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2014년 9월 9일 화요일

빅 픽처:히치콕!



할리웃보울 안으로 들어서니 정면에 걸린 대형 스크린에 부루퉁한 입술에 찐빵같은 뺨을한 히치콕의 커다란 서양호박 모양의 얼굴 실루엣이 눈에 익다. 이 실루엣은 현재도 안테나TV에서 재방영하는 히치콕의 30분짜리 미스터리 서스펜스 앤솔로지 ‘알프렛 히치콕 제공’의 처음에 나오는 것으로 이때 사용된 음악이 구노의 뒤뚱거리는 ‘꼭둑각시의 장송행진곡’이다.
지난 일요일 서스펜스의 거장 알프렛 히치콕의 영화와 함께 음악이 연주되는 ‘빅 픽처:히치콕!’을 들으러 보울에 갔다. 묵직한 음성의 “하우 두 유 두. 긴장을 풀고 느긋이 앉아 공포가 찾아올 때까지 즐기시오”라는 히치콕의 인사말이 끝나고 스크린에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마니’ ‘새들’ ‘사이코’및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 등의 장면들이 몽타주로 쏜살같이 지나가면서 데이빗 뉴만이 지휘하는 할리웃보울 오케스트라가 ‘꼭둑각시의 장송행진곡’과 함께 이들 영화의 음악을 박력있게 연주했다.
데이빗 뉴만은 ‘호파’와 ‘아이스 에이지’ 등 100여편의 영화음악 작곡자이자 지휘자. 그의 아버지 알프렛은 폭스사의 영화 처음에 나오는 팡파레를 작곡한사람으로 ‘모정’ 등으로 오스카상을 무려 9번이나 탔다. 이날 알프렛이 작곡한 ‘해외 특파원’의 음악도 연주됐다.
연주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 나온 에바 마리 세인트(사진)의 해설과 함께 진행됐다. 첫 번에 연주된 음악은 러시아태생으로 ‘하이 눈’과 ‘O.K.목장의 결투’ 등의 음악을 지은 디미트리 티옴킨의 ‘기차 안의 낯선 사람들’. 음악이 극중 주인공의 하나로 낯선 사람에게 교차살인을 제의하는 로버트 워커처럼 교활하고 음모적이다.
티옴킨은 이날 프로그램에 포함된 입체영화 ‘다이얼 M을 돌려라’의 음악도 작곡했는데 마리 세인트는 히치콕은 입체영화를 성가신 아이들 장난같은 것으로 여겼다고 들려줬다.
히치콕은 영국에서 무성영화로 감독생활을 시작했는데 첫곡에 이어 그의 대표적 무성영화 ‘하숙생’과 함께 스파이 스릴러 ‘39계단’ 및 히치콕이 즐겨 다룬 도망가는 남자의 얘기인 ‘사보퇴르’의 음악이 차례로 연주됐다.
히치콕이 1939년 도미해 처음 만든 영화가 로렌스 올리비에와 조운 폰테인이 나온 으스스한 분위기의 ‘레베카’다. 이날 연주된 ‘레베카’의 음악은 ‘선셋대로’와 ‘젊은이의 양지’로 오스카상을 탄 프란츠 왝스맨의 것으로 그는 ‘레베카’ 외에도 ‘의혹’과 ‘이창’ 등 히치콕의 영화음악을 작곡했다.    
히치콕과 영화사에 길이 남는 감독과 작곡가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모두 7편의 히치콕의 영화음악을 작곡한 버나드 허만의 작품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사이코’다. 음침하기 짝이 없는 음악으로 허만은 ‘흑백영화에 맞는 흑백음악’이라고 말했다. 음악이 매우 검고 살의가 있어 여름밤 기운마저 소슬하게 느껴졌다.
휴게시간 후 첫 번째로 연주된 음악이 역시 허만이 작곡한 ‘환상’이다. 제임스 스튜어트와 킴 노백이 나오는 샌프란시스코를 무대로한 집념적인 사랑과 고독 그리고 살인과 죽음에 관한 명작으로 음악이 귀기가 감돌면서도 로맨틱하고 또 집요하다.
허만은 이날 연주된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음악도 작곡했다. 히치콕 특유의 엉뚱한 사람 잡는 경쾌한 스릴러로 음악이 신경을 위협하면서도 재치있고 또 힘차다. ‘환상’과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음악은 독립음악으로서도 훌륭하다. 이 영화들에 허만의 음악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영화에 대한 반응도 달라졌을 것이다.      
히치콕영화의 음악은 여러번 오스카상후보에 올랐지만 막상 상을 탄 것은 헝가리태생으로 ‘벤-허’의 음악을 작곡한 미클로스 로자의 ‘망각의 여로’ 하나뿐이다. 둘 다 정신병치료소의 의사로 어두운 과거를 지닌 그레고리 펙과 그를 사랑하는 잉그릿 버그만의 마음을 음으로 묘사한 ‘사랑의 주제’가 격정적으로 가슴을 엄습한다. 마치 집단자살이라도 하듯이 떨어지는 가을낙엽들처럼 자포자기적으로 로맨틱하다.
이어 프렌치 리비에라에 은퇴한 심야 보석전문털이 케리 그랜트와 미국인 사교계여인 그레이스 켈리의 유희하듯 하는 사랑의 제스처와 대사로 유명한 사뿐한 스릴러 ‘나는 결백하다’의 밤의 불꽃놀이 장면이 스크린을 장식했다. 이 불꽃장면은 남녀간 섹스의 절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음악도 영화에 잘 맞게 장난끼가 있으면서도 감각적이다.
마지막으로 ‘사이코’에서 샤워하는 재넷 리를 앤소니 퍼킨스가 식칼로 난자 살해할 때 나오는  사람 잡는 충격적인 음악이 연주됐다. 순전히 현으로만 연주되는데 바이얼린이 떼를 지어 목청을 다해 비명을 지르면 베이스가 음험하게 맞장구를 차면서 듣는 사람의 전감관을 유린한다. 천재적 영상처리와 마법적 음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장면이다.  
여름밤의 대기 속에 사이트와 사운드를 포도주에 타서 마시며 즐긴 뒤 히치콕의 “굿 나잇” 배웅을 받으며 보울을 나섰다.  <한국일보 편집위원 / hjpark1230@gmail.com>


