙연하고 철학적이며 또 거룩한 우화다. 캐나다 감독 드니 비앙뇌브(‘사카리오’)의 절제되고 대담 하면서도 정밀한 연출력이 뛰어난데 연기와 음향디자인과 음악 그리고 시각적 특수효과도 매우 훌륭하다. 
지구에 12개의 검은 회색의 거대한 콘택렌즈 모양의 우주선이 각기 다른 장소에 도착한다. 공중에 떠 있는 우주선이 잘 다듬은 자갈처럼 매끈하다. 이에 미군이 외계인들의 언어를 파악하기 위해 언어학자 루이즈 뱅스 박사(에이미 애담스)를 초청한다. 영화는 처음에 루이즈가 겪은 심각한 개인적 고통을 보여주면서 마치 수수께끼 풀듯이 이어진다.
영리하고 사실적이며 주도면밀한 루이즈는 이 때부터 거대한 머리와 7개의 다리를 가진 주름투성이의 외계인들이 내뱉는 신음소리와도 같은 언어를 이해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루이즈를 돕는 사람이 이론물리학자 이안 다넬리(제레미 레너).
외계인들의 글은 마치 먹물을 뿌려 쓴 것 같은 글자들이 원형을 이루고 있는데 루이즈가 이들의 뜻을 알아내려고 애를 쓰는 동안 우주선이 도착한 나라들에서는 나름대로 이에 대처할 방안을 강구하느라 난리법석들을 떤다. 중국은 우주선들을 공격할 태세를 취하고 미국도 그럴 생각이다.
시간이 촉박한 중에 루이즈와 이안은 오렌지색 우주복을 입고 우주선 입구로 다가가 우주인들과 대화를 나누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 이안은 루이즈에게 자꾸 마음이 간다. 이 인간과 외계인의 조우 장면이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답고 신성하다. 영화는 마치 윤회설처럼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맴을 도는데 감독이 너무 지고한 아이디어를 지녀 얘기가 때로 하늘에 닿아 있는 것 같은 것이 흠이라면 흠.
야무지고 똘똘하게 생긴 애담스가 탄탄한 연기로 초현실적인 것같은 얘기를 땅에 매어 잡아놓고 있다. 애담스는 무슨 역을 맡아도 다 잘 해내는 믿음직한 배우다. 보고 영적 의문과 흥분을 함께 경험토록 권한다. PG-13. Paramount. ★★★★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빌리 린의 긴 해프타임 행진(Billy Lynn’s Long Halftime Walk)


달라스 카우보이즈 풋볼 스테디엄에서 전우들과 함께 선 빌리 린.

미국의 과도한 애국심·자본주의를 풍자한 영화


‘와호장룡’과 ‘브로크백 마운틴’을 만든 대만 태생의 앙리 감독의 야심작인데 결과가 미숙한 작품이 되고 말았다. 입체영화이자 초당 프레임 회전속도가 120프레임으로 찍어 극사실적 감을 시도했는데 기술이 인물들의 개발이나 내용을 앞서가는 우를 저지르고 있다.
화면이 지극히 맑고 세밀한 부분까지 정밀하게 보이긴 하지만 왜 극영화에 이런 기술을 도입했는지 의아할 뿐이다. 마치 앙리의 새 기술 실험용 영화 같아서 감정적으로 접근하기가 힘들 뿐 아니라 영화에 인간적 온기가 부족해 주인공을 비롯한 인물들과도 유대감을 가지게 되지 않는다. 
미국의 과도한 애국심을 풍자한 영화로 이와 함께 모든 것을 장사의 대상으로 여기는 미국의 자본주의 정신을 싸잡아 비판하고 있다. 
주인공은 19세의 텍사스 태생의 육군 졸병 빌리 린(영국인 신인배우 조 올윈). 빌리가 이라크전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우면서 빌리는 자기 소속 브라보 분대원들과 함께 귀국해 전국순회 승전 투어에 참석한다. 육군이 마련한 이 전쟁고무 투어는 추수감사절 달라스 카우보이즈의 경기 중간 휴게시간에 스테디엄에 치어리더들과 데스트니즈 차일드가 동석한 가운데 끝나게 된다. 
한편 할리웃 제작자(크리스 터커)는 빌리의 무공을 영화로 만들 구상을 하면서 카우보이즈의 주인 노만(스티브 마틴)을 물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빌리는 치어리더 중 한 명(매켄지 리)과 짧은 로맨스를 나눈다.   
빌리가 전국을 돌고 달라스에 도착해 마지막 화려한 퍼레이드를 위해 준비를 하는 동안 회상으로 그의 용감한 투혼과 전우애 그리고 치열한 이라크 전투가 묘사된다. 여기서 빌리의 리더인 쉬룸 상사로 빈 디즐이 나온다. 그러나 새 기술로 찍은 이 전투장면은 여느 전쟁영화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내용이 특별히 관심을 끌거나 재미가 있는 영화가 아닌데 그런 중에 가장 인간적인 것은 회상으로 그려지는 빌리와 빌리의 참전을 반대하는 그의 누나 캐스린(크리스튼 스튜어트)과의 관계와 대화. 올윈이 연기를 잘 하는데 특히 스튜어트가 감동적인 연기를 한다. 기술 때문에 인물들이 희생된 설익은 영화다. R. Sony.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시카고, 마이 카인드 오브 타운’


