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5년 1월 20일 화요일

패딩턴 (Paddington)

패딩턴이 양손에 치솔을 들고 용도를 생각하고 있다.

“난 말하는 곰… 귀여운 사고뭉치죠”


진짜로 재미있고 훈훈한 정이 넘쳐흐르는 온 가족용 영국 영화다. 장난이 심한 사고뭉치의 말하는 곰과 이 곰을 집안에 수용한 런던의 한 가족 간의 관계를 그린 영화로 속도 빠르고 우습고 유연하며 또 재치 넘치고 다정다감하다.
가족의 사랑을 강조한 물 떠난 물고기의 얘기인데 액션과 스턴트가 콩 튀듯 하고 냉소적인 유머와 위트가 촘촘히 담겨 있는가 하면 곰의 표정과 동작을 아주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기술 그리고 곰의 음성 연기와 인간 배우들의 연기가 만점이다. 
탐정영화 티를 내면서 액션과 스릴을 마음껏 활용했는데 의상과 프로덕션 디자인 및 밝고 알록달록한 색깔과 시각효과 등 나무랄 데 없이 잘 만든 매력적인 작품이다.
영화는 처음에 주인공인 말하는 곰 패딩턴(벤 위셔의 음성)의 페루 정글에서의 삶에 대해 얘기한다. 1930년대 이곳으로 온 친절한 탐험가 부부가 찍은 필름에 의해 설명되는데 이들 부부 때문에 패딩턴과 그를 키우는 삼촌 곰 파스투조(마이클 갬본 음성)와 아줌마 곰 루시(이멜다 스턴튼 음성)는 완전히 영국통이 된다.
그런데 정글에 지진이 나면서 삼촌은 죽고 아줌마는 양로원에 들어가게 되자 패딩턴은 모자를 쓰고 코트를 입고 보다 나은 삶을 찾아 런던으로 밀항한다. 도착한 곳이 런던의 패딩턴 기차역. 여기서 패딩턴은 보험회사 중역인 엄격한 헨리 브라운(휴 본느빌)과 그의 생기발랄한 아내 메리(샐리 호킨스) 그리고 이들의 두 남매 주디(마들렌 해리스)와 조나산(새뮤얼 조슬린)에 의해 발견된다.
헨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메리가 우겨서 패딩턴을 곱게 단장한 정리정돈이 잘된 집에 데려와 묵게 한다. 정글에 살던 곰이 도시 인간의 집에 살면서 자행하는 온갖 시행착오로 인해 헨리의 인형 집과도 같은 집은 난장판이 된다. 
그러나 패딩턴이 원래 귀엽고 또 속은 착한 곰이어서 곧 이어 브라운네 온 가족과 끈끈한 정으로 연결되면서 한 가족처럼 산다. 
이렇게 곰과 인간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희귀종인 패딩턴을 잡아 박제를 해서 자기 수집품으로 만들려는 예쁘게 생긴 독한 여자 박제사 밀리센트(니콜 키드만)가 등장하면서 패딩턴과 브라운네는 뜻하지 않은 액션과 음모와 모험에 휘말려든다.
브라운네 가정부 역의 줄리 월터스를 포함해 모든 배우들의 연기가 다 훌륭한데 그 중에서도 빼어난 것은 호킨스다. 철저히 꾸밈이 없는 아름답고 편한 연기다. 이와 함께 사파리 복장을 한 키드만의 요부 닮은 차가운 모습과 연기도 일품인데 키드만은 디즈니의 만화영화 ‘101마리의 달마시안’의 나쁜 여자 크루엘라 드 빌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들 인간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것은 패딩턴이다. 패딩턴 곰 인형께나 팔려나가게 생겼다. 100% 귀엽고 즐겁고 신나며 가슴을 따스하게 만들어주는 영화다. 폴 킹 감독. PG. TWC. 전지역. ★★★★½(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휴먼 캐피털(Human Capital)

투자전문가 지오반니(오른쪽)와 그의 아내 칼라가 집에서 연 파티에서 축배를 들고 있다.