2014년 8월 29일 금요일

로빈 후드의 마지막 사랑(The Last of Robin Hood)

반세기 전 에롤 플린과 15세 단역소녀 애정행각


애들랜드와 플린이 단란한 시간을 즐기고 있다.

천하의 바람둥이이자 물고기가 물마시듯 술을 마시고 마약을 즐겼던 할리웃 황금기의 미남 수퍼스타로 ‘로빈 후드의 모험’에 주연한 에롤 플린과 그가 사랑했던 15세난 단역배우 베벌리 애들랜드 간의 메이-디셈버 로맨스를 그린 전기 애정 드라마다. 플린의 과거를 들여다보는 재미는 있으나 각본이 허약해 영화가 물에 물 탄 것처럼 심심하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을 좀 더 산성이 강하게 처리하면서 차라리 야한 태블로이드 이야기 식으로 다루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톡 쏘는 신랄한 맛이 모자라고 희대의 스캔들을 너무 온순하게 다뤄 나른한데 두 감독 리처드 글래처와 워시 웨스트모어랜드는 플린을 매우 동정적으로 묘사하면서 관객들도 그의 편을 들라는 식으로 다뤘다. 
그러나 이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과거 할리웃의 실상과 이면을 들여다본다는 점과 함께 플린을 판에 박듯이 닮은 케빈 클라인의 모습과 연기로 인해서 보고 즐길 만하다.
영화는 베벌리의 허영과 명성에 눈이 먼 어머니 플로렌스의 딸에 관한 전기 ‘빅 러브’와 베벌리 및 그의 할리웃 고교 동창생으로 플린의 조수였던 로니 쉐들로(맷 케인)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오디션 차 영화사에 온 15세난 베벌리(다코타 패닝-훨씬 나이 들어 보인다)를 보고 반한 플린은 베벌리를 유혹해 대뜸 섹스를 한다. 
플린은 이 때 세 번째 아내가 있었다. 한편 베벌리는 할리웃에서의 이런 일은 당연지사로 여기고 일회 행사라 치부하는데 플린이 베벌리를 찾아와 “나는 너를 진실로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이런 둘 사이에 개입하는 사람이 전직 댄서로 의족을 한 베벌리의 어머니 플로렌스(수전 서랜든). 플로렌스는 허영과 명성에 눈이 먼 여자로 베벌리를 스타로 만들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그래서 미성년자인 딸의 나이도 속이고 플린과 딸의 관계를 말린다기보다 오히려 부추긴다. 
뒤늦게 베벌리가 미성년자인 것을 안 플린은 베벌리와 동행 때 플로렌스를 따라 붙게 시켜 세상의 눈을 속인다. 그리고 플로렌스는 딸 덕택에 할리웃의 호사를 공짜로 즐긴다. 그런데 플린은 1943년에도 13세 소녀와의 성관계로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판결을 받았다. 
1959년 플린이 심장마비로 50세로 사망하기 2년 전부터 시작한 영화는 2년간의 플린과 베벌리의 관계를 에피소드 식으로 그리고 있다. 스타가 되려고 에를 쓰는 베벌리를 위해 플린은 스탠리 쿠브릭을 만나 ‘롤리타’에 자신과 베벌리를 써달라고 부탁을 하나 거절당한다. 또 플린은 자기 돈을 써 쿠바에서 베벌리를 출연시켜 싸구려 영화 ‘쿠바의 여전사들’을 만들기까지 한다. 
깜짝 놀랄 만큼 플린을 닮은 클라인이 연기를 기차게 잘하는데 패닝은 다소 모자란다. 역시 메이-디셈버 로맨스를 다룬 ‘롤리타’에 나온 수 라이언의 순진하면서도 섹시한 모습과 연기를 참고했는지 모르겠다. ★★★(5개 만점) <R. Samuel Goldwyn. 랜드마크(310-470-0492).>   