‘윈디 시티’와 ‘세컨드 시티’라는 별명을 가진 시카고의 2016년은 시 역사상 가장 명예로운
해이자 아울러 최악의 불명예의 해로 기록될 것이다. 자랑스러운 일은 시카고 시민들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있는 시카고 컵스가 108년 만에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된 것.
이와 반대로 시카고는 2016년 사상 초유의 살인사건이 많이 발생한 무법도시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됐다. 지난 10월 말 현재로 시카고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은 총 614건으로 이는 지난 2003년 한 해 발생한 600건의 살인사건을 훌쩍 초과한 숫자다. 경찰에 의하면 올 살인사건의 특징은 갱 범죄라기보다 닥치는대로 식의 살인이라는 것. 이런 이유와 함께 경찰과 살인사건이 많이 발생하는 사우스와 웨스트사이드의 흑인 주민들 간의 불신의 폭이 넓혀지면서 사건해결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꼭 이래서 만이 아니라 시카고 하면 선뜻 범죄도시로 생각하게 되는 까닭은 금주령 시대 이 도시를 말아먹었던 악명 높은 갱 두목 알 카폰(사진) 때문이다. 카폰은 금주령을 이용해 밀주제조와 판매 그리고 마약과 매춘으로 돈을 번 무자비한 자로 얼굴 왼쪽에 난 칼자국 때문에 ‘스카페이스’라는 별명이 붙었다.
카폰과 시카고 하면 가장 유명한 사건이 ‘세인트 밸런타인스 데이 살육’이다. 1929년 세인트 밸런타인스 데이에 카폰의 졸개들이 라이벌 갱 7명을 살해한 사건으로 이 얘기는 토니 커티스와 잭 레몬 및 마릴린 몬로가 나온 코미디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도 묘사됐다.
카폰은 하도 유명해 여러 편의 영화의 주인공이 됐다. 먼저 금주령 시대인 1932년에 폴 뮤니가 카폰으로 나온 ‘스카페이스’가 치열하게 박진감 있고 로드 스타이거가 주연한 ‘알 카폰’(1959)도 흥미있다. 또 제이슨 로바즈가 나온 ‘세인트 밸런타인스 데이 매사커’(1967)도 야한 재미가 있다. 그러나 알 파치노가 나온 ‘스카페이스’는 카폰 얘기가 아닌 쿠바 난민 갱스터 스릴러다.    
비교적 최근 것으로 잘 만든 카폰 영화가 브라이언 드 팔마가 감독하고 로버트 드 니로가 카폰으로 나온 ‘언터처블즈’(1987). 엔니오 모리코네(‘황야의 무법자’ 음악)의 음악이 인상적인 영화에서 카폰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형사 엘리옷 네스로 케빈 코스너가 나오고 순찰경관으로 나온 션 코너리가 오스카 조연상을 탔다.
체중을 늘린 드 니로가 야구방망이로 자기 졸개를 때려죽이는 무시무시하고 변화무쌍한 연기를 한다. 제목은 실제 인물이었던 미 재무부 소속 금주령 위반 단속전담반 형사 네스와 그의 부하들을 일컫는 말로 ‘결코 부패하지 않는 사람들’을 뜻한다.
‘언터처블즈’의 활약은 로버트 스택이 네스로 나온 동명의 ABC-TV 시리즈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시리즈는 1959년부터 1963년까지 인기리에 방영됐었다. 나도 한국에 있을 때 주한 미군 TV방송 AFKN을 통해 이 프로를 즐겨 봤다.
그런데 카폰은 부패한 시카고 경찰들에게 뇌물을 먹여 한동안 태평성대를 누리다가 경찰이 아니라 국세청에 의해 세금포탈죄로 체포돼 유죄판결을 받고 샌프란시스코의 알카트라즈 감옥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금주령 시대 시카고의 이런 범죄와 부패와 타락상은 오스카 작품상을 탄 뮤지컬 ‘시카고’에서도 잘 그려진 바 있다.  
나도 시카고를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 도시의 특징은 디자인과 생김새가 멋있는 건물이다. 다양한 건축양식의 전시장과도 같은 도시로 많은 건물들이 1871년에 발생, 시카고를 폐허로 만들어놓은 대화재 후에 지은 것들이다. 마천루들이 도시에 깊은 계곡을 이루면서 서 있는데 길을 걷노라면 건물들의 큰 품에 안기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그래서 시카고는 ‘배트맨’이 사는 중후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고댐시티로 안성맞춤이다. 크리스천 베일이 ‘배트맨’으로 그리고 사망한 히스 레저가 조커로 나온 ‘다크 나잇’도 여기서 찍었다. 나는 지난 2007년 이 영화 촬영 취재차 시카고에 갔었는데 그 때 관광을 하면서 지나친 건물 중에 카폰의 ‘스피크이지’(밀주판매 술집)도 있었다. 또 6.25 때 G.I.들이 던져주던 리글리검을 만드는 리글리빌딩도 남 다른 감회로 구경했었다.
시카고 하면 또 다른 명물이 재즈다. 남부의 흑인들이 인종차별을 피해 북상해 시카고에 정착하면서 재즈도 번성하게 되었다. 곳곳에 재즈바가 있는데 나도 시카고에 갔을 때 ‘백룸’이라는 재즈바에 들러 스카치와 재즈에 취했던 기억이 난다.
시카고안들도 뉴요커들처럼 앤젤리노들 알기를 우습게 알긴 하지만 시카고는 매력적인 도시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시내트라도 “시카고는 나 같은 사람의 도시”라고 이 도시를 찬양했다. “시카고는 나 같은 사람의 도시지. 사람들도 마찬가지야/시카고를 걷노라면 시카고는 내 집이나 마찬가지지 그리고 시카고는 온통 재즈야/매번 내가 시카고를 떠나려면 시카고는 내 팔소매를 잡아당기지/시카고는 리글리빌딩이야. 시카고는 나 같은 사람의 도시지.”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6년 11월 8일 화요일