한밤 빗속 교통사고, 그리고 두 가족 운명은


심야 우중에 일어난 교통사고로 운명이 연결되는 이탈리아 북부 도시 브리안자에 사는 두 가족에 관한 가족 드라마이자 성격탐구 영화이며 스릴러로 블랙 코미디의 기운도 갖춘 이탈리아영화. 화려함 속에 초조와 불안을 감춘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이탈리아의 경기침체와 함께 계급과 신분의 차이를 파헤친 사회 드라마이기도 한데 인간의 가치를 유로로 재려는 황금만능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제목은 법률용어로 사고의 희생자에게 보상금을 지불할 때 계산하는 희생자의 순 가치를 말한다.
영화는 매 에피소드마다 다른 인물을 중심으로 얘기되는 4막극 형식으로 에피소드가 바뀔 때마다 심야의 비극적 교통사고가 재연되면서 조금씩 조금씩 이 사고에 관한 정보가 확대 제공된다.   
투자전문가인 지오반니(화브리지오 지후네)와 그의 배우 지망생이었던 ‘트로피 부인’ 칼라(발레리아 브루니 타데스키)는 백만장자로 둘 사이에는 고교생 아들 마시밀리아노(구그리엘모 피넬리)가 있다.
지오반니네의 부와 신분을 동경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상류층에 이르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려는 중류층 부동산 업자 디노(회브리지오 벤티볼리오)는 쌍둥이를 임신한 착한 아내 로베르타(발레리아 골리노)와 전처 사이에서 본 여고생 세레나(마틸데 베르나스키)가 있는데 둘 다 고급 사립학교에 다니는 마시밀리아노와 세레나는 애인사이다.
그런데 디노가 자기 집을 저당으로 융자를 해 지오반니에게 투자를 부탁한다. 그러나 경기침체로 디노의 돈이 몽땅 날아가면서 디노는 지오반니에게 본전이라도 달라고 부탁하나 거절당한다. 
이와 함께 두 가족의 아이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학생 표창식이 열리고 있는 밤에 치명적인 교통사고가 나면서 이 사고를 둘러싸고 두 집이 운명적으로 연결된다. 
과연 누가 사고차를 운전했는가. 챕터가 바뀔 때마다 이 의문에 대한 답을 향해 이야기가 조금씩 조금씩 진전한다. 
이탈리아의 초호화 캐스트의 연기가 볼만한데 특히 자신의 꿈을 접고 상류층 부인 행세하느라고 속이 다 썩어 문드러져 가는 칼라 역의 브루니 타데스키의 연기가 조용하니 압도적이다. 프로덕션 디자인과 현지에서 찍은 촬영 그리고 서스펜스 기운이 있는 음악도 좋다. 영화는 미국 작가 스티븐 아미돈의 소설이 원작으로 미 코네티컷주가 무대인 것을 이탈리아의 브리안자로 옮겼다. 파올로 비르지 감독. 성인용. 일부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제72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결산

작품상부터 연기상까지‘독립영화들 잔치’


