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11월 2일 월요일

번트(Burnt)


애담이 마치 예술품 창작하듯 요리를 하고 있다.

성질 고약한 셰프의 재기 몸부림


잘 나가던 자리에서 자기 잘못으로 바닥으로 떨어진 남자가 자기 구제와 함께 재기하려고 몸부림 치는 판에 박은 얘기로 별 필요도 없는 지절대는 말이 많고 공연히 시끄럽고 분주한 통속적인 영화다.  
수퍼 스타 브래들리 쿠퍼가 몰락한 셰프로 나와 과거를 속죄하고 다시 명품 요리를 만들려고 열불을 내는데 성질이 고약한데다가 이기적이고 욕설을 밥 먹듯이 내 뱉는 바람에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각본가와 감독의 의도가 브래들리를 그런 인간으로 만들어 놔야 그의 자기 구제와 재기가 더 극적이라는 것인 줄은 모르겠으나 보는 사람으로선 도무지 호감이 가질 않아 영화에 다가 가게 되질 않는다. 
볼만한 것은 식당의 요리사들이 음식을 만드는 장면. 마치 전쟁 하듯이 치열하고 또 때론 조각품을 만들 듯이 마음과 정성이 지극한데 긴장감 마저 감돈다. 
파리의 미셸린 스타 2개짜리 식당의 명 셰프이던 애담 존스(쿠퍼)는 약물과 술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진 뒤 속죄하는 식으로 뉴올리언스의 식당에서 일 하다가 재기를 위해 런던으로 간다. 여기서 그는 과거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토니(다니엘 브륄)가 경영하는 식당의 셰프로 취직한다. 애담이 수 셰프로 데려온 사람은 파리에서 있었을 때 라이벌이었던 미셸(오마르 시). 그런데 애담은 파리에서 미셸에게 못 할 짓을 했는데도 미셸은 애담을 쉽게 용서한다. 미셸이 그런데는 이유가 있다.
여기에 가담하는 다른 사람이 혼자 어란 딸을 키우는 독립심 강한 수 셰프 헬렌(시에나 밀러-그녀와 쿠퍼는 ‘아메리칸 스나이퍼’에서 공연했다). 애담과 헬렌이 사랑을 하게 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 헬렌이 어떻게 그렇게 성질이 더러운 애담을 사랑하게 되는지 불가사의다.
영화의 많은 부분이 애담이 독재자처럼 요리사들을 부리면서 음식을 만드는 장면에 할애 되는데 애담이라는 인간이 그야말로 호로 자식 같은 자여서 헬렌과 토니와도 충돌이 잦다. 아무리 요리를 잘 한다 하지만 이런 인간을 어떻게 좋아할 수가 있는지 일다가도 모를 일.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미셸린이 파견한 음식 판정가에게 제공할 음식을 애담과 그의 요리사들이 만드는 장면. 마치 전투에 나가기 전 작전지도를 보면서 작전을 짜듯이 긴장감 감돈다.
쿠퍼에게 이런 역은 식은 죽 먹기나 마친 가지. 연기 실팍하게 하는 것은 밀러다. 음식평론가로 나온 우마 서만과 애담의 전처로 나온 알리시아 비칸더는 완전히 소모품. 눈 요기 거리로 적당한 영화다. 존 웰스 감독. R. Weinstein. 일부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빨강머리 모린 오하라