범죄 인생 (Life of Crime)

강약 없이 단조로운 납치범죄 코미디

오델(왼쪽)이 복면을 씌운 믹키 앞에서 믹키의 남편에게 전화를 건다. 가운데는 루이스.

제니퍼 애니스턴이 나오는 납치범죄 코미디로 무미건조하다. 지극히 무기력한 영화로 사실적이라기보다 농담 같은데 그 농담마저 별로 우습지 않다. 그리고 나오는 인물들의 성격개발도 부족해 배우들이 연기는 괜찮은데도 소모된 셈이다.
강렬한 충격이 결여된 온순하기 짝이 없는 영화의 원작은 범죄소설 작가 고 엘모 레너드(‘겟 쇼티’)의 ‘스위치'. 귀엽게 봐주려고 애를 쓰는데도 서술형태의 굴곡이나 흐름에 강약이 없어 단조롭다. 
1970년대 말 디트로이트. 서푼짜리 범죄인생 오델(야신 베이)은 교외에 사는 사업가 부자 프랭크(팀 로빈스)가 바하마에 젊은 섹스머신 정부 멜라니(이슬라 피셔)와 거액의 빼돌린 돈을 숨겨 놓았다는 것을 알고 상냥한 성격의 동료 루이스(존 호크스)에게 프랭크의 트로피 아내인 믹키(애니스턴)를 납치해 몸값을 받아내자고 제의한다.
오델과 루이스는 나치 숭배자로 다량의 총기를 소유하고 있는 리처드(마크 분 주니어)를 팀에 합류시켜 프랭크가 바하마에 간 사이 범행에 들어간다. 그리고 납치한 믹키를 리처드의 집에 숨겨 놓는다. 이어 오델은 바하마로 전화를 건다.
“네 아내를 다시 보고 싶으면 100만달러를 내라”는 전화를 받은 프랭크는 전화를 끊은 뒤 멜라니와 함께 좋아서 죽겠다며 깔깔 대소를 한다. 프랭크는 멜라니와 살기 위해 믹키 모르게 이미 이혼장을 제출한 터라 아내의 몸값을 지불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 것이다.
이에 당황하게 된 것은 오델과 루이스. 믹키를 어떻게 할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믹키는 납치범들을 통해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또 이혼장까지 냈다는 것을 알고 복수의 이를 간다. 그런데 믹키가 범인들과 함께 지내면서 믹키와 착한 마음의 소유자인 루이스 간에 묘한 감정이 소생한다. 스톡홀름 신드롬이다. 
오델과 루이스는 믹키를 풀어주기로 하는데 자유의 몸이 된 믹키는 오델과 루이스에게 프랭크에 대한 보복을 함께 시도하자고 제안한다.
재미있고 영특한 내용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반면 연기들은 다 좋은 편이다. 특히 늘 취약점을 안 보여주고 뻣뻣이 굴던 애니스턴이 남편에게서 구박을 받다가 반격을 가하는 아내의 역을 심각하면서도 우습게 잘한다. 대니얼 쉑터 감독. R. Roadside Attractions.            선댄스 선셋 등 일부지역. ★★½(5개 만점)

‘해무’