텍사스에 사는 한 소년의 삶과 그의 부모와의 관계를 12년 간에 걸쳐 만든 ‘보이후드’는 리처드 링크레이터가 감독상을 그리고 소년의 어머니로 나온 패트리샤 아켓이 여우조연상을 타 3관왕이 됐다. 이로써 LA와 뉴욕 영화비평가협회에 의해서도 2014년도 최우수 영화로 뽑힌 이 영화는 2월에 있을 오스카 시상식에서도 작품상을 탈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드라마 부문 작품상‘보이후드’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 에디 레드메인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둘러싼 과격하고 파격적으로 상상력이 무성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작품상 수상은 깜짝 놀랄 일이었다. 코미디/뮤지컬 부문 작품상은 멕시코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나리투가 연출한 ‘버드맨'(Birdman)이 탈 것으로 예상됐었기 때문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감독한 웨스 앤더슨은 수상소
코미디/뮤지컬 부문 작품상‘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감에서 골든 글로브를 주는 할리웃 외신기자협회의 일부 회원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3년 연속 두 여류 코미디언 티나 페이와 에이미 폴러(이번으로 마지막 사회)의 재치 있는 사회로 진행된 시상식에서는 사회자를 비롯해 수상자들이 언론의 자유에 대해 강한 지지발언들을 했는데 이는 지난해에 발생한 소니사에 대한 북한 측(미 정부의 주장)의 해킹과 얼마 전 파리에서 발생한 풍자잡지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무슬림 테러 때문이다. 
이날 뜻밖의 손님은 북한군 복장을 한 한국계 여류 코미디언 마가렛 조. 마가렛은 시종 엄격한 표정을 지으면서 김정은의 표지사진이 있는 북한 영화잡지 ‘무비즈 워우’의 기자로 나와 잡지를 들고 무대 아래로 내려가 메릴 스트립과 셀피를 찍겠다고 요구했다. 이어 마가렛은 무대로 올라가 나치군인처럼 거위걸음으로 퇴장해 만장의 폭소와 함께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전에 두 사회자는 인사말에서 “오늘 우리는 북한이 O.K.하는 모든 영화들에 시상할 것을 기대한다”고 이죽거렸다.           
드라마 부문 남자주연상은 ‘모든 것의 이론’(The Theory of Everything)에서 근육위축증을 앓는 이론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으로 나온 에디 레드메인이 그리고 코미디/뮤지컬 부문에서는 ‘버드맨’에서 브로드웨이에서 재기를 노리는 한물 간 영화배우로 나온 마이클 키튼이 각기 받았다. 그리고 ‘모든 것의 이론’은 음악상을 ‘버드맨’은 각본상을 추가로 받았다. 
코미디/뮤지컬 부문 여우주연상 에이미 애담스.
드라마 부문 여자주연상은 ‘스틸 앨리스'(Still Alice)에서 알츠하이머를 앓는 대학 교수로 나온 줄리앤 모어가 코미디/뮤지컬 부문에서는 ‘빅 아이즈'(Big Eyes)에서 날사기꾼 남편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기가 그린 그림들을 남편이 그린 것처럼 묵인한 실존하는 여류화가 마가렛 킨 역을 맡은 에이미 애담스가 각기 받았다.