새빨간 머리답게 성질도 불같았던 할리웃 황금기 스크린의 여왕으로 아일랜드 더블린 태생인  모린 오하라하면 대뜸 떠오르는 영화가 존 웨인과 공연한 ‘아일랜드의 연풍’(The Quiet Man 1952)이다.
원제와는 엉뚱하게 다른 한국어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영화는 미국에서 권투선수로 활약하던 웨인이 은퇴 후 아일랜드의 시골고향으로 돌아와 아름답고 불같은 성격을 지닌 오하라와 격정적인 로맨스를 엮는 흥미진진한 얘기다. 역시 아일랜드계인 존 포드가 감독해 오스카 감독상과 함께 눈이 따가울 정도로 알록달록한 총천연색 촬영도 오스카상을 받았다.  
난 꼬마 때 이 영화를 봤는데 특히 지금도 잊지 못할 장면은 캡을 쓰고 레인코트를 입은 웨인이 강풍에 빨강머리가 마당 빗질하듯 날리는 자기를 마다하는 오하라의 손을 잡아 끈 뒤 뜨거운 키스를 퍼붓는 모습이다(사진). 사랑이 무언지 채 모르던 꼬마의 가슴이 황홀감에 빠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오하라와 포드는 이 영화를 비롯해 오스카 작품상과 감독상을 탄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와 ‘리오 그랜드’ 및 ‘롱 그레이 라인’ 등 총 5편의 영화를 함께 만들었다. 오하라는 웨인과도 멋 있는 콤비를 이루면서 ‘아일랜드의 연풍’ 외에도 모두 웨스턴인 ‘리오 그랜드’와 ‘맥클린톡!’ 및 ‘빅 제이크‘ 등 모두 5편에서 공연했다.
웨인은 오하라를 “크고, 원기왕성하며 절대적으로 멋들어진-확실히 내 스타일의 여자”라고 찬탄했다. 오하라 역시 “나만이 존 웨인을 상대할 만큼 크고 강인한 주연여우였다”고 웨인의 말에 동의했다.
오하라가 지난 24일 아이다호주 보이지에서 95세로 별세했다. 그녀가 침상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날 때 가족들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인 ‘아일랜드의 연풍’의 음악을 틀었다고 한다.  
오하라는 아이리시 답게 성질이 불 같았을뿐 아니라 강하고 굳세며 담대했는데 빨강머리에 커다란 초록색 눈과 붉고 탐스런 입술 그리고 크림 빛 피부에 체격이 큰 화끈한 미녀여서 생전 ‘총천연색의 여왕’이라고 불렸다. 거구의 웨인과 과연 맞설만한 여자로 스크린을 압도했는데   꼬마 때 그녀의 영화를 많이 본 나로선 오하라가 화면에 나타나면 위협감마저 느꼈었다.
오하라의 영화 중 내 기억에 생생한 또 다른 영화가 중앙극장에서 본 절세미남 타이론 파워가 해적으로 나온  ‘흑조’다. 두 미남미녀가 사랑의 줄다리기를 하다가 뜨겁게 입술을 맞추는데 오스카 촬영상을 탄 총천연색 영화에 딱 맞는 불타는 키스였다. 오하라가 나온 또 다른 해양모험영화로 재미 있는 것이 더글러스 페어뱅스 주니어가 신배드로 나온 화려한 총천연색 ‘뱃사람 신배드’다.
오하라는 부당한 것에 굴복치 않는 여자로 1950년대 후반 할리웃의 가십전문지 ‘칸피덴셜’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 큰 화제가 됐었다. 오하라는 이 잡지가 자신이 외간 남자와 차이니즈극장에서 뜨거운 애무행위를 나눴다고 허위보도를 하자 소송을 제기해 승소, 결국 ‘칸피덴셜’은 문을 닫고 말았다.
어렸을 때부터 연극으로 연기실력을 쌓은 오하라는 18세 때인 1939년 런던에서 히치콕이 감독한 ‘자매이카 인’으로 스크린에 데뷔했는데 여기서 공연한 명우 찰스 로턴의 눈에 띄어  같은 해 할리웃에 진출했다. 오하라는 로턴이 콰지모도로 나온 ‘노트르담의 곱추’에서 집시 에스메랄다로 나왔는데 18세라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성숙한 모습이다. 그리고 3개월만 머물기로 했던 미국체류가 유럽에서 전쟁이 나면서 그녀의 할리웃생애가 시작됐다.
오하라의 영화 중 내가 재미 있게 본 또 다른 것이 브라이언 키스와 1인2역의 헤일리 밀스와 공연한 ‘페어런트 트랩’과 경남극장에서 본 헨리 폰다와 공연한 ‘스펜서의 산’이다. 극장에서 오하라를 못 본 젊은 세대들이라도  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TV를 통해 방영되는 ‘34가의 기적’을 통해 그녀를 만났을 것이다. 메이시백화점의 산타 클로스인 크리스 크링글이 산타를 믿지 않는 소녀(나탈리 우드)에게 자기가 진짜 산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법정에 까지 서는 얘기로 오하라는 우드의 어머니로 나온다.
생애 50여편의 영화에 나온 오하라는 미모 때문에 자신의 연기 실력을 충분히 발휘 못한 배우로 그녀의 많은 역이 주연남우의 장식품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오하라는 진지한 역을 얻기 위해 자신의 ‘예쁜 여자’라는 이미지와 끊임 없이 다퉈야 했다. 오하라는 “내가 유럽으로 돌아 갔다면 보다 많은 강한 성격 위주의 역을 맡았을 것이 분명하다”면서 “그러나 스튜디오는 결코 내 재능이 내 얼굴을 능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술회한바 있다. 그녀의 명복을 빈다. 한편 TCM은 11월 20일 오하라의 영화를 24시간 마라톤 방영한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5년 10월 27일 화요일