최근 한국영화 10편을 봤다. 대부분 한국서 히트했거나 해외 영화제에 초청을 받은 것들이다.
한국에서 보다 유럽에서 더 유명한 김기덕 감독의 복수극 ‘일대일’은 한국의 구정권과 현 사회비판을 앞에 내세운 감독 자신의 신세한탄이자 화풀이 같은 영화다. 김 감독 특유의 폭력과 잔인이 판을 치는 설교조의 타작이다.
이선균이 나오는 범죄스릴러 ‘끝까지 간다’는 빈자의 양말처럼 플롯에 구멍이 많아 그 내용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다.
하정우가 주연하는 ‘군도’는 철종시대 천민들의 반란을 그린 한국판 ‘로빈 후드’인데 코미디와  사극과 웨스턴과 쿵후 영화를 짬뽕한 국적불명의 튀기 같은 영화. 음악마저 스파게티 웨스턴식인 넌센스다.
‘스톤’은 바둑과 폭력을 접목한 이색적인 내용으로 바둑과 인생을 비교하면서 인간적 얘기를 다뤘으나 잔인한 폭력이 이런 뜻을 저해한다. 볼만은 하다.
‘야간비행’은 지난해에 골든 글로브와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 후보로 출품한 ‘불량소년’ 스타일의 소품. 청소년 문제와 동성애를 다뤘으나 깊이가 부족하고 진행속도가 처지는데 이것 역시 폭력적이다.
설경구가 나온 ‘소원’은 아동 성폭행을 당한 한 가족의 비극을 희망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을 소박하고 곱게 그렸다. 사회문제를 다룬 영화로 규모가 작아 마치 TV 영화를 보는 것 같지만 잘 만들었다.
청소년 성폭행 문제를 다룬 ‘한공주’는 단아한 소품인데 후반 들어 진행이 축 처진다. 역시 사회문제를 다룬 영화인데 주제 외에 주변 얘기를 너무 많이 늘어놓아 당초 하고자 한 얘기가 제대로 전달이 안 되고 있다. 그러나 볼만한 영화다.
배두나가 주연한 폭력에 시달리는 불우아동과 동성애 문제를 다룬 ‘도희야’는 볼만한 소품이나 강력한 클라이맥스에 이르기 전까지 같은 얘기를 반복하고 있어 보면서 지치겠다. 이 것 역시 폭력이 자심하다. 다소 맹한 모습과 연기로 알려진 배두나가 과거를 지닌 여자의 연기를 안으로 가라 앉혀 강한 저류로 몰아가지 못해 무기력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 영화는 이창동 감독이 제작을 맡고 정주리가 감독했는데 9월4일부터 열리는 올 토론토 국제영화제 ‘도시기행’(올해는 서울) 부문에 초청됐다.
한국에서 1,600만명이 관람하면서 거국적 뉴스가 된 ‘명량’은 그저 보고 즐길 만한 액션 사극이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을 그린 우국충정의 영화로 동양대 진중권 교수의 말처럼 ‘졸작’이라고 까지는 할 수 없지만 아주 평범한 오락영화다.
우선 이순신 역의 최민식이 전연 카리스마가 없고 성격개발도 전무하다. 그리고 영화 전반부는 말이 많은 드라마요 후반부는 액션영화로 양분돼 마치 2개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액션신은 볼만하나 너무 길어 부담이 가고 컴퓨터 특수효과도 엉성하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자연 아키라 쿠로사와의 ‘란’과 같은 드라마와 액션의 절묘한 조화와 뚜렷한 인물과 성격묘사를 비롯해 장엄과 우아미를 고루 갖춘 사무라이 사극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명량’이 한국영화 사상 초유의 관람객수를 기록하면서 국가를 들었다 놓을 듯한 사건이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현 한국민들의 반일감정과 백성을 먼저 생각한 진정한 지도자인 이순신과는 다른 현 한국의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인들에 대한 반동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있다. 그리고 영화의 배급사인 CJ 엔터테인먼트의 스크린 독과점으로 인한 싹쓸이 작전도 주효했다는 해석도 있었다. 여기에 ‘너도 봤으니 나도 봐야지’ 하는 무리의식도 한몫 했을 것이다. 좌우지간 나로서는 이 영화의 흥행대박이 불가사의할 뿐이다.
내가 본 10편의 영화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이 봉준호가 제작하고 심성보가 감독한 생존문제를 강인하고 강렬하게 그린 실존주의적 영화 ‘해무’다(사진.) 물고기 대신 한국으로 밀입국을 시도하는 재중 동포를 싣고 귀항하는 트롤선 어부들과 밀입국자들과의 관계를 그린 사납고 거친 스릴러로 현실성이 강하다. 인간의 수성과 함께 휴머니즘을 충격적이면서도 따스하게 그렸다. 연기들도 좋다. ‘해무’는 올 토론토 국제영화제 갈라 부문에 초청됐다.
문제는 끔찍하고 잔인한 폭력. 이런 폭력은 한국영화의 장점이자 단점이라는 이중성을 지녔다. 한국영화는 세계적으로 사납고 거칠며 폭력적이요 비타협적인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데 많은 경우 이런 특징을 살린다고 폭력을 남용하고 있다.
한국영화의 또 다른 문제는 긴 상영시간. ‘벤-허’도 길지만 그것은 충분한 내용 서술을 위한 시간인 반면 한국영화들은 쓸데없이 시간을 끄는 경우가 많다.            
한국영화는 그동안 질적 기술적으로 큰 발전을 이뤘지만 이웃 일본과 달리 아직 한 번도 오스카상 후보에 오른 적이 없다. 이번 오스카상 후보로 ‘해무’를 밀어볼 만한데 폭력이 큰 핸디캡이다.    <한국일보 편집위원 / hjpark1230@gmail.com>    

2014년 8월 27일 수요일

‘헌드레드-푸트 저니'헬렌 미렌



“음식이란 지구를 도는 인간문화의 표지석”