드라마 부문 남녀주연상에서 볼 수 있듯이 ‘상은 주인공이 아프거나 죽어야 탄다’는 말이 또 한 번 여실히 증명됐는데 레드메인과 모어는 이로써 오스카상도 탈 확률이 높아졌다. 그러나 모어는 떼 놓은 당상이나 레드메인은 키튼과 치열한 접전을 벌일 것이다.   
남자조연상은 재즈드라마 ‘윕래시'(Whiplash)에서 제자를 독재자처럼 다루는 선생으로 나온 베테런 J.K. 시몬스가 탔다.
주제가상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지지자들과 함께 흑인 투표권 확보를 위해 앨라배마주의 셀마에서부터 몬고메리까지 행진한 역사를 다룬 ‘셀마'(Selma)의 ‘영광'(Glory)이, 만화영화상은 속편 ‘용 훈련법 2'(How to Train Your Dragon 2)가 받았다. 만화영화상은 ‘레고영화’(The Lego Movie)가 그동안 죽 상승세를 타왔으나 이번에 밀려나면서 오스카상 수상에도 다소 먹구름이 드리우게 됐다. 
외국어 영화상은 러시아의 한 작은 마을을 무대로 부패관리에 저항하는 소시민의 얘기를 그린 ‘리바이아탄'(Leviathan)이 받았다. ‘리바이아탄’은 성경의 욥기를 현대화한 것이다. ‘리바이아탄’의 수상도 다소 이변으로 이 부문 수상작으로 가장 유력시됐던 것은 예비수녀의 얘기를 그린 폴랜드영화 ‘이다'(Ida)였다.
생애업적상인 세실 B. 드밀상을 탄 사람은 국제 인권변호사인 레바논 태생의 아말 알라무딘과 갓 결혼한 조지 클루니. 옷에 프랑스어로 쓴 찰리 에브도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나는 샤를리’라는 배지를 단 클루니는 자리에 앉은 아내를 내려다보면서 “53세에 당신을 만나게 된 것이 어떤 연금술의 작용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당신의 남편이 된 것이 자랑스럽다”고 아내에 대한 사랑을 표시했다. 
그는 이어 샤를리 에브도 사건에 대해서 언급, 시상식 날 파리에서 열린 세계 정치 지도자들과 시민들의 행진을 상기시면서 “그들은 항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는 공포 속에서 걷지 않을 것이라는 이념을 지지하기 위해 걸었다. 우리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샤를리다”고 말해 기립박수를 받았다. 
골든 글로브는 TV 부문에 대해서도 시상한다. 이날 이 부문 수상작을 보면 여러 작품이 신작들로 TV가 아닌 아마존이나 넷플릭스 같은 인터넷을 통해 관람이 가능한 것들이 포함돼 있다. 그런데 HFPA는 통상 사기진작을 위해 좋은 신작에 대해 시상하는 경향이 있다.
다음은 각부문 수상작들이다.
*시리즈(드라마)-‘정사'(The Affair 신작) *드라마(코미디)-‘트랜스페어런트'(Transparent 신작) *영화/미니 시리즈-‘파고'(Fargo) *여자주연(드라마 시리즈)-루스 윌슨(정사) *남자주연(드라마 시리즈)-케빈 스페이시(‘하우스 오브 카즈’ House of Cards) *여자주연(코미디 시리즈)-지나 로드리게스(처녀 제인 Jane the Virgin-신작) *남자주연(코미디 시리즈)-제프리 탬보(트랜스페어런트) *여자주연(미니시리즈/영화)-매기 질렌할(‘명예로운 여인’ The Honorable Woman) *남자주연(미니시리즈/영화)-빌리 밥 손턴(파고) *여자조연(미니시리즈/영화)-조앤 프로갯(‘다운턴 애비’ Downton Abbey) *남자조연(미니시리즈/영화)-맷 보머(‘노말 하트’ The Normal Heart)     