여성 참정권론자(Suffragette)


모드 와츠(가운데)가 동료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의회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투표권 쟁취”여성들, 테러리스트가 되다


1912년 참정권을 얻기 위한 영국여성들의 맹렬한 투쟁을 튼튼하게 그린 드라마로 우리가 몰랐던 그들의 분노와 좌절 그리고 테러와 자기 희생 등에 놀라게 된다. 
내용에 몰입하기 전까지 다소 시간이 걸리지만 연기와 촬영과 의상과 프로덕션 디자인 등이 다 좋은 긴박감 마저 감도는 작품인데 영화가 내용에 비해 열기가 부족하고 다소 창백한 것이 흠이다.
일종의 BBC-TV의 드라마를 연상케 하는데 이와 함께 샐리 필드가 무식한 공장노동자로 나와 노조운동을 펼치는 드라마 ‘노마 레이’도 생각나게 만든다. 영화는 사실과 허구를 혼성해 만들었는데 참정권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여성들에 고개가 숙여진다. 뜻 있고 또 숙연한 감동을 갖게 하는 볼만한 드라마다. 
24세난 모드 와츠(캐리 멀리간)는 남편(벤 위셔가 일차원적으로 묘사됐다)과 어린 아들을 둔 대형 세탁공장 노동자. 전연 정치와는 관계가 없던 와츠는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참정권 운동가인 바이얼렛(앤-마리 더프가 가슴 아픈 연기를 한다)으로 인해 서서히 여성운동가로 변신한다. 이와 함께 짐승 같은 공장장의 횡포와 멸시가 와츠의 변신에 결정적 계기가 된다.
와츠는 여성운동의 총지도자로 당국의 지명수배를 받고 있는 에멜린 팽크허스트(메릴 스트립이 잠깐 나온다)의 지시를 수행하는 행동가로 약제사인 이디스(헬레나 본햄 카터의 연기가 차분하다)와 바이얼렛 등과 함께 시위에 참가하면서 경찰에 체포돼 옥에 갇힌다. 이로 인해 남편과 갈등이 생기고 결국 와츠는 집에서 쫓겨난다. 
의회가 여성참정권 의제를 부결시키면서 와츠 등은 본격적인 테러에 나선다. 우체통을 폭파하고 수상의 빈 저택을 폭파하는 등 여성운동가들의 행동이 격화하면서 이들의 행동을 이해하고 동정하면서도 법을 집행해야 하는 경찰국장(브렌단 글리슨이 묵직한 연기를 한다)도 이들의 체포에 총력을 집중한다.
그리고 영화는 한 여성 운동가의 자기 희생으로 끝을 맺는다. 영화 마지막에 이 여자의 장례식을 찍은 기록필름이 나온다. 여성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한데 특히 다변한 표정으로 무식한 노동자에서 운동가로 변신하는 과정을 강렬하고 알차게 보여 주는 멀리간의 연기가 출중하다. 영국은 1918년에 가서야 일부 30세 이상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었고 그로부터 10년 후에 가서야 모든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었다. 새라 개브론 감독. 
PG-13. Focus. 아크라이트와 랜드마크.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5년 10월 26일 월요일

록 더 카스바(Rock the Kasbah)


미국인 록가수 매니저 리치는 아프간 소녀 살리마(왼쪽)를 TV쇼에 출연시킨다.