현재 상영중인‘헌드레드-푸트 저니’(Hundred-Foot Journey)에서 프랑스 남부 한 작은 마을의 자신이 경영하는 고급 식당 바로 앞에 인도 식당을 차린 인도에서 이민 온 일가족과 경쟁을 하게 된 본심은 착하나 다소 까다로운 여주인 말로리로 나오는 헬렌 미렌(69)과의 인터뷰가 베벌리힐스의 포시즌스 호텔에서 있었다. 미렌과 인도의 베테런 배우 옴 푸리가 나오는 영화는 그림처럼 곱고 달콤하나 극적 깊이는 모자란다. 그러나 모두 연기파인 미렌과 푸리의 연기와 콤비는 보기 좋다. 우아한 백색 돌체 가바나 레이스 드레스를 입은 미렌은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는데 단아하게 앉아 아름다운 앨토 음성으로 유머와 위트를 섞어가면서 질문에 즐겁게 대답했다. 사람이 품위가 있으면서도 매우 겸손해 이웃집 착한 아주머니를 만난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여왕’으로 오스카 주연상을 타 영국 여왕으로부터‘데임’ 칭호를 받은 미렌은 군주제를 달갑지 않게 여긴다. 미렌이 미국서 영화를 촬영하고 있을 때 여왕으로부터 초청을 받았을 때도 스케줄을 이유로 초청을 수락하지 않았다.                                

―영화에 진수성찬 음식이 자주 나와 보면서 배가 고팠는데 촬영 때도 그랬는가.
“그렇다. 보기 전이 아니라 본 다음에 식사를 해야 하는 영화다. 좋은 식당을 예약하고 영화를 본 다음에 식사하기를 권한다.”

―영화에서 당신의 식당은 식당의 질을 판정하는 미셸린 등급의 별 하나를 받았는데 최고등급인 별 세 개짜리 식당을 가본 적이 있는가.
“프랑스에서 가 봤다. 그 등급은 음식뿐 아니라 서비스와 화장실과 카펫의 청결도 그리고 식기와 유리잔과 식사용 칼과 포크 등 모든 것이 완벽해야 받는다. 그런데 나는 사실 그런 식당엘 가면 다소 불편하다.”

―영화를 감독한 스웨덴 태생의 라세 할스트롬과 일한 경험에 대해 말해 달라.
“그는 세트 분위기를 아주 편안하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이다. 마법사의 술수를 지닌 사람으로 이런 영화에는 그것이 꼭 필요하다. 그래서 일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영화를 어디서 찍었나.
“툴루즈 북쪽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한 마을에서 찍었다. 영화에서 보는 거리의 시장은 실제 시장이다. 식당의 음식도 정말 맛있더라. 영화를 찍는다기보다 휴가를 즐기는 기분이었다.” 

―영화는 서로 다른 문화의 혼합을 얘기하고도 있는데.
“그렇다.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미국의 음식들은 다 다른 나라의 이민자들로부터 전수 받은 것이라고 해도 되겠다. 미국인들이 즐기는 피자나 베이글 등이 다른 나라에서 온 것이 듯이. 따라서 우리의 음식은 다양한 이민의 혼합이라고 하겠다. 음식이란 지구를 돌면서 행해지는 인간성의 움직임의 표지석과도 같은 것으로 우리 영화도 그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인도 음식 좋아하는가.
“남편(‘사관과 신사’ ‘레이’를 감독한 테일러 핵포드)과 나는 해외에 있다가 영국에 돌아가면 제일 먼저 인도 식당엘 간다. 외국에 있을 때 제일 생각나는 것이 인도 음식이다.”

―요리할 줄 아는가. 당신과 음식의 관계는 어떤가.
“잘 못한다. 수프가 고작이다. 나는 러시아계 후손이어서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 음식을 좋아하고 양배추로 만든 음식은 다 좋아한다. 나보다는 남편이 음식 솜씨가 낫다.”

―당신은 세계를 돌면서 온갖 음식을 맛보았을 텐테 한국 음식 먹어봤는가.
“LA의 활기차고 대단한 코리아타운에서 먹었다. 맛있는 음식이 많더라. 내 의붓아들이 다니던 학교에 한국인 급우들이 많아서 사실 한국 음식은 내 아들이 소개를 한 셈이다. 아들은 한국에 친구를 만나러가서 산 낙지도 먹었는데 그것을 유튜브에 올려 유명해졌다.”

―옛날과 달리 최근 들어 유색인종들이 이 영화에서처럼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 경향이 계속되길 바란다. 경향이라기보다 우리의 세계관의 변화라고 해야겠다. 이런 변화가 오기까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 것 같은데 사실 우린 아직 그 곳에 진실로 이르진 못했다고 본다. 영화 ‘간디’가 있기 전만해도 보통 미국 사람들은 인도의 존재에 대해서 전연 알지 못했다고 해도 되겠다. ‘간디’ 이후 이런 생각을 고쳐 놓은 것이 ‘슬럼독 밀리어네어’다. 다문화와 함께 지구란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또 평등한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진 아직도 좀 더 가야 될 것 같다. 영화란 세상을 반영할 뿐이다. 따라서 먼저 세상을 변화시키면 영화는 그 변화를 반영하게 된다.”

