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11월 30일 월요일

허영의 산물




지난 13일에 개봉된 할리웃의 수퍼스타 앤젤리나 졸리 핏(40)이 제작과 감독을 하고 또 각본을 쓰고 주연까지 한 ‘바닷가에서’(By the Sea)가 비평가들의 혹평과 함께 흥행에서 참패하면서 지금 할리웃에서는 ‘스타와의 관계유지용 영화’에 대한 회의론이 나돌고 있다.
‘스타와의 관계유지용 영화’라는 것은 스튜디오가 수퍼스타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흥행성이 희박한 아트하우스 스타일 영화인데도 스타들이 원해 만드는 영화를 말한다. 이를 ‘개인의 열정의 작품’이요 ‘특혜 영화’라고도 부르는데 비평가들은 ‘허영의 산물’이라고 일컫는다.
졸리 핏의 남편 브래드 핏이 공연하는 ‘바닷가에서’는 부부문제를 다른 유럽풍의 영화로 보잘 것 없는 평과 관객의 외면으로 영화를 배급한 워너 브라더스는 4,000만달러의 손해를 보게 됐다.
이 영화와 비슷한 때에 개봉된 샌드라 불락이 주연하고 조지 클루니가 제작한 정치 풍자영화 ‘우리의 상표는 위기’도 ‘스타와의 관계유지용 영화’로 이 역시 비평가들과 관객 모두로부터 철저히 외면을 당했다. 이로 인해 배급사인 소니도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됐다. 그래서 지금 할리웃에선 이들 영화에 대한 자금투자의 타당성을 놓고 검소란 모르는 스튜디오들이 절약을 생각하고 있다고 연예 전문지들이 보도했다.
‘바닷가에서’는 졸리 핏의 세 번째 감독 작품으로 졸리는 최근 인터뷰에서 “모든 부부에게 살면서 큰 시련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견디어 내면서 끝까지 함께 있으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어 “관객들이 영화를 본 뒤 얘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면서 “나는 관객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한다”고 덧붙였다.
큰 키에 긴 갈색머리 그리고 큰 눈과 탐스럽게 두툼한 입술을 한 졸리는 해골처럼 마르긴 했지만 아름답고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다(사진).
인터뷰에서도 “나는 완전한 나 자신”이라고 말할 정도로 도도하고 위풍당당해 접근하기가 다소 망설여지기까지 하나 진지하고 솔직한 사람이어서 나는 그녀를 배우라기보다 인간으로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녀가 인본주의자로서 유엔 특별대사로 전 세계를 돌며 난민보호와 환경보호를 위해 활동하는 것도 찬양할 만한 일이다.
졸리 핏은 절제수술하고 인공유방으로 대체한 자신의 건강문제에 대해서도 솔직히 얘기했다. 영화의 욕조 속 유방노출 장면에 대해 그녀는 “처음에는 잠시 망설였으나 수술을 받고도 유방을 지닐 수 있으며 그것이 약간 다르게 느껴지긴 하나 여전히 여자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허점과 상처야말로 인간적인 아름다움”이라고 덧붙였다.
졸리 핏은 또 나이에 대해서도 솔직했다. 그녀는 “난 이제 40이 되었는데 50과 60이 되는 것은 행복하다”면서 “나는 늙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졸리 핏은 남편 브래드를 아주 매력적인 남자라고 추켜세웠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도 남편을 보고 매력적이라고 느낄 줄 아나 난 내 아이들의 아버지요 나의 절친한 친구인 그를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녀는 이어 “나는 그를 무척 사랑한다”면서 “우리도 영화 속의 부부처럼 문제도 있고 싸우기도 하나 문제가 있으면 미루지 않고 신속히 해결하려고 노력하며 또 서로 많은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어나간다”고 말했다.
졸리 핏은 브래드와의 10년간의 삶을 통해 배운 원만한 관계유지의 비결은 “타협과 함께 강하게 나 자신을 지키면서 상대방이 최고가 되도록 돕는 것”이라면서 “둘이 공동목표를 가지고 아울러 상대의 뜻을 바꾸도록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 것도 관계유지의 비결”이라고 덧붙였다.
졸리 핏에게 있어 브래드보다 더 중요한 것은 6명의 자녀들이다. 그녀는 “무조건 아이들이 먼저”라면서 “난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빼앗기거나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게 된다면 결코 일을 안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큰 아이들 셋은 졸리 핏이 촬영할 때면 세트에서 함께 일한다고.
‘바닷가에서’는 실패했지만 졸리 핏은 감독을 계속할 것이다. 그녀는 “나는 감독하는 일을 사랑한다”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은 역사와 전쟁영화로 나는 지금 캄보디아에서 크메르루주의 양민 대학살 사건을 다룬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알려줬다. 그녀의 감독 데뷔작은 보스니아전쟁을 그린 ‘피와 꿀의 땅에서’(2011)이고 두 번째 것은 태평양전쟁을 다룬 ‘언브로큰’(2014)이다.
그녀는 감독이라는 일에 대해 “‘바닷가에서’ 처음으로 배우인 나 자신을 내가 감독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면서 “그러나 남편을 감독하는 것은 재미있었다”며 웃었다.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즐거웠던 일은 브래드와 정식 결혼 후 사흘 만에 말타에서 영화를 찍어 최고의 신혼여행을 한 기분이었다고. 앤젤리나 졸리와 브래드 핏은 10년 전 스파이 스릴러 ‘미스터 앤 미시즈 스미스’에 공연하면서 사랑이 싹텄었다. 졸리 핏의 다음 영화의 성공을 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5년 11월 23일 월요일