11일 베벌리힐스의 베벌리 힐튼호텔에서 열린 제72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은 독립영화들의 잔치였다. 이날 드라마 부문과 코미디/뮤지컬 부문(골든 글로브는 작품과 남녀 주연상 부문에 한해 드라마와 코미디/뮤지컬 부문으로 나눠 시상한다)에서 각기 작품상을 받은‘보이후드’(Boyhood)와‘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The Grand Budapest Hotel)은 모두 독립영화사나 메이저에 속한 독립영화 전문 배급사들의 작품이다. 이 밖에도 각본과 여우주연과 남우주연 및 조연상 등을 받은 작품도 모두 메이저의 영화들이 아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

북한 HFPA 기자



나는 내가 속한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에 북한 여기자 조영자가 새 회원이 된 것을 11일에 열린 제72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때야 비로소 알았다. 조영자가 HFPA의 회원이 되려면 먼저 회원이 된 같은 한국 사람인 내게 그가 예의상 절차상으로 먼저 회원가입 의사를 밝히는 것이 우리 협회의 관례인데 내가 조영자의 가입을 몰랐으니 이야말로 경악할 지경으로 파격적인 이변이다.
HFPA의 회원이 되려면 2명의 기존 회원의 추천이 있어야 되는데 난 누가 조영자를 추천했는지 알바도 없지만 내가 그를 추천한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시상식의 두 사회자인 티나 페이와 에이미 폴러가 서 있는 무대에 북한 장군 군복 차림의 조영자가 등단(사진)한 뒤 두 사회자가 그를 HFPA의 새 회원이라고 소개했을 때 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야 이거 강력한 새 경쟁자가 생겼구나’하는 경계심과 함께 ‘아니 이럴 수가’하고 당황했는데 마치 6.25 때처럼 북한의 기습공격을 받은 느낌이었다. 식이 끝난 후 만난 HFPA의 이탈리아 동료회원 루카가 나보고 “너 북한 기자 들어와도 상관없니”라며 약을 올렸다. 
기자란 유독 경쟁심이 심한 직업이어서 나는 조영자가 시종일관 방귀 참는 얼굴을 해가지고 무대에서 익살을 떨어대며 만장의 폭소를 받는 것이 부럽고 속상했다.
HFPA 회원 된지 8년 만에 이제야 비로소 할리웃 스타들과 얼굴을 익혀 서로 “하이”하는 사이인 나와 달리 풋내기인 조영자는 시상식 무대에까지 서고 또 순식간에 자기 이름이 할리웃에 파다하게 알려졌으니 내 속이 상할 것은 당연지사다.
조영자의 매체는 잡지 ‘무비즈 워우!’(Movies Wow!)로 그는 이날 이 잡지를 들고 나와 김정은의 사진이 박힌 표지를 시상식 중계 TV 카메라 앞에다 대고 내휘둘렀으니 앞으로 이 잡지가 불티나게 팔릴 것이라는 생각에 라이벌 의식이 속에서 강하게 요동을 쳤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이 잡지의 부장인 조영자는 인민군 장군으로 밝혀졌는데 그렇다면 북한에서는 장군이 연예지 기자 노릇도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조영자에 대한 이런 착잡한 감정과 함께 ‘야 이젠 우리 한국에서 남북한 기자가 함께 HFPA 회원이 됐구나’하는 뿌듯한 자긍심 또한 느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결국 우리나라가 통일도 되겠구나 하는 가는 희망마저 가져봤다.
그러나 알고 보니 꿈에서 깨어난 듯이 조영자는 북한 기자가 아니라 유명한 한국계 코미디언 마가렛 조였다. 나는 1994년 TV 시리즈 ‘올-아메리칸 걸’에서 주인공으로 나온 마가렛을 단독 인터뷰해 그와는 구면이다. 
마가렛은 이날 시상식의 큰 흐름인 표현의 자유를 위트와 농담으로 강조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시상식에서는 소니의 해킹과 파리의 풍자잡지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를 규탄하고 아울러 어떤 위협과 압력에도 불구하고 표현의 자유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강력히 표현됐다.
미 정부가 소니 해킹의 주범으로 밝힌 북한은 이날 여러 차례 야유와 농담의 대상이 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먼저 페이와 폴로가 서두에서 “오늘 우리는 북한이 O.K.하는 영화들을 축하하게 될 것”이라고 북한의 소니사 영화 ‘인터뷰’에 대한 강력한 불만의 표현을 비웃었다. 
이어 등단한 조영자는 “너희들 쇼에는 1,000명의 아이들이 동시에 기타도 치지 않고 큰 그림을 만들기 위해 많은 카드를 든 사람들도 없으며 데니스 로드맨도 없다”면서 서툰 영어로 북한과 김정은을 조롱했다.
조영자는 무대 아래로 내려가서는 메릴 스트립을 향해 삿대질을 해가면서 함께 셀피를 찍겠다고 강력히 요구, 자리에 앉았던 마이클 키튼(그는 이날 ‘버드맨’으로 코미디/뮤지컬 부문 남우주연상을 탔다)이 조영자의 셀폰으로 둘을 함께 찍어줬다.
이어 단상에 오른 조영자는 나치 병정식의 거위걸음으로 퇴장했는데 이날 일부에서는 마가렛의 북한 조롱에 대해 ‘인종차별적’이라고 비판하는 트위터가 날아들었다. 이에 대해 마가렛은 “나는 북한과 남한의 부모를 가진 후손이다. 너희들이 나의 사람들을 투옥하고 굶기고 세뇌하니 나에 의해 조롱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고 대응했다. 나도 동감이다.
이어 마가렛은 “내 농담보다는 이날 시상식에 무대에 선 아시아계 연예인은 오직 나 하나뿐이라는 사실에 대해 언급해야 할 것”이라고 할리웃의 소수민족에 대한 푸대접을 비판했다.
이 날 표현의 자유에 대해 언급한 여러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반응을 받은 사람은 HFPA 회장 테오 킹마(네덜란드 사진기자). 그는 인사말에서 “우리는 북한으로부터 파리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곳에서나 자유로운 표현을 억압하는 그 누구에 대해서도 단결해 맞설 것”이라고 말해 참석자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참석자들이 먹고 마시면서 진행되는 골든 글로브 시상식은 식후 각 영화사들이 마련하는 파티와 함께 통상 샴페인이 넘쳐흐르는 주신 바커스의 야단스런 잔치로 알려졌다. 이날도 샴페인과 캐비아가 모자란 것은 아니었지만 예년의 쇼와는 달리 재미와 엄숙함이 겸비된 매우 성숙한 시상식이었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2015년 1월 11일 일요일

빅 아이즈 (Big Eyes)


월터(크리스토프 월츠)가 마가렛(에이미 애담스)에게 수작을 걸고 있다.