핵소 리지(Hacksaw Ridge)


데즈몬드가 부상자를 밧줄로 묶어 고지 위에서 아래로 내려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

양심적 집총 거부한 데즈몬드 T. 도스 실화 영화


필자가 본 전쟁영화 중에서 가장 참혹하고 끔찍하고 잔인하며 유혈이 강같이 흐르는 전쟁영화다. 역동적이고 강건하며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장에 있는 듯한 현실감을 느끼게 되는 사실적인 작품이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게끔 전쟁의 참상이 적나라하게 묘사됐는데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출작전’은 이에 비하면 아이들 전쟁놀이다. 내장이 튀어나오고 몸과 팔 다리가 너덜너덜하니 끊어지고 쥐가 사체의 얼굴을 파먹는 등 심장 약한 사람이 봤다간 졸도하겠다.
감독은 극단적으로 치닫지 않으면 못 견디는 멜 깁슨. 그의 ‘그리스도의 수난’을 연상케 만드는 피와 고통의 작품인데 묘하게도 이런 피범벅 영화의 주인공은 전장에서 총을 들기를 거부한 실제 인물 데즈몬드 T. 도스(2006년 사망)다. 깁슨은 게이와 유대인을 싫어하는 편협한 인간이긴 하지만 영화 하나는 잘 만든다. 
영화는 도스의 민간인으로서의 생활과 그가 입대해 훈련을 받고 오끼나와 전투에 투입돼 혁혁한 전공을 세우는 얘기로 나뉘어 묘사된다. 버지니아 시골태생의 비쩍 마른 키다리 도스(앤드루 가필드)는 독실한 제7일 안식일 재림교 신자로 어느 형태로든 폭력을 거부한다. 
도스와 그의 1차 대전 베테런인 알콜중독자이자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휴고 위빙)와의 갈등과 함께 도스가 2차 대전에 나간 군인들을 위해 헌혈을 하러 갔다가 만난 아름답고 현명한 간호사 도로시(테레사 파머)와의 사랑이 먼저 이야기된다. 
이어 도스는 군에 입대한다. 그런데 도스가 종교적 이유로 총을 만지지도 않겠다면서 의무병을 시켜달라고 요구, 말뚝상사와 장교들은 물론이요 동료 군인들로부터도 질책을 당하고 시달림을 받고 배척을 당한다. 
도스에게 악을 지르면서 밀어붙이는 사람이 그를 훈련시키는 하웰 상사(빈스 번이 군인영화에 자주 나오는 터프하나 가슴은 따스한 고참상사 역을 재미있고 힘차게 한다). 동료 졸병들 중에서는 특히 터프한 스미티(루크 브레이시)가 도스를 가혹하게 다룬다. 그러나 도스는 자기 믿음을 배신하지 않는데 군재에 회부되기 일보직전에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나 그는 의무병으로 오끼나와 전투에 투입돼 일본군이 사수하는 ‘핵소 고지’ 탈환작전에 뛰어든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면서 일본군의 필사의 방어로 아군 피해가 막대해지자 고지철수 명령이 내리는데 이를 어기고 고지에 달랑 혼자 남는 것이 도스. 그는 “주여 제발 한 명 더 구하도록 저를 도와주소서”를 되뇌이며 부상한 동료들을 100피트 높이의 고지에서 밧줄로 묶어 아래로 내려 보내는데 그가 구한 인명은 적어도 50명. 그 중에는 부상한 일본군도 있다.
도스는 양심적 거부자로서 대통령으로부터 무공훈장을 받은 최초의 군인이다. 처절하고 강인하며 살점과 피가 튀는 영화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키 큰 갈비씨 가필드(‘스파이더 맨’)가 내용에 딱 맞게 캐스팅 돼 안으로 팽팽한 연기를 잘 한다. 조용하게 맹렬한 연기다. 
R. Summit. ★★★★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러빙(Loving)


인종차별을 사랑으로 이긴 리처드와 밀드레드가 포옹하고 있다.