‘캐롤’(Carol)의 케이트 블랜쳇




“사랑은 위험하나 밧줄 달린 번지점프 같아”


동성애자의 이성과 결혼은 남에게 고통주려함은 아닐 것
모든 조직·유기체처럼 교회도 변하지 않으면 멸종될 수도


20일 개봉되는‘캐롤’(Carol-영화평 참조)에서 젊은 여자와 정열적인 동성애를 불사르는 중년의 가정주부 캐롤로 나오는 오스카 주연상 수상자(블루 재스민)인 케이트 블랜쳇(46)과의 인터뷰가 지난 13일 베벌리힐스의 포시즌스 호텔에서 있었다. 짙은 푸른색의 화사한 드레스를 입고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인터뷰에 응한 블랜쳇은 홍조를 띤 백색얼굴에 긴 금발을 늘어뜨린 미인이었는데 아름다우면서도 눈초리가 매서워 위압적인 분위기마저 느꼈다.  두 손으로 제스처를 쓰다가 또 손으로 턱을 받쳤다가 하면서 여우같은 모습의 표정 연기까지 동원해 질문에 길고 상세하게 대답을 했는데 매우 지적인 여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블랜쳇은 캐롤 역으로 오스카 주연상 후보에 오를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이 영화는 1950년대로선 굉장히 과감한 소설인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금의 값’이 원작인데 당신은 영화에 나오면서 어떤 느낌을 가졌었는지.
“당시로선 혁명적인 소설이었다. 난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팬으로 책은 미학적으로나 심리적으로 1950년대에 강렬한 조명을 비추고 있다. 핵가족시대요 소비시대였던 당시의 모습을 영화에서도 잘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영화가 감정적으로나 물리적으로 폐쇄적이고 질식할 것만 같은 이유도 거기에 있다. 1950년대 자란 나로서도 매우 다른 렌즈로 그 당시를 들여다보는 경험이었다.”

-시상시즌이 왔다. 당신은 이 영화와 함께 CBS-TV의 댄 래더 오보사건을 다룬 ‘진실’(Truth)에서의 제작자 역으로 모두 오스카 주연상 후보에 오를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말 큰 칭찬으로 받아들이겠다. 내가 특히 자랑스러운 것은 내가 관여하고 있는 제작사 더티 필름스가 이 두 영화에 모두 참여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난 아주 자랑스러운데 유감인 것은 두 영화가 거의 동시에 개봉된 일이다. 그러나 두 영화는 내용이 완전히 달라 서로 공존할 수 있다고 본다. 난 예전과 마찬가지로 시상시즌의 절차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런 것은 아이폰 세대들이 더 잘 알 것이다. 그러나 나도 어차피 그 같은 과정에 동참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도 안다.”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내는가.
“난 크리스마스 샤핑을 생각하면 공포에 질리곤 한다. 크리스마스도 좋지만 우린 땡스기빙을 더 즐긴다. 나의 아버지가 미국 사람이어서(어머니는 호주인) 기족이 함께 모이는 땡스기빙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는 엄청나게 큰 크리스마스트리를 마련했었다. 그리고 온 가족이 베니스를 비롯해 유럽여행을 했다. 야단스럽지 않은 크리스마스로 아이들이 주가 돼 축하를 한다.”