아프가니스탄 판 ‘아메리칸 아이돌’


주름살이 잔뜩 진 얼굴로 오만상을 찌푸려 가며 시치미 뚝 떼고 사람 웃기는 빌 머리의 영화는 웬만하면 다 괜찮은데 이 것은 엉망이다. 아프가니스탄 판 ‘아메리칸 아이돌’로 영화가 힘이 없고 늘쩍지근한데다가 마치 사막에서 길을 잃은 듯이 우왕좌왕하고 있다. 
얘기가 촛점을 잃고 그냥 되는대로 식인데 코미디로서 우습지도 않고 드라마로서도 극적 재미가 없다. 사실 내용의 중심인물이 아프가니스탄 최초로 과감하게 TV노래 경연대회에 나온 여자(실제 인물로 리마 사하르의 경험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인데도 영화는 할리웃 수퍼스타인 빌 머리에게 아첨 하듯이 그가 맡은 역인 한 물 간 록뮤지션 매니저 리치의 횡설수설과 갈팡질팡에 조명을 비추고 있다. 재주 있는 빌 머리와 함께 명장인 배리 레빈슨의 실패작이다.
밴나이스의 모텔에 매니저 사무실을 차려 놓고 가수 지망생들의 돈이나 사기쳐 먹고 사는 리치는 바에서 아프가니스탄의 미군위문공연 관계자의 주정을 듣고 가수 지망생인 여비서(조이 데샤넬)를 데리고 한탕 하려고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도착한다. 
여비서가 도착하자 마자 리치의 돈과 여권을 훔쳐 미국으로 돌아 가면서 리치는 낯 설고 물 선 이역만리 타국에서 외톨이가 된다.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은 인생이니 만큼 리치는 별로 흥분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리치는 전쟁판에서 돈을 벌려고 뛰어든 미국인들인 용병(브루스 윌리스)과 군수업자들(대니 맥브라이드와 스캇 칸) 그리고 황금의 마음을 지닌 창녀 머시(케이트 허드슨) 등을 알게 된다.
리치와 머시는 매우 가까운 사이로 발전 하는데 알다가도 모를 일은 어떻게 머시가 돈 도 떨어지고 나이도 먹은 인생 낙오자인 리치를 사랑하는가 하는 것. 사랑이 아무리 눈이 멀었다 해도 이 관계는 불가사의다.       
그런데 어쩌다 리치가 사막 한 가운데에 있는 마을 지도자의 딸 살리마(레엠 루바니)가 동굴에 숨어 혼자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그 재주에 경탄, 살리마를 카불의 노래자랑 TV쇼 ‘아프간 스타’에 출연시키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살리마는 리치의 힘으로 온갖 장애를 극복, 쇼에 나가 무슬림 미국가수인 캣 스티븐스의 노래를 영어(왜?)로 부른다. 그런데 실제로는 리마 사하르가 오디션에 나가 합격해 쇼에 나갔는데 할리웃 영화이니 만큼 미국인 리치가 아프가니스탄인 살리마의 구세주 노릇을 하고 있다. 
R. Open Road. 일부지역.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2015년 10월 20일 화요일

스파이들의 다리(Bridge of Spies)


도노반(탐 행스)이 글리닉케 다리에서 U-2의 조종사 파워즈를 기다리고 있다.