얼굴 전체에 균형이 맞지 않는 크고 텅 빈 검은 눈을 한 아이들의 초상화로 유명한 샌프란시스코의 여류 화가 마가렛 킨(87)과 그의 날사기꾼 남편 월터와의 파란만장한 관계를 그린 얄궂고 재치 있는 코미디 드라마인데 화폭 위의 물감처럼 알록달록하게 재미있다.
1960년대 초의 얘기로 당시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그들에게 복종하며 살아야 했던 여자들에 대한 불평등과 함께 예술작품의 저작권과 소유권에 대한 사뿐한 탐사로 영리하고 귀엽고 날렵한 작품이다. 괴짜라고 불러도 좋을 팀 버튼이 감독했는데 그의 다소 과격하고 이색적인 터치가 가득하다.
교외에서 살던 남편과 헤어진 마가렛(에이미 애담스)은 어린 딸 제인을 데리고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한다. 마가렛은 공원에서 1달러를 받고 아이들의 얼굴을 그려 주는데 한결같이 허공을 응시하는 텅 빈 검은 눈을 가진 아이들로 그린다. 마가렛 옆에서 파리에서 그림을 공부했다는 월터(크리스토프 월츠)가 그림 장사를 하는데 이 자가 마가렛에게 다가와 온갖 감언이설로 마가렛을 꼬드긴다.
마가렛은 천하의 날사기꾼이면서 말 잘하고 사람의 감정을 조작하는데 능수능란한 매력적인 월터의 유혹에 넘어가 그와 결혼한다. 월터는 마가렛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독려, 아내의 그림을 팔러 다니다가 후에 유명한 예술촌이 된 노스비치에 있는 엔리코 반두치(존 폴리토)가 경영하는 클럽 화장실 입구에 그림을 걸어놓는다.
그림이 손님들의 인기를 얻자 월터는 자기가 그린 것이라고 선전을 한다. 이에 마가렛이 항의를 하자 월터는 또 감언이설로 이 항의를 묵살시킨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여자가 그린 그림은 갤러리에서도 전시하기를 마다해 마가렛은 이래저래 월터의 말대로 집에서 ‘빅 아이즈’ 그림을 마치 국화빵 찍어내듯이 그려 내놓는다.
그런데 이 그림의 인기가 하늘 높이 치솟으면서 월터는 벼락 유명 화가가 되는데 마가렛이 다시 불평을 하자 월터는 “이제 화가의 진짜 신원을 밝히면 그동안 쌓은 공든 탑이 무너진다”면서 “주머니 돈이 쌈지돈이 아니냐”고 달랜다. 그리고 킨갤러리를 개장하면서는 완전히 월터가 진짜 화가가 되고 마가렛은 뒷전으로 물러나 그림 생산하는 종이 되다시피 한다.  
견디다 못한 마가렛이 딸과 함께 하와이로 이주, 월터에게 이혼해 줄 것을 요구하나 월터는 그림을 100개 이상 그려줘야 이혼해 주겠다고 대꾸한다. 그림을 계속해 그려 남편에게 보내던 마가렛은 마침내 자신을 제대로 추슬러 지역 방송에 나가 ‘빅 아이즈’의 화가가 자신이라고 밝힌다. 이에 월터가 마가렛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법정공방이 벌어지는데 현명한 판사(제임스 사이토)에 의해 당연하게 종결된다. 이 재판과정이 아주 재미있고 우습다.
기차게 잘하는 것은 애담스와 월츠의 연기다. 애담스는 남편한테 눌려 살다가 독립하면서 개화하는 여자의 모습을 아주 자연스럽게 한다. 그러나 영화를 말아먹다시피 하는 것은 월츠다. 여우처럼 교활하고 사악한데도 미워하기가 힘든데 카멜레온의 변신과도 같은 연기다. 이밖에도 월터와 가까운 사이가 된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의 칼럼니스트 딕 놀란 역의 대니 휴스턴과 ‘빅 아이즈’를 싸구려 장난 같은 그림이라고 혹평한 뉴욕타임스의 미술비평가 존 카나데이 역의 테렌스 스탬프 및 화랑 주인 역의 제이슨 슈와츠맨 그리고 제임스 사이토 등의 연기도 일품이다.
이와 함께 시대를 잘 표현한 프로덕션 디자인과 의상과 촬영도 좋고 라나 델 레이가 부르는 주제가 ‘빅 아이즈’가 거의 귀기서린 것처럼 으스스하게 아름답다. PG-13. TWC. 전지역.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이틀 낮과 하루 밤 (Two Days, One Night)


상드라(마리옹 코티야르)가 공장 동료들의 앞을 지나가고 있다.