-사랑은 집념이라고 생각하는가.
“사랑에는 여러 타입이 있다고 본다. 사랑이 오래 가려면 이런 다른 타입을 다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캐롤이 사랑하는 테레즈를 정열적으로 집념하면서도 놓아준 것도 이런 타입이 다른 사랑의 행위다. 둘이 모텔에서 마침내 사랑의 행위를 할 때도 그 것은 집념의 행위라기보다 누가 인도하고 누가 따르는 대신 함께 매여 공존하는 행위여서 아름답다. 사랑은 동시에 이타적이요 또 이기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인 테레즈(왼쪽) 앞에서 딸을 잃게 된 캐롤이 울고 있다.

-당신은 동성애자이면서도 결혼을 해 결국 희생되는 사람은 가정을 지키려는 남편이다. 이런 일은 요즘에도 일어나는데 당신의 이에 대한 견해는.
“캐롤의 사랑이 불법이며 변태로 여겨지니 다른 방법이 없다고 본다. 옛날보다는 많이 나아졌으나 요즘에도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들과는 달리 자기 성애의 기호여부를 밝히고 얘기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다. 내성적이요 매우 사적인 캐롤은 남편 하지와 결혼해 그 것을 유지해 보려고 애썼지만 실패했다. 둘 간에는 사랑이 있었다. 그래서 캐롤은 하지에게 우리 모두 진짜로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한 것이다. 아직도 동성애자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있다.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살 권리가 있는 대도 말이다. 우리나라(호주)도 아직 동성결혼을 인정하지 않는다.”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와 결혼하는 것을 어떻게 보는가.
“사람마다 다른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기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그럴 수도 있고 또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이 불편해서도 그럴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꼭 남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 그런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당신은 현재 두 개의 다른 영화에 나오고 있는데 둘은 얼마나 서로 다른가.
“완전히 다르다. 얘기도 다를 뿐 아니라 인물들의 성격 개발의 리듬도 다르다. 따라서 그 둘의 심장의 박동도 내겐 다르게 느껴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감독들이 세트에서 아주 다른 분위기를 조성한 사실이다. 그래서 난 각기 다른 세상으로 들어갈 때 아주 기뻤다. 두 세상이 너무 달랐고 또 영화제작 스타일도 서로 아주 틀렸기 때문이다.”

-당신이 처음으로 사랑했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당신의 사랑이 어떻게 변했다고 보는가.
“난 아주 알맞은 때에 내 영혼의 동반자를 만난 행운아다. 우린 그 때 둘이 같이 물불 안 가리고 서로에게 뛰어들었다. 우리의 관계가 훌륭한 것은 우리가 서로 상대의 이해 관심사를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린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 변하지 않는 것은 서로에 대한 존경과 부드러움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와 함께 유머감각도 사랑 유지에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나는 내 남편이 나를 웃길 때마다 매번 다시 그에게 사랑에 빠지는 기분이다. 사랑은 번지점프 같은 것으로 위험한 것이나 밧줄이 당신을 지탱해 주길 바라는 것과도 같다.”

-자라면서 당신에게 큰 영향을 준 영화는 무엇인가.
“제나 롤랜즈(얼마 전 아카데미 명예상인 가버너즈상을 받았다)가 나온 ‘우먼 언더 디 인풀루언스’이다. 그렇게 생살처럼 노골적이요 사실적이며 또 공개적인 영화와 연기를 본 것은 그 것이 처음이다. 마치 영화 속 롤랜즈의 삶이 내게 일어나는 것 같은 경험을 했다. 영화를 보면서 완전히 나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흥분했었다.”

-크리스마스 선물 중 가장 좋았던 것은 무엇인가.
“난 늘 아이들에게 너희들이 너무 좋아해 남에게 주기 싫은 것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라고 이른다. 캐서린 헵번의 질녀가 준 헵번의 장갑을 아끼고 결혼 15년 후 시어머니가 준 그녀의 약혼반지도 귀중하다. 난 결혼하는 내 친구에게 내가 아끼는 보석을 주었는데 이렇듯이 나는 상점에 가서 물건을 사기보다 내가 떨어지기 싫은 것과 떨어지면서 선사한다. 선물로 받은 것 중에 싫었던 것은 결혼 후 몇 년간 남편이 준 진공청소기와 믹서와 다리미이다.”

-새로 영화계에 뛰어드는 사람들에게 해줄 충고는 무엇인가.
“배우로서의 성공은 ‘예스’하는 것만큼이나 ‘노’하는 데도 달려 있다. 일은 진지하게 생각하되 자신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렸을 때 애독한 책은 무엇인가.
“난 탐정소설을 좋아해 ‘낸시 드루’의 팬이었다. 내게 큰 영향을 준 책은 ‘투 킬 어 목킹버드’이다. 나 책 냄새 맡기를 좋아했다.”
                                                          
-당신은 캐롤처럼 우아한데 그것은 타고 난 것인가.
“난 늘 나를 모양을 낼 줄 모르는 여자라고 여기고 또 우아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 말 고맙다.