백인 남편 리처드와 흑인 아내 밀드레드의 사랑


지극히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딱 맞는 성을 가진 백인 리처드(조엘 에저턴)와 그의 흑인 아내 밀드레드(루스 네가) 러빙의 극심한 인종차별을 극복한 사랑의 승리담으로 매우 감동적이다. 아직도 ‘흑인들의 생명도 중요하다’라는 팻말을 들고 시위를 해야 하는 요즘 시의에도 맞는 실화로 제프 니콜스 감독의 사랑과 이해와 연민의 마음이 차분히 고인 연출이 돋보인다.
1958년 타인종 간의 결혼이 금지된 버지니아주에 사는 벽돌공 리처드와 그의 연인 밀드레드는 워싱턴 DC에 가서 결혼했다가 주법 위반죄로 1년 실형을 선고 받는다. 판사는 실형 대신 둘이 타주로 이사, 25년 동안 버지니아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집행유예를 내린다. 이에 둘은 자녀들과 함께 DC로 이사해 사나 특히 밀드레드가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몹시 그리워한다.     
그리고 둘은 1964년 몰래 버지니아로 숨어들어 외딴 곳에서 사는데 민권운동이 한창이던 이 때 현명한 밀드레드가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에게 자신들의 사정을 편지로 써 보낸다. 케네디가 이를 미 민권자유연맹(ACLU)에 넘기면서 긴 법정투쟁이 이어지고 1967년 연방 대법원은 타인종 간의 결혼을 합법이라고 판결한다.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은 이들의 삶을 취재하러 온 라이프지의 사진기자 그레이 빌렛(마이클 섀넌)이 지켜보는 가운데 카우치에서 밀드레드의 무릎을 베고 누운 리처드와 밀드레드가 TV의 ‘앤디 그리피스 쇼’를 보면서 소리를 내 웃는 모습. 이를 빌렛이 카메라 렌즈를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찍는다. 
리처드는 민권운동보다는 오직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데 충실한 남편인 반면 불의에 맞서는 것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닌 외유내강의 밀드레드. 이런 두 사람의 모습과 내면을 에저턴과 네가(에티오피아 아버지와 아일랜드 어머니의 혼혈)가 조용하면서도 다부지게 연기한다. 아름다운 연기다.
심한 역경 속에서도 오직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적인 삶을 살려고 애를 쓰는 부부의 사랑의 얘기가 절제된 연출력에 의해 매우 가깝고 단순하며 또 상냥하게 그려졌다. 옛날 얘기가 아니라 요즘 얘기처럼 밀접한 사실감이 있는 작품으로 따뜻한 훈기가 내면의 피부를 어루만지는 듯한 희열을 느끼게 된다. PG-13. Focus.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바비 비