스필버그와 탐 행스 이번엔‘스파이물’


냉전시대인 1962년 독일에서 진행된 미 스파이기 U-2의 조종사와 소련 간첩의 교환을 다룬 스파이 드라마이자 스릴러로 우수한 기능공이 만든 것 같은 준수하고 재미있는 영화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탐 행스가 네 번째로 손잡고 만든 영화로 향수감이 짙은 멜로드라마다.
스필버그는 장인이니 만큼 무슨 영화를 만들어도 특별히 흠 잡을 데가 없는 것은 이 영화에도 적용되지만 영화가 너무 반듯하고 모가 난 점이 없어 큰 충격이 느껴지지 않는다. 같은 대상을 손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카메라로 찍은 사진으로 보는 기분이다. 
그러나 볼만한 영화로 긴장감도 꽤 있고 연기와 촬영과 세트와 디자인 등 모든 것이 좋다. 스필버그 영화의 음악은 지난 30년간 존 윌리엄스가 작곡했는데 이번에는 윌리엄스의 건강 문제로 토머스 뉴만이 지었다. 음악이 다소 내용을 압도하는 감이 있다.
영화는 1957년 뉴욕에서 소련 스파이 루돌프 아벨(마크 라일런스)이 FBI에 의해 체포되는 긴장감 있는 장면에서 시작해 1962년 동독과 서독을 잇는 글리닉케 다리에서의 아벨과 U-2 조종사 프랜시스 게리 파워즈(오스탄 스토웰)의 교환으로 끝난다.
이 교환을 성사시킨 사람이 뉴욕의 보험전문 변호사 제임스 B. 도노반(행스). 도노반은 먼저 자기 회사에 의해 아벨의 변호사로 선정돼 승산 없는 싸움인 변호에 나선다. 아벨의 재판은 형식적인 것으로 그는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 당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에이미 애담스)와 두 딸을 둔 가정적이요 원리원칙적인 도노반은 미국의 헌법정신을 준봉하는 사람. 그는 지혜와 설득력과 협상술을 동원해 아벨을 전기의자 형에서 구해낸다. 이로 인해 그는 시민들로부터 반역자 취급을 당한다.
한편 소련 상공을 정찰하던 U-2가 격추되면서 체포된 파워즈는 재판 끝에 실형이 선고된다. 이어 소련 측에서 간첩교환을 할 의향이 있다는 시사가 미 측에 전달되면서 도노반은 겨울에 동베를린으로 간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긴장감 감도는 간첩교환 협상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베를린 장벽이 막 세워질 때 동베를린에서 공부를 하던 미국 유학생 프레데릭 프라이어(윌 로저스)가 체포되면서 도노반은 프라이어까지 구출하기로 결심한다.
계획에 없던 2대1의 교환인데 문제는 파워즈는 소련이, 프라이어는 동독이 붙잡고 있다는 것. 감기에 걸려 계속해 콧물을 흘리는 도노반은 영특한 지혜와 기지 그리고 교활한 협상술을 발휘, 2대1일 교환을 성사시킨다. 마지막 다리 위에서의 새벽 간첩교환 장면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믿음직한 행스가 실팍하면서도 때론 코믹한 연기를 잘하는데 경탄스러운 것은 영국의 셰익스피어 배우 라일런스의 것. 거의 무표정한 얼굴로 시치미 뚝 떼는 유머와 함께 침착하고 아주 쉽게 연기하는데 오스카상감이다. PG-13. Disney. 전지역.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나라 없는 야수들(Beasts of No Nation)


코맨단트가 아구(왼쪽)에게 포로살해를 지시하고 있다.