-바티칸은 여전히 동성애를 비난하는데 당신은 교회가 변하리라고 보는가.
“어떤 조직이나 유기체나 변하지 않으면 멸종되게 마련이다. 모든 것은 진화하게 돼 있다. 따라서 교회도 진화하지 않으면 멸종되리라고 본다. 지금 교황인 프랜시스는 과거 교황들과는 매우 다른 데가 많아 교회도 과거로부터 큰 출발을 할지도 모른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캐롤(Carol)


캐롤(오른쪽)이 백화점에서 테레즈로부터 물건을 사면서 눈을 맞추고 있다.

1950년대 두 여인의 사랑 절제 있게 그려


1950년대 초 중년의 가정주부와 젊은 백화점 여점원 간의 사랑을 그린 향수감 짙은 잘 만든 드라마로 소설 ‘기차 안의 낯선 사람들’과 ‘재주꾼 미스터 리플리’를 쓴 여류작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금의 값’(The Price of Salt)이 원작이다.  
두 연인이 만나 사랑하면서 희열하고 이어 다투면서 울고불고하다가 헤어진 뒤 심한 가슴앓이 끝에 재회한다는 사랑 영화의 공식적 틀을 그대로 따라가 얘기는 단순하나 두 주인공의 연기가 눈부시다. 
아름답고 지적이며 또 감수성 있으며 기능적으로도 우수한 작품인데 지나치게 조심을 하면서 마치 연애소설이라기보다 학술 논문을 쓰듯이 딱딱하고 주도면밀한 것이 영화의 깊은 풍미를 제대로 느끼는데 방해가 되고 있다. 
피가 끓는 사랑의 영화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에는 분위기가 다소 차고 경직됐다. 그러나 지적인 흥미와 관심과 함께 50년대 초의 미국의 모습과 풍습 그리고 당시의 동성애에 대한 인식 등을 관찰할 수 있는 고급 드라마다.
영화는 회상식으로 서술된다. 1952~53년 크리스마스/신년 할러데이 기간. 뉴저지주에 사는 상류층 여인 캐롤(케이트 블랜쳇)은 점심을 먹으러 맨해턴에 왔다가 백화점 양품부에 들른다. 여기서 캐롤은 젊고 아름답게 생긴 사진작가 지망생인 테레즈(루니 마라)를 보고 마음이 가는데 테레즈도 캐롤에게 야릇한 관심을 느낀다. 테레즈에게는 자기를 따르는 남자들이 있지만 캐롤은 이들과 본격적인 이성관계를 맺지는 않는다.
한편 캐롤은 물건을 산 뒤 진열대 위에 자신의 가죽장갑을 남겨놓고 가는데 일부러 남긴 것인지 아니면 모르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테레즈가 이 장갑을 캐롤을 찾아가 전달하면서 둘의 관계가 시작된다.
그런데 캐롤은 자기 어린 딸의 대모이자 절친한 친구인 애비(새라 폴슨)와 동성애 관계를 가진 것 때문에 남편 하지(카일 챈들러)로부터 이혼소송을 당한 생태다. 그래서 캐롤의 테레즈에 대한 열정은 잘못하면 캐롤의 딸에 대한 양육권은 물론이요 방문권마저 박탈당할 재앙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뜨거운 사랑을 참지 못한 캐롤은 남편과 딸이 며칠 집을 비운 사이 테레즈에게 서부 기차여행을 청하고 테레즈도 이에 응한다. 얘기가 여기까지 오는데 근 1시간이 걸리는데 영화의 진행속도가 매우 느리다. 그리고 둘은 아이오와주 워털루의 작은 모텔에 들면서 비로소 뜨거운 육체의 기쁨을 누린다. 두 주인공의 상반신 나체와 사랑의 행위가 매우 품위 있고 아름답게 묘사됐다.
집요한 하지의 추적으로 캐롤과 테레즈의 관계가 드러나면서 캐롤은 딸을 잃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테레즈에게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 세월은 몇 년이 지나 영화의 첫 장면으로 돌아간다. 블랜쳇의 안으로 파고드는 강렬한 연기와 마라의 연약한 듯 하면서도 강인하고 변화무쌍한 연기가 일품이다. 촬영과 의상과 옛날을 잘 재현한 프로덕션 디자인 및 조 스태포드의 노래 등 흘러간 팝송을 잘 이용한 음악도 아주 좋다. R. Weinstein. 일부지역.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확인하라!