―당신은 여러 나라 말을 할 줄 아는데 언어를 사랑하는가.
“나는 언어를 사랑한다. 나는 늘 외국에 가면 최소한 그 나라 말로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같은 기본적인 인사말을 배워 쓴다. 또 영화제서 상을 줄 때면 인사말을 그 나라 말의 발음기호로 적은 글을 보고 읽는다.”

―당신의 인생철학은 무엇인가.
“나도 남들처럼 낙망하고 자신의 효용가치에 대해 의심하고 또 어리석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을 느끼면서도 계속해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난 특별히 신을 믿진 않는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커다란 영적 이해도 갖고 있지 않다. 난 철저한 실용주의자다. 난 그저 자신에 대해 솔직하려고 할 뿐이다.”

―당신은 다음 영화 ‘황금 옷의 여인’에서 화가 클림트의 여인으로 나오는데 미술이란 당신에게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 노력의 경이 중 하나다. 나는 미술을 좋아해 화랑에 가서 그림을 보는 것을 즐긴다. 그리고 직접 그리기도 한다. 그것은 나의 큰 기쁨 중 하나다. 음악보다 그림을 더 좋아한다. 나는 별로 음악적이지가 못하다. 그러나 음악회에 가서 생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레코드음악은 딱 질색이다.”

―프랑스 여인 역을 위해 어떻게 접근했는가.
“난 프랑스 광이어서 역을 제의 받고 아주 좋아했다. 난 프랑스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자기들이 낫다고 으스대는 것까지 좋아한다. 그래서 난 언제나 남모르게 프랑스 배우가 되길 원했다. 난 프랑스 영화를 매우 좋아한다. 프랑스 영화는 미국이나 영국 영화보다 민감하고 흥미 있으며 인물 묘사도 깊다. 난 사실 이 영화의 내 역을 프랑스어로 하길 원했다. 그러나 미국 사람들은 자막 읽기를 싫어한다. 특히 이 영화처럼 재미 위주의 디즈니 영화는 더 하다.”

―그렇다면 프랑스에 대해 싫어하는 점은 무엇인가.
“프랑스인들의 자부심에는 남을 비판 평가한다는 점이 있다. 그 건 별로 안 좋다.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를 못해 서툴게 해보려고 애를 쓸 경우에도 프랑스 사람들은 영어로 ‘당신 프랑스어 별로 잘 못하네’라고 핀잔을 준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그럴 경우 반응이 다르다. 그들은 외국인이 이탈리아어를 하려고 애를 쓰는 것을 보면 이탈리아어로 ‘오 당신 이탈리아어 하네’하고 반긴다.”

―당신이 오래 전에 TV 시리즈 ‘프라임 서스펙트’에 나왔을 때만 해도 여자가 주연인 TV쇼가 많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런 쇼가 많다. 어떤 변화가 있었다고 보는가.
“참 놀라운 발전이다. 요즘은 여자가 주인공인 경우가 더 많다. 내가 그 시리즈에 나왔을 때만해도 제작진은 자신이 없어 출연계약은 3회분을 했는데도 1회만 찍고 시청자들의 반응을 보자는 식이었다. 이런 것이 변한 것은 우리의 세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여자 경찰서장, 국무장관 그리고 각계각층에서 여성의 위치가 부상하면서 드라마의 세계도 세상의 변화를 따른 것이라고 본다.”

―당신은 미술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어떤 종류의 미술을 좋아하는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는 칸딘스키다. 따라서 현대와 클래식이 혼성된 것이라고 하겠다. 나는 클래식 화가들도 좋아한다. 풍경화를 좋아하는데 특히 옛 덴마크 화가들의 그림이 아주 아름답다. 브뤼겔의 그림을 좋아한다.
                                                                 <한국일보 편집위원 / hjpark1230@gmail.com>

신 시티: 어 데임 투 킬 포(Sin City:A Dame to Kill For)

복수와 애증, 악몽같은 도시… 연기·액션은 화려


드와이트(조쉬 브롤린·왼쪽)는 팜므 파탈 에이바(에바 그린)의 치명적 매력의 제물이 된다.