아프리카 반군 소년병의 생존 이야기


내전이 끝날 새 없는 아프리카의 반군 소속 소년병에 관한 강렬하고 사실적인 영화로 채 틴에이저도 안 된 순진한 아이들이 악과 폭력의 제물이 돼 짐승으로 변화하면서 자행하는 잔인무도하고 끔찍한 살육에 몸서리가 처진다. 그들이 저지르는 폭력이 화면 밖으로 튀어나와 보는 사람의 영육을 유린하는 듯한 절실함을 느끼게 하는데 막상 가슴 아프고 무서운 것은 이런 폭력행위보다 어린 아이들이 무감각한 살육의 짐승들로 변하면서 잃어버리는 순수의 상실이다. 
가나에서 찍은 현장감 있는 촬영과 각본 그리고 강력한 추진력을 지닌 연출과 서술은 모두 재주 있는 캐리 조지 후쿠나가(신 논브레)의 것으로 특히 소년병 역의 연기 경험이 없는 에이브래햄 아타와 체격과 카리스마가 모두 압도적인 이드리스 알바의 연기가 뛰어나다. 
영화에서 무대인 나라의 이름은 안 밝히고 또 반군들의 종교나 사상과 이념도 모른다. 형과 함께 아버지가 선생인 학교에 다니고 교회에 나가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어린 아구(아타)의 삶은 마을로 몰려든 난민들을 쫓아온 반군들의 살육으로 하룻밤 사이 악몽으로 변한다. 
반군에게 아버지와 형이 살해된 뒤 도주한 아구는 곧 이들에게 붙잡혀 소년병이 된다. 반군의 대장은 안팎으로 거대한 카리스마를 지닌 복잡한 성격의 코맨단트(알바). 
아구는 코맨단트의 총아가 되면서 서서히 살육의 짐승으로 변화하는데 아구가 코맨단트의 명령에 따라 체포된 적을 정글용 칼로 살해하는 장면이 눈을 감게 한다. 아구의 첫 살인이다. 이런 혹독한 삶속에서 아구의 유일한 위로는 역시 소년병인 말 없는 스트리카와의 우정.
아이들과 젊은 부하들을 엄격하게 다루면서 밀어붙이는 코맨단트는 그야말로 악의 화신이나 한편으로는 아구에게 아버지와도 같은 역을 하는데 아구와 코맨단트의 관계가 드라마로서 영화의 중요한 플롯을 이룬다. 
반군은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잇달아 승리하면서 마을들을 차례로 점령하고 이어 반군의 통치자가 있는 도시에 도착한다. 그러나 여기서 통치자가 코맨단트의 공을 무시하고 그에게 응분의 보상행위를 거부하면서 코맨단트는 통치자에게 거역하는 게릴라가 된다. 
아타의 깊이와 너비를 감지하기 힘든 감정과 반응의 표정연기와 알바의 겹겹이 벗겨지는 내면연기는 찬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이들의 연기가 아니면 이 영화의 겁나도록 절실한 현실성이 이렇게 강하지는 못할 것이다. R. Bleecker Street. 일부지역.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



‘트리거 모티스’