지금 LA에서는 언론에 관한 2편의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먼저 개봉된 영화는 소위 ‘래더게이트’라 불리는 CBS-TV의 앵커맨 댄 래더의 부시의 병역문제를 둘러싼 오보를 다룬 ‘진실’(Truth)이다.
래더는 미 대통령 선거 2개월 전인 지난 2004년 9월8일 시사프로 ‘60분’을 통해 당시 대통령이었던 조지 W. 부시가 과거 특혜를 이용, 텍사스주 공군방위군에 입대한 뒤 근무지를 이탈하면서 군인으로서의 의무를 제대로 준수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 보도의 근거가 된 문서가 가짜임이 밝혀지면서 래더는 사임하고 프로의 제작자인 메리 메입스는 해고를 당했다. 진실보도가 허위보도가 된 셈인데 래더는 지금까지도 비록 문서는 가짜이나 부시의 근무 태만은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영화에서 래더로는 로버트 레드포드가 메입스로는 케이트 블랜쳇이 나오는데 잘 만든 재미있는 작품이나 지나치게 래더 편을 들고 있는 느낌이다. 대통령 선거전이 가열되고 있는 요즘 보면 딱 알맞을 영화다.
이어 얼마 전에 개봉된 ‘스팟라이트’(Spotlight)는 2002년 막강한 보스턴 천주교 교구 내 신부들의 아동 성추행을 보도한 보스턴 글로브지의 기자들의 취재를 다룬 튼튼한 드라마다. 신문사 내 4명으로 구성된 심층조사 보도팀인 ‘스팟라이트’(사진)가 6개월에 걸친 취재 끝에 교구 내 90여명의 신부들의 아동 성추행을 교회가 알고서도 조직적으로 은폐한 사실을 보도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로 인해 LA를 비롯한 전 미국 내 천주교 신부들의 아동 성추행과 전 세계적으로 만연한 신부들의 섹스 스캔들이 폭로되면서 천주교는 지금까지 문제수습에 무려 30억달러를 써야 했다.
취재팀의 팀장으로 마이클 키튼이 나오고 마크 러팔로와 레이철 맥애담스 등이 취재기자들로 나오는 앙상블 캐스트 영화로 마치 수사영화를 보듯이 긴장감과 스릴이 있는데 배우를 비롯해 작품이 오스카상 후보에 오를 기능성이 크다.
‘래더게이트’의 원인은 보도의 소스 진위여부를 100%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도팀이 문제의 문서의 진위여부를 놓고 필적 감정사까지 고용해 99%의 확인 작업을 한다. 그러나 마감날짜에 쫓기면서 부시를 잡겠다는 욕심으로 인해 100%의 확인 없이 보도, 래더는 TV를 통해 공개사과를 하고 방송인으로서의 생명도 끝이 났다. 그러니까 1%의 확인 불이행 때문에 일어난 희대의 오보사건이었다.
‘스팟라이트’에서도 이런 확인 작업이 자세히 묘사된다. 취재팀이 신부들에게 성추행을 당한 희생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사실여부를 묻는 모습과 함께 시끌벅적한 편집국 내 풍경이 매우 생생하게 그려졌다.
난 이 영화를 보면서 과거 한국에서의 내 기자시절이 생각나 감개가 무량했다. 내가 한국일보의 졸병기자였을 때 후에 주불 특파원을 지낸 김승웅 선배를 비롯한 고참들로부터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은 것이 ‘100% 확인’이었다. 기사를 써 데스크에 넘기면 기사를 손보던 데스크들이 매번 묻는 말이 “야, 박흥진 너 이거 확인한 것 맞지”였다. 그래서 확인은 그 뒤로 나의 좌우명이 되었고 후에 내가 미주 한국일보에 와 데스크 노릇을 하면서 신참 기자들에게 가르친 첫 말도 ‘100% 확인’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 확인을 게을리 하다가 오보를 낸 적이 더러 있다. 글을 쓰면서 어딘가 찜찜한 부분이 있으면 꼭 확인을 해야 하는데도 게으름을 피우면서 이를 어물쩍 넘기다 보면 반드시 탈이 나게 마련이다. 독자로부터 오보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받으면서 등에 식은땀이 흐른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좋은 기자가 되는 자격 중 하나가 ‘100% 확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밖에 또 다른 자격을 과연 ‘스팟라이트’의 팀장 역의 키튼은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해서 며칠 전 그를 인터뷰했을 때 물었다.
키튼은 이에 대뜸 “완전무결”이라고 대답했다. 기자라는 인격체의 완전무결을 의미하는 듯했다. 이어 그는 파고들어 사실을 캐내고 중립을 지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내가 이에 “집요성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더니 키튼은 “그것도 맞다”고 말했다.
내가 ‘확인’과 ‘집요성’ 이외에 생각하는 좋은 기자로서의 자격요건들은 ‘불의를 의롭게 하겠다는 결의’와 ‘억눌리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다. 나는 이런 뜻을 품고 기자가 되었지만 과연 그 뜻을 얼마나 실천으로 옮겼는지는 의문이다.
‘진실’과 ‘스팟라이트’는 언론매체가 인터넷화 하는 요즘에 보면 향수감을 불러일으키는 ‘구식 언론’의 모습이다. 특히 요즘 젊은이들은 종이신문을 외면해 신문사들이 문을 닫고 최근 오렌지카운티 레지스터처럼 파산신청을 하거나 기자를 비롯한 직원들이 대량 해고를 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40여년을 기자생활을 해온 나로선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남의 일 같지가 않아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해지곤 한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5년 11월 17일 화요일