모든 것이 저물고 떨어지는 이 늦가을 조락의 계절에 내가 10대 때 들으며 즐거워하던 팝송을 부른 가수가 또 한 명 세상을 떠났다. 본명이 로버트 토머스 벌라인인 바비 비(Bobby Vee·사진)가 알츠하이머병으로 지난 10월 24일 73세로 미네소타주 로저스에서 타계했다.
그가 알츠하이머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역시 내가 좋아하던 노래들인 ‘위치타 라인맨’ ‘라인스톤 키우보이’ 및 ‘젠틀 온 마이 마인드’를 부른 록과 컨트리가수 글렌 캠블이 생각났다. 그도 지금 이 질병을 앓고 있는데 지난해에 생애 마지막 순회공연을 한 바 있다.
바비 비하면 제일 먼저 흥얼거려지는 노래가 ‘테이크 굿 케어 오브 마이 베이비’다. 자기를 버리고 간 애인의 새 남자에게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얘기를 하면서 잘 보살펴 주라”고 청승맞은 부탁을 하는 노래다. 비가 1961년에 불러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었는데 이 노래는 한국에서도 빅히트, 다방과 음악감상실과 라디오 방송의 DJ들이 계속 틀어댔었다.
귀엽게 생긴 비는 1959년 그의 첫 싱글 ‘수지 베이비’가 히트하면서 각광을 받기 시작해 이어 ‘테이크 굿 케어 오브 마이 베이비’ 등 히트곡들을 줄줄이 내놓으며 10대들의 우상이 되었다. ‘수지 베이비’는 비와 묘한 인연이 있는 모범생처럼 생긴 안경을 낀 록가수 버디 할리의 히트곡으로 템포가 빠른 ‘페기 수’를 본 따며 이 곡을 치하한 노래다.
내가 고등학생 때 들어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노래들은 한두 곡이 아니다. “굿나잇 하기 전에 마지막 키스를 달라”고 사정사정하는 ‘원 라스트 키스’와 “그의 입술이 내 입술보다 더 네게 키스를 잘 해준다면 내 자존심을 잊을 테니 그에게 달려가라”고 속에도 없는 말을 하는 ‘런 투 힘’ 그리고 “나는 네가 악마인지 천사인지 모르겠으나 그 어느 것이든지 너를 그리워할 것”이라며 ‘아무르 푸’식의 사랑을 고백하는 ‘데블 오어 에인절’ 등이다. 틴에이저였던 내 가슴에 와 닿았던 노래들이다. 틴에이저란 국적을 불문하고 마음이 같았다.
또 “나는 너를 내일엔 두 곱으로 사랑할 것이며 말로 할 수 없게끔 사랑한다”는 ‘모어 댄 아이 캔 세이’와 “사람들이 널 돌아다니며 사랑하는 사람이라는데 내게 시치미 떼고 거짓말 해 봐야 난 알게 되지. 밤이 천개의 눈을 가졌으니까”라고 은근히 애인을 겁주는 ‘더 나잇 해즈 어 다우전드 아이즈’ 그리고 “난 고무공처럼 계속해 네게 튀어 돌아온다”는 ‘러버 볼’ 및 “널 만나고 나서 내 인생이 온통 달라졌다”고 어른 같은 소리를 하는 ‘신스 아이 멧 유 베이비’ 등도 가사를 외울 정도로 많이 들었다. 그 덕택에 영어실력이 좀 늘었다.