근로자 서민들의 나날의 투쟁과 애환을 주로 다루는 벨기에의 형제감독 뤽과 장-피에르 다르덴의 또 하나의 소시민의 생존투쟁에 관한 드라마로 ‘장밋빛 인생’에서 프랑스 샹송가수 에디트 피아프로 나와 오스카 주연상을 탄 마리옹 코티야르가 주연한다.
두 감독 특유의 군더더기 없는 경제적 연출이 돋보이는 훌륭한 사회문제 드라마이자 시간에 쫓기는 긴장감 가득한 스릴러의 기운을 갖추어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과 함께 안절부절 못하게 된다. 특히 주인공을 계속해 따라가면서 손으로 들고 찍은 촬영이 내용의 숨 가쁜 상황을 잘 포착하고 있다.
동네의 태양열판 제조공장에 다니는 상드라(코티야르)는 금요일에 전화로 느닷없이 해고 통보를 받는다. 회사의 사정에 따라 17명의 직원 중 1명을 해고하든지 아니면 1,000유로의 보너스를 포기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동료 공원들의 공개투표에서 상드라가 제물이 된 것. 
노동자인 남편과 어린 두 아이를 가진 상드라네는 최근에야 달동네에서 탈출하고 웰페어 수령 신세도 면해 상드라의 해고로 집안에 먹구름이 드리운다. 게다가 상드라는 최근 신경쇠약증세로 직장을 한동안 쉬었다. 이 때문에 상드라가 해고의 표적이 된 것 같다.
회사에서 상드라에게 이번에는 비밀투표로 재투표의 기회를 주겠다고 언급, 상드라는 이 때부터 동료 직원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자신의 구명운동을 시작한다. 
첫 번째 투표에서 상드라 편을 들어준 동료는 단 2명뿐으로 총 7표를 얻어야 해고가 무효가 되는데 이를 위해 상드라는 같은 근로자들의 집을 찾아가 사정을 한다. 투표는 월요일에 있기 때문에 시간이 촉박하다. 
머리를 뒤로 따고 진바지에 원색의 탱크탑을 입은 상드라가 절박하게 동료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사정하는 모습에 가슴이 막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져 호흡이 가쁘게 된다. 결과야 어찌 됐든 상드라는 좋은 싸움을 하고 자아 재발견을 하는데 다르덴 형제의 인간의 근본적 선에 대한 믿음이 엿보인다.
경탄할 것은 코티야르의 연기다. 그는 영화의 모든 장면에 나오면서 아주 사실적이요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데 특히 표현력이 가득한 커다란 눈으로 표현하는 상드라의 착잡한 심정이 한 치의 과장도 없이 절실해 보는 사람의 가슴을 파고든다. 작중 인물과 배우가 하나가 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성인용. IFC. 일부극장. ★★★★(5개 만점)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기자 40년