바닷가에서(By the Sea)


바네사가 남편 롤랜드의 품에 안겨 고통과 슬픔을 앓고 있다.

졸리와 핏의 권태로운 얘기 지루하게 담아


순전히 앤젤리나 졸리 핏의 허영의 산물로 수퍼스타인 그녀의 이름 때문에 유니버설사가 마지못해 만들었음에 분명하다. 얘기 결핍증에 걸린 재미라곤 전연 없는 영화로 2시간이 넘도록 영화에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짙은 화장을 한 앤젤리나가 공연히 폼을 잡고 심각한 표정을 짓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로 그녀는 영화 내내 줄담배를 타우면서 죽을상을 해 보고 있자니 속이 답답하고 육신이 불편해 영화가 끝나면서 해방의 기쁨을 누렸다.
앤젤리나의 세 번째 감독 영화로 감독 외에도 각본도 쓰고 제작도 하고 또 주연도 하면서 1인4역을 하고 있는 사이비 예술영화로 지난해에 나온 ‘언브로큰’을 비롯한 그녀의 연출솜씨는 잘 해야 65점 정도다. 
브래드 핏과 앤젤리나 졸리 핏이 무슨 문제가 있는 부부로 나와 영화 내내 담배 태우고 술 마시고 침울한 표정을 지으면서 ‘피핑 탐’ 짓으로 무료를 달래다가 끝이 나는 극적으로 처음부터 사망한 영화로 얘기가 흐름이 없이 고여 상한 냄새가 난다. 
유럽 영화 흉내를 낸 이 작품은 특히 현대의 남녀 간의 무료와 무관심과 권태와 고독을 잘 다룬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고독 3부작'(라벤투라, 밤, 일식)을 연상케 하나 이들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 
1970년대로 생각되는 어느 여름 작가인 롤랜드(브래드 핏)와 댄서 출신의 바네사(앤젤리나 졸리 핏)가 빨간 컨버터블 시트로앙을 타고 프랑스의 한 한적한 해변마을에 찾아와 호텔에 짐을 푼다. 그리고 즉시 바네사는 침대에 눕고 롤랜드는 바닷가에서 홀아비 미셸(닐스 알스트룹)이 경영하는 카페에 들러 대낮부터 술을 마신다. 롤랜드와 바네사는 영화 내내 밥은 거의 안 먹고 담배 태우고 술만 마시는데 그러고도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
롤랜드는 글이 안 써져 끽연에 음주를 계속하고 바네사는 역시 흡연과 음주를 하면서 베란다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침통한 표정을 짓는데 가끔 남편한테 한다는 소리가 설익은 철학용어다. 바네사의 모양이 좀비 같은데 그녀의 우울증 이유가 영화 끝에 가서 서두르듯이 얘기된다. 매우 미숙한 처리다. 
이런 두 사람의 소통 부재와 권태와 무료는 둘이 벽에 난 구멍을 통해 옆방에 든 젊은 신혼부부 레아(멜라니 로랑)와 프랑솨(멜빌 푸포)의 잦은 섹스를 훔쳐보면서 변태적인 위로를 받지만 이 같은 플롯은 바네사의 고뇌하는 심리와 아무 연관을 맺지 못한다.
졸리 핏이 큰 인공유방을 노출하면서 열심히 연기하나 그것은 마치 모델이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것 같아 가슴에서 스며나오는 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도대체 엄청나게 아픈 심적 질병을 앓는 여자가 왜 그렇게 시종일관 짙은 화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브래드 핏의 연기도 심심하다. 음악(게이브리엘 야렐)과 촬영은 좋다. R. 일부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33


마리오(가운데)와 광부들이 구출되기를 초조히 기다리고 있다.