창백한 올리브 빛 피부에 짧게 깍은 머리 그리고 돗수 높은 쇠테 안경을 쓴 신재성은 30세 정도였으나 나이보다 젊어 보였다. 큰 키에 날씬하고 손가락은 길고 섬세했는데 말끔하게 차려 입은 모습이 사람을 잡아 끄는 마력이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도도해 보였다.
신재성은 영국작가 앤소니 호로위츠가 본드소설의 원작자인 이안 플레밍의 TV쇼용 유고를 바탕으로 쓴 최신 제임스 본드 소설 ‘트리거 모티스’(Trigger Mortis^사진)에 나오는 본드 악한이다. 007시리즈 최초의 본격적인 한국인 본드 악한으로 영어 이름이 제이슨 신(Sin)이어서 본드로부터 ‘타고난 죄인’이라고 조롱을 받는데 본드와는 정반대로 여자에 전연 관심이 없다.
신재성은 살아 있지만 죽은 사람이다. 그는 자기가 붙잡아 놓은 본드에게 “난 그 때 영혼과 인간성을 다 빼앗겼어. 그리고 나는 모든 느낌을 상실했지. 내 자신이 죽음이야”라고 자기 소개를 한다.
소설은 ‘골드핑거’가 끝난지 2주 후에 시작한다. ‘골드핑거’의 푸시 갤로어가 본드걸이 됐지만 본드는 한 여자와 오래 못 있는데다가 갤로어는 레즈비언이어서 둘은 얼마 못 가 헤어진다.
1957년 미국과 소련간에 냉전기운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두 나라가 막 우주경쟁에 들어 섰던 때. 본격적인 플롯인 소련의 미국 로켓발사 사보타지가 있기 전 서막식으로 본드는 독일의 뉘르부르크링에서 열리는 그랑프리에 마제라티를 타고 참가, 소련의 영국인 선수 살해 음모를 저지한다.
본드는 여기서 처음 신재성을 목격하고 소설의 본격적인 본드걸로 미 정보기관 요원인 제파디 레인을 만나는 것도 경주트랙에서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신재성의 대저택 슐로스(성이라는 뜻) 브론자트에서다.
소련첩보기관인 악명 높은 ‘스메르쉬’(SMERSH)의 미국의 인공위성을 적재한 뱅가드로켓 발사 사보타지에는 나치가 만든 위폐제조기로 찍은 달러가 사용되는데 여기에 신재성이 동참하면서 마지막에 그와 본드간에 사투가 벌어진다.
신재성은 왜 복수심에 불타는 산송장 같은 인간이 되었을까. 6.25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때문이다. 1927년생인 신재성은 친 할머니가 민비를 모신 서울 양반집 태생으로 서울대를 나왔다. 그런데 6.25가 나면서 가족이 피난을 가던 중 충북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300여명의 양민이 학살 당했을 때 신재성은 자기 부모와 두 여동생을 모두 잃고 혼자 살아 남는다.
그 후 부산으로 내려간 신재성은 피난 가기를 거절한 할머니가 준 여러 알의 푸른 다이아먼드 중 하나를 광복동 보석상에 팔아 받은 돈으로 하와이로 밀항한다. 이어 그는 뉴욕으로 옮긴 뒤 ‘블루 다이아먼드’라는 건설 및 청소회사를 차려 크게 성공, 미국내 최고의 한국인 부자가 된다.
이런 과거를 지닌채 오직 파괴만을 위해 존재하는 신재성이 소련측과 손 잡고 미 로켓발사 사보타지에 나선 것은 당연지사라고 보겠다. 그런데 사실 이 사보타지는 신재성이 계획한 뉴욕 맨해탄에 대한 본격적인 테러를 위한 양동작전인 셈이다.
본드의 악인들이 다 그렇듯이 신재성도 매우 잔인하고 사악하며 사무적이요 냉소적이다. 그런데 기차게 흥미 있는 것은 신재성이 자기 적을 죽일 때는 죽을 자로 하여금 죽는 수단을 선택하게 한다는 점이다.
이 때 쓰여지는 것이 화투장이다. 신재성은 자신의 희생물이 될 사람 앞에 화투장의 뒷면이 보이도록 깔아놓은 뒤 그로 하여금 한 장을 고르라고 지시한다. 뒤집은 화투장에는 ‘교수’와 ‘생매장’과 ‘독약’ 등 여러 가지 죽음의 수단들이 적혀 있는데 신재성에게 붙잡힌 본드는 ‘생매장’ 화투장을 골랐다가 생매장 당해 죽을 고생을 한다.
신재성의 최종 공격 목표는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 이 빌딩을 파괴할 폭탄을 싣고 맨해탄 지하를 질주하는 지하철에서 본드와 신재성이 처절한 격투를 벌이면서 책은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모든 것이 끝나고 본드와 제파디는 플라자호텔에서 뜨거운 정사를 나눈 뒤 헤어진다.
310쪽의 강건체 스타일로 군더더기 없이 쓴 책이 진행이 빠르고 스릴과 재미가 있어 순식간에 읽어 내려 갔다. 본드소설 답게 마제라티와 애스턴 마틴 등 차와 섹시한 여자들과 본드 악한 그리고 와인과 마티니 및 오메가시계가 나오는데 다소 과거 본드영화들인 ‘닥터 노’와 ‘선더볼’ 등의 일부를 빌려다 쓴 듯한 느낌이 있다.
때로 터무니 없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더러 있지만 원래 본드얘기는 꽤 터무니없는 것이 사실. ‘파트 투’부터 본격적으로 흥분감을 북돋우는 소설에는 본드의 오랜 주변인물들인 M과 Q와 모니페니 등이 재등장하고 본드의 권총인 월터PPK도 다시 사용된다. 그런데 왜 호로위츠는 한국인을 본드 악한으로 골랐을까.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과연 어느 한국배우가 신재성 역을 맡을지  궁금하다.
‘트리거 모티스’와 때를 맞춰 본드시리즈의 음악과 노래들에 관한 ‘제임스 본드 노래들’(The James Bond Songs)이 출간됐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