2015년 1월4일은 내가 한국일보 기자생활을 한지 정확히 41년째가 되는 날이다. 나는 미국에서 사는 것을 후회한 적은 없지만 지금도 가끔 그리운 한국의 정경은 나의 한국에서의 7년간의 한국일보 기자시절이다. 특히 전쟁터처럼 와글바글 대는 편집국 내의 생명력과 이 생명력을 뿜어내는 선후배 기자 간의 패기와 우정과 의리가 사무치게 그리운 때가 있다.
기자의 소명 중 하나가 불의를 의롭게 하는 것일진대 당시 정보부 요원이 신문사에 상주하던 불의 하에서 글을 써야 했던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모두 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서로 똘똘 뭉쳤었는지도 모른다. 펜과 혀의 자유가 없었던 그 때 우리는 퇴근하면 경복궁 앞 중학동에 있던 회사 근처의 무교동 빈대떡 집에 들러 막걸리를 퍼마시면서 시대를 고뇌하고 또 속의 울분을 토해냈었다.
그 때 한국일보에는 김성우와 정달영 선배 등 재사와 문필가들이 많았다. 내가 아직까지 글을 쓰면서 살고 있는 것도 이들 선배들이 ‘쿠사리’를 주면서 글 단련을 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신문사에서는 ‘사스마리’와 ‘게라’ 같은 일본 용어를 여럿 썼었다.
나의 신문사 대선배로 후에 주불 특파원을 지낸 똑똑이 ‘타이거’ 김승웅 형과의 일화 하나. 사회부 기자 시절 키신저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쓴 내 기사를 김형이 데스크를 보면서 한다는 말이 “야, 박흥진 너는 박스기사는 잘 쓰면서 스트레이트 기사는 왜 이 모양이냐”고 핀잔을 주었다. 김형과 나는 지금도 교신하면서 친구처럼 지내지만 어디까지나 형은 형이다.
그러나 이런 망신은 졸병 기자들이 선배들에게 매일 같이 당하는 것이어서 어떤 때는 야단을 안 맞으면 오히려 이상했다. 쓴 기사가 그대로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군대처럼 엄격한 서열 하에 우리 선후배는 이렇게 필설로 때리고 맞으면서도 친형제들처럼 사랑했다. 그 정이란 가족보다 더할 정도였다. 한국일보의 전통이자 큰 자랑 중 하나가 한국 언론사들 중 가장 선후배 관계가 돈독하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일보 창간 20주년인 1974년 1월 입사해 6개월 간의 견습을 거쳐 먼저 3년간 외신부에서 근무했고 그 후 4년은 사회부에서 경찰 기자와 김포공항 출입 기자를 하다가 1980년 5월 LA의 한국일보 미주본사 근무를 자원해 지금까지 이 곳에서 글을 쓰고 있다.        
한국에 있을 때 기자생활 7년짜리는 졸병에 지나지 않아 선배들로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완전히 군대식인데 툭하면 야근을 하면서 집보다 신문사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그런 고난을 정의구현에 일조하는 엘리트라는 자부심으로 달랬다. 이 정의구현 하려다가 남산(정보부)에 찍혀 도주하거나 해고당하거나 이꼴 저꼴 다 보기 싫어 미국으로 이주한 선배들도 있다. 지금 우리 후배들이 누리는 언론 자유는 이들이 겪은 아픔 위에 마련된 것이다.
나는 무려 2,000여명이 지원한 입사시험을 통과한 견습 29기인데 입사동기 중에 한 명이 소설가 김훈이다(창간 20주년 운동회 사진-앞줄 맨 오른쪽이 나 그 뒤가 김훈). 김훈은 나보다 나이가 몇 살 아래지만 서로 죽이 맞아 함께 술께나 마셨는데 그 때부터 그는 뭔가 달랐다.
외신부에 들어가자마자 닉슨이 하야 했고 이어 월남 패망의 역사를 지켜 봤다. 기자란 박봉이어서(돈 때문이라면 삼성이나 현대에 들어갔을 것이다) 당시 외신부원들은 알렉스 헤일리가 쓴 ‘뿌리’ 영문판을 찢어 나눠 번역해 푼돈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어 사회부로 옮겨 동대문서(청량리와 태능서 포함)를 출입했는데 다른부 기자들은 경찰 출입 기자들을 개떼들이라고 불렀다. 경찰 기자의 총책인 시경출입 기자(캡틴)의 지시 하에 떼로 몰려다니며 주로 살인과 강도와 방화 같은 험한 사건을 취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부의 꽃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입사동기 중 나이가 제일 많은 데다가 내성적이어서 들개와도 같은 경찰 출입기자 하느라 애를 많이 먹었다.
진짜로 스트레스 심한 고된 생활이었는데 현재 한국일보 시카고 지사장인 김인규 후배는 사회부 견습시절 큰 사건이 난 경찰서에서 아예 상주를 하는 바람에 새댁이 경찰서로 그의 내복을 갖다 주기도 했다(기자 부인들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이렇게 고되니 퇴근 후 술로 노고를 아니 풀 수가 없었다. 졸병들끼리 모여 앉아 술을 마시면서 선배 흉도 보고 박정희 욕도 하다가도 주위를 둘러보기가 일쑤였다. 우리말을 들은 누군가의 고발로 남산에 끌려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부 기자 시절 가장 인상에 남았던 일은 눈물을 흘리면서 취재한 농약이 묻은 번데기를 먹고 죽은 달동네 어린 아이들 사건과 영화 ‘인천’에서 맥아더 역을 맡아 한국에 온 로렌스 올리비에를 단독 취재한 것.
과연 나는 기자로서의 소명을 제대로 했는가 하고 자문할 때도 있지만 내 인생은 신문의 인생이요 한국일보의 인생이다. 배운 것이 있다면 지구력과 확인과 사사건건 궁금해 하는 것. 앞으로 몇 년을 더 할지는 모르겠으나 40년 기자생활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으니 다행이다.  
                                                            <한국일보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