생애 100개 히트곡 차트에 38곡이 오르고 그 중 10곡이 탑20 안에 들어갔던 비가 가수가 된 경우는 아주 특이하다. 1959년 2월3일. ‘댓일 비 더 데이’와 ‘페기 수’ 같은 히트송을 부른 버디 할리(22)와 ‘라 밤바’와 ‘다나’ 등 히트송을 노래한 히스패닉 리치 발렌스(17) 및 빅 바퍼(28) 등 ‘윈터 댄스파티’ 순회공연팀이 탄 경비행기가 다음 목적지인 미네소타주 모어헤드로 가다 추락, 모두 사망했다. 이 얘기는 루 다이아몬드 필립스가 발렌스로 나온 영화 ‘라 밤바’에서 생생히 그려졌다.
이 때 15세로 할리의 팬이자 그의 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비가 할리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고교 동급생들로 급조된 5인조 밴드 ‘쇄도즈’를 이끌고 고향인 노스다코타주 화고(영화와 TV 시리즈로 잘 알려진 도시)로부터 모어헤드에 도착, 공연을 한 것이 성공을 하면서 비의 가수로서의 생애가 시작됐다. 이 비극적 날은 단 맥클린이 부른 ‘아메리칸 파이’에서 ‘음악이 죽은 날’로 추모되었고 비는 1963년에 추모앨범 ‘아이 리멤버 버디 할리’를 출반했다.
비의 음성은 한 때 잠깐 그와 함께 순회공연을 한 뒤로 친구지간이 된 올 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밥 딜런의 표현이 아주 정확하다. 딜런은 “비의 음성은 금속성의 모가 진 톤을 지녔으며 은종의 소리처럼 음악적이다”고 말했는데 비의 부음을 듣고 다시 들은 그의 노래 소리가 낭랑하기 짝이 없다. 딜런은 믹 재거와 마돈나를 비롯해 자기와 함께 노래를 부른 수많은 가수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사람이 바비 비라고 말한 바 있다.
바비 비는 알츠하이머 진단이 나온 2011년까지 노래를 불렀는데 그 해 3월 로카빌리 홀 오브 페임 전당에 이름이 올랐고 지난 2014년 2월 가족과 친구들에 의해 비의 마지막 앨범 ‘어도비 세션즈가’ 나왔다.
바비 비도 가고 이제 내가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즐겨 듣던 노래들을 부른 가수들이 몇 안 남았다. 폴 앵카, 브렌다 리, 바비 라이델, 바비 빈튼, 닐 세다카, 해리 벨라폰테, 자니 마티스, 앤디 윌리엄스, 엥겔버트 험퍼딩크, 탐 존스, 토니 베넷 그리고 알 마티노와 비치보이즈의 브라이언 윌슨… 이들도 불원 노래만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날 테니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6년 10월 28일 금요일

‘존스 부부 따라 가기’의 존 햄




“난 제임스 본드의 팬 그의 영화를 통해 세상 구경”