2005년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만든 흑백 필름느와르의 속편으로 폭력적이요 냉소적이며 허무하다. 올스타 캐스트의 입체영화인데(구태여 입체영화로 만들 필요가 없었는데) 전편이 나왔을 때 주었던 신선한 충격이 많이 감소됐다.
배우들의 연기와 시각 스타일 및 액션과 저주 받은 도시의 분위기 등은 즐길 만하지만 얘기가 횡설수설하는 듯이 두서가 없고 단편적인 데다가 호평을 받고 흥행서도 성공한 전편을 의식한 듯이 너무 멋을 부리려고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해 부담이 간다.
얘기는 두 개의 중심 플롯으로 구성됐다. 하나는 복수심에 불타는(이 영화는 복수하려는 사람들로 만원을 이룬다) 젊은 프로 도박사 자니(조셉 고든-레빗)와 그의 증오의 대상인 부패한 정치인 로크(파워즈 부스)의 대결. 둘이 포커 대결하는 장면이 멋지다.
이 얘기에 역시 복수심에 불타는 후진 스트립 조인트의 스트리퍼 낸시(제시카 알바)의 무자비한 복수가 곁들여 지는데 영화는 이런 내용을 두 부분으로 잘라 영화의 앞과 뒤를 장식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얘기가 일관성을 잃어 혼란스럽다.
다소 반복적인 후반의 얘기는 드러난 젖가슴을 무기로 남자를 잡는 치명적인 마녀와도 같은  에이바(프랑스 배우인 에바 그린은 여러 영화에서 젖가슴을 내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의 독성 있는 성적 매력과 유혹에 빠져 폐인이 되다시피 한 드와이트(조쉬 브롤린)와 에이바의 애증이 뒤범벅이 된 관계가 중심을 이룬다. 
드와이트 역은 전편에서는 클라이브 오웬이 맡았었다. 그런데 필름 느와르의 전형적인 수법인 주인공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 드와이트의 하소연이 설득력이 모자란다. 오웬의 멋을 못 따르는 브롤린과 그린의 콤비는 대단히 화끈하지는 못한데 그린이 브롤린을 완전히 압도한다. 이런 여자에게 걸렸다 하면 지옥으로 떨어지고 마는데 팜므 파탈 중의 팜므 파탈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여러 명의 부수 인물들이 나와 칼을 쓰고 총을 쏘고 치고 박고하면서 영화에 유혈폭력이 난무하는데 흩뿌려지는 피는 백색으로 처리하면서 때로 붉은 색으로도 채색했다. 이런 시각적 화려미가 이 영화의 제일 보기 좋은 점이다.
전편에서 나왔던 마브 역의 미키 로크와 형사 존 역의 브루스 윌리스가 다시 나오고 이 영화에 처음 등장한 한국계 배우 제이미 정이 미호로 나와 하늘을 훨훨 나르면서 긴 칼을 휘둘러 여러 명의 나쁜 놈들의 목을 잘라버린다. 이밖에도 레이디 가가, 레이 리오타, 크리스토퍼 로이드, 스테이시 키치, 로사리오 도슨, 데니스 헤이스버트 및 제레미 피븐 등이 나온다.
악몽과도 같은 도시와 그곳에 사는 버려진 인간들의 내면을 좀 더 깊이 파고들었으면 하는 아쉬움과 함께 전편의 얘기를 혁신적으로 뛰어넘지 못하는 내용 등 아쉬운 점이 더러 있지만 보고 즐길 만은 하다. 감독은 전편처럼 밀러와 로버트 로드리게스가 공동으로 했는데 로드리게스는 연출 외에도 제작과 작곡과 촬영과 편집까지 했다. R. Dimension. 전지역. ★★★(5개 만점)

‘보기와 바콜’