지하에 매몰된 33명의 광부 구출기


2010년 칠레에서 일어난 33명의 지하에 매몰된 광부들의 극적 구출을 그린 영화인데 인물 묘사나 얘기가 지나치게 공식적이어서 큰 긴장감이나 흥분감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 극적인 드라마를 폭이 크고 넓게 묘사하는 대신 잔소리하는 식으로 진행하고 있는데다가 주요 인물들도 깊이 있게 다뤘다기보다는 피상적이요 간추리는 식으로 처리했다.
보고 즐길 만은 하지만 생존의지 하나로 2달여를 지하에서 견디다가 구출되는 광부들의 서스펜스와 스릴 그리고 박진감이 가득한 내용이 과감하지 못하고 무사안일하게 그려져 맥이 빠진다. 특히 워너 브라더스가 만든 이 영화는 세계시장에 판매하기 위해 칠레 사람들로 여러 명의 국제적 스타를 기용한데다가 대사도 영어여서 보고 듣기가 어색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보기 딱한 것은 프랑스 스타 쥘리엣 비노쉬를 거리에서 음식을 들고 다니면서 파는 가난한 칠레 여인으로 캐스팅한 것. 그리고 단역인 칠레 대통령도 미국 배우이고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남편인 제임스 브롤린까지 구출요원 캐미오로 썼다.        
영화는 지하 2,300피트에 갇힌 광부들을 구출하기 위해 지상에서 굴착전문가 안드레(게이브리엘 번)가 이끄는 구조팀의 활동과 함께 광부들의 가족들이 광산 인근에 임시 마을을 형성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얘기는 지하와 지상을 오락가락하면서 진행되는데 매몰된 광부들의 리더인 마리오(안토니오 반데라스)를 주인공으로 서술된다. 마리오는 탁월한 통솔력과 넓은 인간성으로 깡통식량을 고루 배분하고 절망에 처한 광부들 간의 분쟁과 폭력을 다스린다.    
광부 매몰사건 후 10여일쯤 지나 구조팀에 의해 광부들이 있는 곳까지 작은 구멍이 뚫어져 지상과 지하 간에 쪽지로 의사가 소통되고 우주식량이 전달되나 엄청나게 두껍고 큰 돌이 장애가 돼 구출작전이 지연된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뉴스팀이 이 곳에 와 구출뉴스를 시시각각 보도하면서 칠레의 사막에 있는 광산이 삽시간에 세계적인 뉴스의 초점이 된다. 이런 내용은 빌리 와일더가 감독하고 커크더글러스가 주연한 지하에 매몰된 사람을 구출하는 잘 만든 드라마 ‘에이스 인 더 호울’(Ace in the Hole 1951)을 연상케 한다. 
33명의 광부들 중 마리오를 제외한 5~6명의 인물들이 그나마 단편적으로 묘사되면서 마리오의 역을 보조하지만 장식과도 같은 것이어서 깊이나 폭은 모자란다. 여류 패트리시아 리겐 감독. PG-13. 전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모비-딕’