로맨스를 곁들인 스파이 액션 코미디‘존스 부부 따라 가기’(Keeping Up with the Joneses)에서 여행작가로 위장한 멋쟁이 스파이 팀 존스로 나오는 존 햄(41)과의 인터뷰가 지난 8일 샌타모니카의 페어몬트 미라마 호텔에서 있었다. 훤칠한 키에 건장한 체구 그리고 옛 할리웃 스타의 멋을 지닌 미남 햄은 늘 친절하고 상냥하고 겸손해 친근감이 가는 배우다. 전형적인 미국 신사 타입인데 인터뷰 내내 미소를 지으면서 자유롭고 편안하게 질문에 대답했다. 때로 장난기 짙은 아이처럼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상소리마저 섞어가면서 인터뷰를 즐기는 듯했다. 햄은 AMC-TV의 인기 드라마 시리즈‘매드 멘’(Mad Men)으로 스타가 된 사람으로 지금 작은 브라운관을 벗어나 빅 스크린에서도 성공하려고 노력 중인데 아직은 빅 히트작이 없다.  

-스파이 장르와 어떤 관계이며 제임스 본드의 팬인가.
“난 제임스 본드의 열렬한 팬인데 어릴 때 미주리의 작은 동네에 살면서 그의 영화를 통해 세상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의 영화를 통해 유럽과 세계를 여행한다는 것이야 말로 매력적이요 멋있는 경험이었다. 난 본드의 영화뿐 아니라 책도 도서관에서 빌려다 봤다. 사람들이 날 보고 다음 제임스 본드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영광이나 본드는 어디까지나 영국 사람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이 영화에서 스파이 노릇 하기가 즐거웠는지.
“스파이 노릇 한다는 것은 진짜로 멋진 재미다. 나쁜 자들은 내 총을 맞고 쓰러지나 난 절대로 총을 안 맞는다. 담을 기어오르고 차를 거꾸로 고속으로 모는 일은 즐거운 일이었다.”     

-액션 연기하기가 힘들었는가.
“즐기며 했다. 영화에서 차를 고속으로 몬 사람은 진짜 나다. 일부는 특수효과이지만 난 차를 고속으로 몰고 또 회전하는 기술을 배워 신나게 사용했다. 그런 흥분되는 기회는 실제로는 좀처럼 많지 않은 것이다.”

-팀은 친구가 된 이웃에 사는 평범한 제프의 삶을 동경하는데.
“바로 그 점이 이 영화를 어리석은 장난과도 같은 영화의 범주를 벗어나게 한 것이다. 스파이 생활은 겉으로 보기엔 멋있는 것 같지만 그는 언제나 남을 속이고 또 위험 속에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사람을 책을 표지만 보고 판단하듯이 판단하지 말라는 얘기다. 남이 보기엔 모든 것을 다 갖고 있는 것 같은 사람들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처럼 필요하고 원하고 욕망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부부 스파이 팀(아래)과 그의 아내 나탈리가 킬러들을 향해 사격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 이 영화에 나오기로 했는가. 
“난 이 영화의 감독 그렉 모톨라와 제프 역의 잭 갈리피아나키스와는 오래 전부터 잘 아는 사이다. 이렇게 친구처럼 잘 아는 사람들과 영화를 만든다는 일은 흔치 않다. 모르는 사람들과 일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게다가 나와 잭의 아내 역으로 갤 개도와 이슬라 피셔가 합류했으니 금상첨화라고 하겠다. 우리 넷은 함께 같은 장면에 많이 나오면서 즐겼다.”

-존 햄 하면 모두‘매드 멘’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 이후로 역을 어떻게 선정하는가.
“난 그저 계속해 일하고 싶을 뿐이다. 한군데만 영원히 매달릴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린 다 늙고 또 모든 것은 변한다. 모든 것은 다 앞으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매드 멘’으로 보낸 나의 과거는 앞으로의 가능성과 기회를 찾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난 그저 내가 흥미롭게 여기는 일들을 계속해 하고 싶을 뿐이다.”  

-영화에서 뱀들이 나오는데 진짜 뱀인가.
“일부는 진짜다. 그런데 난 뱀에게 관심이 많다. 난 미주리에서 자라 뱀들을 많이 봤다. 어디를 가도 뱀들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의 뱀들은 위험한 것들이 아니다.”