그 때는 얼굴들이 있었다. 할리웃 황금기의 스타들은 스크린을 광채로 가득 채우는 마력이 있었다. 이 얼굴들 중의 하나였던 로렌 바콜이 12일 고향인 뉴욕에서 89세로 사망했다. 참으로 멋진 클래식 스타일을 지닌 스타였었다.
바콜하면 떨쳐 버릴 수 없는 이름이 생전 ‘보기’라 불린 터프가이 험프리 보가트다. 둘이 만나 사랑에 빠진 얘기는 영화 속의 영화나 다름없다. 둘은 헤밍웨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워드 혹스가 감독한 전시 액션 드라마 ‘투 해브 앤드 해브 낫’(1944ㆍ사진)에서 공연하며 만났다. 이 영화로 스크린에 데뷔한 바콜은 19세였고 이미 수퍼스타였던 보기는 44세였다.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는 바콜이 보기를 유혹하면서 던지는 대사다. 바콜이 깔보는 듯한 시선으로 보기를 내려다보면서 안개가 자욱한 음성으로 이렇게 은근짜를 놓는다. “당신 휘파람불 줄 알지요. 그저 두 입술을 함께 모아 불면 돼요.” 바콜의 얼굴이나 자태가 도저히 19세짜리의 그것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성숙하고 자극적이다.
아마 보기도 이 장면 때문에 바콜에게 깊이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 때 세 번째 부인과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던 보기와 바콜은 밀회를 하면서 사랑을 불태우다가 이듬해 결혼했다. 보기는 너무 행복해 결혼케익을 자르면서 울었다고 한다.
전설적인 할리웃 커플의 탄생이다. 또 다른 유명한 할리웃 커플로는 게이블과 롬바드 그리고 트레이시와 헵번이 있지만 보기와 바콜의 농도 짙은 화학작용을 따르진 못한다. 보기와 바콜의 합성에 비하면 브란젤리나(브래드 핏과 안젤리나 졸리)의 그것은 아이들 소꿉장난이다.
바콜은 전형적인 미녀는 아니었다. 광대뼈가 뚜렷한 개성이 강한 얼굴인데 시선이 자못 상대를 희떱게 보듯이 오만하다. 이 시선과 함께 바콜의 상표가 되다시피 한 것이 그의 천근만근 무겁고 복날 땀에 절어 피곤에 지친 듯한 허스키한 음성이다. 사이렌의 치명적 흡인력을 지닌 성감대를 자극하는 음성이다.
19세에 큰 어른 보기에 당당히 맞섰던 바콜은 터프가이에 걸맞은 터프걸이었다. 카리스마와 우아함을 겸비했던 바콜은 지적이요 독립적이며 섹시한 여자로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이었다. 보기와 바콜은 첫 공연작 이후 모두 1940년대에 만든 ‘빅 슬리프’와 ‘다크 패시지’ 그리고 ‘키 라르고’에 함께 나왔다.
둘은 골초였던 보기가 1957년 57세로 후두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남매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바콜은 그 후 프랭크 시내트라와 잠시 약혼을 했다가 파혼하고 배우 제이슨 로바즈와  8년간의 기복이 심한 결혼생활 끝에 이혼했다.
나는 어렸을 때 한국에서 바콜의 영화들을 여러 편 봤는데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록 허드슨과 공연한 끈끈한 드라마 ‘리튼 온 더 윈드’와 바콜이 애정의 표시로 애인 그레고리 펙의 귀를 잘근잘근 씹는 로맨틱 코미디 ‘디자이닝 우먼’(바콜이 제일 좋아하는 영화)이다. 그리고 몬로와 베티 그레이블과 공연한 노래가 있는 로맨틱 코미디 ‘하우 투 매리 어 밀리어네어’도 즐겁다.
바콜은 보기 사망 후 배우로서의 생애도 다소 빛을 잃기 시작한다. 폴 뉴만과 나온 ‘하퍼’와 존 웨인의 유작 ‘슈티스트’ 그리고 앙상블 캐스트의 ‘머더 온 디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등은 모두 조연급 역. 그러나 뒤늦게 ‘미러 해즈 투 페이시즈’로 골든 글로브 조연상을 탔고 오스카상 후보에도 올랐다. 2009년 오스카 명예상을 받았다.
17세 때부터 모델을 하면서 브로드웨이 무대배우로 연기를 시작한 바콜은 나이를 먹어 무대에 복귀해 ‘어플러즈’와 ‘우먼 오브 더 이여’(트레이시와 헵번이 나온 동명영화가 원전)로 토니상을 탔다. 60여년의 연기생활 간 60여편의 영화에 나왔는데 사망할 때도 범죄영화에 출연하기로 돼 있었다.
바콜은 혼자서도 우뚝 설 수 있는 배우였지만 보기의 카리스마가 원체 강해 그의 후광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바콜도 “나는 결코 그로부터 멀어질 수가 없다”고 고백했다. 바콜은 연기를 사랑한 스타였지만 자기를 “베이비”라 부르며 사랑하는 보기의 뜻에 따라 가정을 먼저 여겼다. 그리고 바콜은 스타덤이라는 것을 생애라기보다 우연이라고 생각한 건전한 생각을 지녔던 사람이었다.
보기와 바콜은 정치적으로도 소신이 뚜렷했던 커플로 전후 미국에 매카시 광풍이 불던 때 워싱턴 D.C.로 날아가 의회에 매카시즘은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배우와 감독 사이에 서로를 빨갱이라고 고발하던 당시로서는 굉장히 용감한 행위였다.
‘투 해브 앤드 해브 낫’의 또 다른 은근히 선정적인 장면은 보기와 바콜의 첫 키스신. 바콜이 보기의 무릎에 앉아 보기에게 키스를 하자 보기가 “무엇 때문에 했지”하고 묻는다. 바콜이 “그걸 좋아할지 궁금해서 했어요”라고 답하자 보기가 “결정은 뭐야”라고 묻는다. 이에 바콜이 “아직 몰라요”라더니 다시 보기에게 정열적으로 키스를 하면서 “당신이 도와줄 땐 더 낫지요”라고 한 마디 한다. 이제 보기와 바콜은 하늘에서 이런 사랑의 희롱을 하면서 여생을 즐기게 됐다.  <박흥진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