우리는 모두 자기 안의 악마와 싸워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 인생의 궁극적 목표가 자기 구제일진대 이 구제는 자신 속의 악마와의 싸움이 있고 나서야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포경선 피쿼드의 에이해브 선장과 백경 모비-딕과의 치열한 대결도 에이해브의 자기 구제를 위한 영혼의 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허만 멜빌이 쓴 미국의 성경이요 신화라고 불리는 ‘모비-딕’(Moby-Dick)의 영문판을 대학생 때 읽기 시작했다가 분량이 너무 방대하고 또 내용이 형이상학적이요 어려워 중도에 책을 접고 말았다. 며칠 전 필라델피아에서 ‘록키’의 부산물인 권투영화 ‘크리드’(Creed·26일 개봉)에 나오는 실베스터 스탤론을 인터뷰했는데 그도 ‘모비-딕’을 다 읽는데 장구한 시간이 걸렸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내가 아는 ‘모비-딕’의 얘기는 중학생 때 경남극장에서 본 ‘백경’(1956)을 통해서다. 존 휴스턴이 감독하고 그레고리 펙이 에이해브로 나온 이 영화는 연출과 연기 등이 다소 과장되긴 했으나 흥미진진한 모험영화다. 펙이 고래 뼈로 만든 다리를 짚고 다니면서 자기 다리를 물어 뜯어버린 모비-딕에게 복수하려고 광인이 되다시피 해 바다를 항해하는 모습이 극적이다. 그의 이런 모습은 후에 ‘조스’에서 식인상어 조스를 잡으려고 혈안이 된 퀸트(로버트 쇼)를 생각나게 한다.
‘모비-딕’은 또 인간의 집념이 불러오는 재앙에 대한 경고문이기도 하다. 에이해브는 자신의 집념을 풀기 위해선 신에게마저 대어드는데 문학 비평가들은 모비-딕을 신이요 자연이며 또 운명이라고도 해석한다.
에이해브의 이런 반-신적 행동과 언사는 지난 7일 본 LA 오페라가 공연한 ‘모비-딕’(사진)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독재자 에이해브는 자기가 종들처럼 부리는 선원들 앞에서 “그것이 날 모욕한다면 나는 태양이라도 때려 부수겠다”고 호언장담을 한다.
에이해브는 자기가 마치 신처럼 행세하는 선동가로 부질 없는 허영이나(젊은 선원 그린혼이 이렇게 노래한다) 다름없는 집념 때문에 결국 자신을 비롯한 선원들과 배에 죽음과 파괴를 불러 오는데 유일한 생존자는 순수와 순진을 상징하는 그린혼(소설에서는 이쉬매엘). ‘모비-딕’은 이처럼 다분히 신앙적 색채도 품고 있다.
신에게 거역하면서 백경과 싸우다 죽은 에이해브를 생각하면 신의 지시를 어긴 탓으로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가 회개하고 구출된 요나가 떠오르는 것도 그래서이다.
오페라 ‘데드 맨 워킹’을 작곡한 제이크 헤기가 작곡하고 진 쉬어가 대사를 쓴 2막짜리 오페라(공연시간 3시간) ‘모비-딕’은 현대음악치고는 멜로디가 상당히 다채롭다. 특히 바다의 정령들의 맑은 울음소리 같은 아름답고 서정적인 멜로디로 시작해 바다의 거센 물결과 선원들과 백경과의 사투를 연상시키는 격렬한 리듬으로 이어지는 서곡이 매우 인상적이다.
전체적으로 음악이 장엄하고 강렬하면서도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음들의 씨줄과 날줄들이 절묘하게 직조돼 지루한 줄 모르고 흥미 있게 관람했다. 제임스 콘론이 지휘하는 LA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훌륭한 연주를 들으면서 곡의 바그너풍을 느꼈다.
에이해브는 테너 제이 헌트 모리스가 불렀는데 고음일색이었다. 에이해브 역을 바리톤이 불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선적인 에이해브에 맞선 양심적인 1등 항해사 스타벅은 바리톤 모간 스미스, 포경선을 처음 탄 그린혼은 테너 조슈아 게레로 그리고 나머지 선원들인 남태평양 태생의 신령한 혼을 지닌 퀴킥은 베이스 바리톤 무사 엔쿤그와나, 에이해브의 시종 핍은 소프라노 재클린 애콜스(오페라에서 유일한 여자)가 각기 맡아 잘 노래했는데 특히 스미스의 노래가 듣기 좋았다.
2010년 4월 달라스 오페라가 초연한 ‘모비-딕’은 음악뿐 아니라 “백금을 바다로부터 거두리라”를 비롯해  대사도 매우 시적이고 심오하다. 이와 함께 뛰어난 것은 큰 돛대가 무대를 군림한 검소하면서도 튼튼한 세트와 밤하늘에 뜬 별들과 대양을 질주하는 피쿼드 그리고 거칠게 몸을 뒤트는 파도 등을 스크린에 투사한 영상처리. 입체감이 압도적이다. 모비-딕은 맨 끝에 거대한 눈이 노려보는 머리가 에이해브를  향해 달려들면서 그 위용을 나타낸다.
소설은 혼자 살아남은 이쉬매엘(그린혼)이 퀴켁이 생전에 자기에게 부탁해 만든 관을 타고 포류하면서 “나를 이쉬매엘이라고 부르세요”라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오페라는 이 말로 끝이 난다.          
한편 멜빌의 ‘모비-딕’의 모델이 된 실제사건을 나사니엘 필브릭이 소설로 쓴 ‘바다의 심장 속에서’(In the Heart of the Sea)를 원전으로 론 하워드가 감독하고 크리스 헴스워드가 주연한 동명영화가 오는 12월11일에 개봉된다. 이 소설의 제목은 오페라에서 노래로 불려진다. 오페라 ‘모비-딕’은 19일, 22일, 28일 3차례 공연이 남아 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