-뱀 고기 먹어본 적 있는가.
“난 어렸을 때 달팽이를 비롯해 여러 가지를 먹었는데 지금도 무엇이든지 먹을 수는 있지만 아직 뱀 고기는 못 먹어 봤다.”

-당신은 여행작가로 나오는데 실제로 여행해 본 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곳은 어디인가.
“인도다. 아름답고 모든 것이 넘치는 나라다. 난 그 곳에 6개월간 머물렀었다. 그 나라의 문화는 백만가지가 넘을 정도로 다양한데 난 정말로 그곳에 더 오래 머물면서 그것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배우고 싶었다.”

-취미는 무엇인가. 
“내가 늘 좋아해온 것은 스포츠에 참가하는 일이다. 난 고등학생 때 운동선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운동선수가 되는 일은 원치 않았다. 하루에 8시간씩 체육관에서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난 지금도 LA 야구팀 선수로 뛰고 또 테니스와 골프도 한다. 운동은 나를 바쁘게 할 뿐 아니라 젊게 만든다. 난 특히 야구를 좋아하는데 내 고향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야구팀은 그곳 사람들에겐 그들 삶의 일부나 마찬가지다. 난 인도에 머무를 때 크리켓을 시도해 봤으나 엉망이었다.”

-남에게 말하기가 쑥스러우나 재미있게 본 영화는.
“‘쇼걸스’다. 그 영화의 감독 폴 베어호벤은 천재이든지 아니면 미친 사람이든지 둘 중 하나다. 그의 다른 영화 ‘로보캅’도 마찬가지다. 난 이 두 영화에 완전히 반했다. 최근에 ‘쇼걸스’에 나온 지나 거숀을 만났는데 그 때 그 영화에 대해 말이 하고 싶어 목구멍이 근질거렸으나 꾹 참았다.”

-이 영화는 옛날 할리웃 풍인데.
“시간 보내기에 딱 맞는 즐거운 모험영화로 케리 그랜트와 오드리 헵번이 온갖 모험을 경험하던 영화와 비슷한 분위기다. 그렇다고 내가 케리 그랜트라는 말은 아니다. 옛날에는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이런 종류의 영화가 많았는데 요즘 영화들은 만화의 주인공들이나 수퍼히로들이 주인공들이다. 그들 나름대로 재미는 있지만 난 좀 다른 재미를 원한다.”

-여자의 어떤 점에서 매력을 느끼는가.
“난 늘 지적이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껴왔다.”

-현재의 자신에게 만족하는가.
“그렇다고 본다. 날 봐라. 꽤 괜찮지 않은가.”

-당신 아내 역의 갤 개도가 당신을 우습고 영리한 사람이라며 토크쇼 호스트를 해도 되겠다고 칭찬하던데 그럴 생각이라도 있는지.
“난 글을 안 쓴다. 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이상하게 글 쓰는데 관심이 없다. 어렵고 별 재미를 못 느낀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토크쇼 호스트를 하겠는가.”

-음악은 당신에게 영감이나 표현의 매체로서 얼마나 중요한 구실을 하는가.
“난 별로 음악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즐길 줄은 안다. 노래나 연주를 잘하는 사람들의 공연을 즐기기는 하지만 난 그런 재주가 없다. 난 초등학교 3학년 때 바이얼린을 배웠는데 신통치가 못했다. 난 고도의 재능을 지닌 가수나 연주자들의 연주를 들을 때마다 큰 의문에 젖곤 한다. 내게 있어 그들은 마법사나 마찬가지다. 난 밴조를 연주하고 싶다. 재미있는 악기라고 생각한다.”

-‘매드 멘’의 출연진들과 종종 만나는가.
“우린 그 후로 각기 제 갈 길들로 갔다. 우린 10년간 그 시리즈로 맺어졌지만 이제 서로 새로운 것을 모색하고 있다. 앞으로 나아가면서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배우가 된 이유다. 우린 모두 다음은 뭐지 라는 물음에 대한 다른 대답을 찾으려고 하고 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